코멘트
김지원

김지원

7 years ago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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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스페리아

영화 ・ 2018

평균 3.3

루카 구아다니노는 공기의 밀도를 조절할 줄 아는게 분명하다. 아주 섬세한 조율로 보는 사람의 숨을 턱턱 막히게 한다. 빠르고 밀도 높은 숏의 전환과 가쁜 숨소리의 중첩들로, 화면 안에 채워지는 시각적/청각적 숨의 농도는 짙어지지만 보는 사람은 어쩐지 점점 더 숨이 옥죄어 오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는 마치 세밀한 조각가 같기도 하다. 분위기라는 형상을 구현해내는 조각가. 그것도 아주 세밀하고 섬세한 질감 표현을 하는, 그리고 그 과정을 찬찬히 조망하게 하는. 이를 지켜보는 사람은 그가 형성해가는 분위기에 점차 스며들고 전이되게 만든다. 그래서 서스페리아는 급격히 엄습해오는 공포는 아니다. 오히려 정신없이 쏟아지는 불쾌한 이미지들, 스멀스멀 올라오는 고요하지만 불길한 기류들을 꼼짝없이 감내해야 함에서 오는 압박감이 주는 공포에 가깝다. 루카 구아다니노는 몽타주와 급작스런 단절의 조각들로 ‘고요한 격정’과도 같은 분위기의 작품을 형성해낸다. 사실 그가 공포영화를 리메이크 한다길래 의아했는데 영화를 보다 보니 왜 이런 장르에 손을 댔는지 알 것 같았다. 감정과 분위기라는 추상적인 것들을 섬세하게 형상화하는데 특화된 그이기에, 공포는 사랑만큼이나 그의 장기를 여실히 발휘할 수 있는 영역이었으리라. 그렇기에 그의 전작과는 전혀 다른 완성품이지만, 같은 장인이 만들었음을 보여주는 특유의 세밀하고 섬세한 조각질은 여전했다. 영화는 독일의 68운동을 기저에 깔고 가는 듯 보인다. 당시 독일사회와 기성세대에 대한 비판과 전환을 요구했던 젊은 세대의 비판의식 속 촉발된 이 운동은,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못하고 기득권에 위치해있던 나치의 잔재들에 대한 처벌과, 이념/계급이라는 거대한 담론 속 가리워져 있던 개인들의 일상적인 문제들, 이를테면 페미니즘, 환경, 반전주의 운동이 움을 트게 한 시발점이 되었다. 당시 독일사회는 이념과 정치적인 대립에 파묻혀 제대로 된 나치 청산을 이루지 못했고, 그 때문에 나치의 협력자들은 아무렇지 않게 사회 내에 섞여 살며 누군가의 좋은 이웃으로, 아버지로, 동료로 살아가고 있었다. 마치 마담 블랑의 무용단이 사회적인 명성을 가졌고, 지도자들이 존경받는 스승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피와 폭력으로 얼룩진 잔인한 마녀들이었다는 이중성처럼 말이다. 68운동의 주축이었던 젊은 세대들은, 아무리 친밀한 사이였다하더라도 이들에 대한 청산와 처벌을 원했다. 수지는 그러한 새로운 세대의 바람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무용단이라는 설정도 문화정책으로 사람들을 세뇌하려 했던 나치를 떠올리게 한다. 블랑이 만든 작품은 마치 나치 시대의 예술처럼, 아리아인의 인종적 우월성을 강조하며 신체적인 능력을 뽐내는 규율적인 군무들이다. 그러나 그것은 블랑이 수지에게 Volk 춤을 전수하면서 너의 안을 비워라, 받아들일 준비를 해라, 비우고 온전히 작품으로 채워야 한다 라고 했던 말처럼 결국은 목적을 위해 춤이라는 도구로 무용수들을 현혹하는 것이다. 수지의 움직임이 올가의 뼈와 장기를 파괴했던 것처럼, 나치라는 파시즘으로 조종되어 타자를 파괴하는 미학이고 예술이다. 하지만 나치의 문화정책이나 미국의 대중매체의 이면에 깔린 정치적인 의도를 극렬하게 비판했던 호르크와 아도르노처럼 인간은 마냥 주어진 것을 수용하는 존재가 아니다. 올가나 사라처럼 의심이 피어나기 마련이며 이는 결국 수지와 같은 그들에 대한 단죄의 요구로 이어진다. 점프동작에 관한 블랑과 수지의 의견차이는 그들이 속한 범주의 대립을 보여준다. Volk라는 말은 국민, 민족을 의미한다. 블랑은 이 춤이 재탄생의 욕구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했다. 파시즘의 범주에 속한 블랑에게 새로운 민족이란 이념이라는 거대한 담론 속에서 탄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수지가 대표하는 젊은 세대는 그러한 담론 논쟁에 파묻혀 수많은 개인이 희생당해 오던 것을 목격하고 이에 대한 부채의식을 느낀 세대다. 그렇기에 그녀는 위로 떠오르려고 하기 보단, 바닥에 붙어있는게 이 춤의 의도에 더 적합하다고 본다. 새로운 민족이란, 거시적인 문제에 여념하느라 현실의 일상적인 문제들을 지나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블랑이 만든 춤은 홀로코스트의 피해자인 클렘페러가 숨을 옥죄는 공포를 느끼게 만든다. 마녀들은 사라의 부러진 다리를 표면적으로 가린 채 그녀를 무대에 세운다. 파시즘이 가진 폭력성을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덮어버린다. 그런데 수지가 블랑의 안무를 벗어나 자유롭게 춤을 추면서 사라에게 가해졌던 폭력이 가시화된다. 수지는 가시화되지 못했던 내부의 곪아가는 상처들을 제기하는 새로운 바람이다. 수지의 동작이 강렬하고, 힘이 있는 것처럼, 이 움직임은 불가항력의 이끌림을 지닌다. 이에 대한 마녀들의 반응을 보면 누군가는 마르쿠스처럼 포섭하고 싶은 마음을 갖기도, 블랑처럼 동요하기도 하고, 이것이 불가항력임을 깨닫고 공포에 떨며 자결하기도 할 것이다. 마지막의 충격적인 단죄의 장면에서, 수지는 모든 잔재들을 단죄한 뒤 그들의 희생양으로 쓰였던 제물들에게 다가가 한명 한명씩 ‘무엇을 원하느냐’ 묻는다. 누군가는 이것이 허무주의를 의미한다고 하지만 나에겐 68혁명이라는 새로운 바람이 지향하는 바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일상적이고 부차적으로 치부되던 각 개인들의 다양하고 미시적인 문제들을 수면위로 끌어올리고자 하였던 68혁명의 지향점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