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정환

정환

4 years ago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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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도시 Z

영화 ・ 2016

평균 3.3

“무한히 움직이는 우리를 방황으로 받아들이고, 머무르기 위한 정착을 꿈꿀 거면서, 정작 끝내 움직이지 못할 죽음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삶을 살아가기로 태어난 사람. 꿈을 잃지 말고 미지를 탐험하며 미를 추구하기 위해 그렇게 태어났고 길러진 사람.”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대도 우린 지각할 수 있었어. 천국은 왜 있겠어.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 속 사람들은 항상 무언가를 찾기 위해 떠나는 사람들이었다. <애드 아스트라>에선 지적 생명체를 찾기 위해, 혹은 실종된 아버지를 찾기 위해, 실은 비어버린 나 자신을 찾기 위해 우주로 향하는 로이의 이야기를 담았다. <투 러버스>의 레너드는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가족과 나를 사랑해 주는 여인까지 버리고 떠날 준비를 하는 사람이다. <이민자>에서 브루노 역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본인의 직업과 명성을 놓는 사람이었다. 그들에게 명확한 동기가 없다는 건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왜 이렇게까지 하냐는 물음에는 그리 시원하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다만 우린 그들을 이해하지 못한대도 지각할 수는 있었다. 그들의 공허한 눈빛은 물론이거니와 사랑이던, 모험이던 그 어떤 것들로도 채워지지 않을 것만 같이 속은 비어버린 그들의 허망한 겉모습은 건조하면서도 이유 모를 습기 가득한 프레임 안에서 느낄 수 있었다. <잃어버린 도시 Z>에서도 마찬가지다. 정착하지 못한 채 떠나기만을 반복하는 포셋이 왜 머무르지 못하는지를 이해할 수는 없었다만, 내가 보고 있는 것으로부터 느낄 원초적인 감정들을 바탕으로 사유할 수는 있었다. 그 첫 번째 감정은 언제나 막막함이었다. 이미 떠나온 자는 다시 떠날 곳을 향한다. 분명 무언가를 향하여 떠나는 것인데, 얻고자 하는 욕망과 집념에 도저히 그 자리에서 만족을 못 했는지 이 세상을 다시 유영한다. 어쩌면 우리가 애초에 이렇게 태어난 건지도 모른다. 문제가 있던 자리에 해답이 없는 것이 이 세계의 규칙이고, 우리는 그 체계에 반항하듯 끊임없이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 전제다. 스스로 불을 붙인 세상의 불을 끄는 법은 그 자리가 아닌 다른 곳으로 찾아야 했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 모두에게 도달하고자 했던 목적지는 늘 저 너머에 있었다. 애당초 잡았던 목표 설정 자체가 너무도 높았던 점에서가 아니였다. 그동안 명확한 동기도 잘 모른 채 그저 이래야만 할 것 같아서 시작되는 이 삶의 방향성을 앞세워 움직였다면, 해석하지도 못한 스스로의 동기와 그 목표에 대한 보상은 아마도 채워지지 못할 욕망의 결말에 속박될 수 없는 운명이어서였다. 우리의 시선 저 너머는, 미지의 영역으로서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범위다. 동기를 이해하고 목적을 달성했다면, 개척자의 행위를 그만 둘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내가 느꼈던 이 막막함은, 모든 결핍들과 동기를 충족시킬만한 결과를 얻어냈음에도 여전히 머무르지 못하고 떠나는 것에서부터였다. 잃어버린 도시 Z를 포함해서, 우리가 가진 꿈과 도전의 영역은 어떠한 의미들로 종합된 세계가 아니었다. 가지못했고, 보지못했으나, 간절히 원하고 있는 그 세계는 모두 우리 시선 너머의 미지의 영역이며, 영원히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범위였음을 자각하지 못했다. 결국은 움직이는 우리를 방황으로 받아들이고, 머무르기 위한 정착만을 꿈꿀거면서, 정작 끝내 움직이지 못할 죽음 전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삶을 살아가기로 태어난 사람이었다. 우리가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종적으로 움직이지 않을 결말을 바라면서도 이를 죽음으로 간과해 두려워하는 버릇들을 은연중에 느낄 수 있었다. 이민자와 망명자 사이에는 떠나고 싶어서 와 떠날 수밖에 없었다는 미묘한 차이가 있겠지만, 결국은 정착하기 위하면서 움직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일 뿐이다. 지금 우리에게 간절한 것은 당장에 갖고 있는 우리의 꿈들과 도전들이었다. 앞으로 이것들은 우리에게 어떤 결말을 안겨줄 것인지를 궁금했으나, 끊임없이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이전에 스스로 포기를 하느냐(이민자), 어쩔 수 없이 떠나느냐(망명자)의 사이에서 갈팡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지. 죽음을 앞둔 누군가가 출산을 앞둔 누군가의 목소리를 떠올려보았다. 끊임없이 움직일 수밖에 없는 우리는 꿈을 잃지 말고 미지를 탐험하며 미를 추구하기 위해 태어났고 그렇게 길러졌던 탓에 있었다는 것을. 정착을 위한 우리의 움직임은 무를 지향하는 운동이며, 결국 죽음을 향한 여정이다. 죽음을 향한 여정에서 욕망에 대한 갈증을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던 것도 이러한 이유였겠다. 우리에게 평온은 오직 우리가 머물렀을 때뿐일 테니. 삶의 문턱에서 바라보는 또 다른 미지의 영역인 죽음으로 시선이 옮겨진다. 천국은 왜 있겠는가. 끊임없이 움직였던 우리에게 마침내 평안의 시간을 주는 것인가. 이때, 왜 우린 지금 이 삶에서가 아닌 뒤늦게 평안을 얻는지에 대한 질문을 품을 수 있다. 천국을 갈망하기만 할 뿐, 이 세상에서는 누릴 수 없는 특권인 것인가. 천국에서 태어나 천국에서 삶을 보내는 대신에 왜 굳이 껍데기뿐인 미지의 영역에서 살아가야 하나. 잊기 쉬운 말이지만 이 말을 기억해야만 한다. 천국은 왜 있겠는가. 미지의 영역 속에서 이해의 범위를 넘어서려는 노력, 여정. 그 끝에 도달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