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좋은 영화다. 하지만 이만큼의 상찬에 걸맞는 훌륭한 영화인가? . (스포일러) 선댄스 영화제서 공개된 이후로 오스카 레이스가 한창인 지금까지 북미 현지에서 만장일치에 가까운 극찬을 받고 있는 영화, 정이삭 감독의 신작 <미나리>를 지난 부산 국제 영화제서 미리 볼 기회가 있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기다렸던 이유는 단 하나다. 시놉시스만 대충 훑어봐도 기승전결의 구조가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보편적인 것 같아 보이는 이 드라마 서사가 과연 무엇을 성취하였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80년대, 미국, 한국 이민자. 그 안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갈등, 할머니와 손주와의 갈등. 영화를 어느 정도 봐온 이라면 이 키워드만 들어도 대충 각자의 머릿속에서 4, 5개 즈음의 시나리오가 절로 상기될 법 하다. . 우선, <미나리>는 다행히도 내 머릿속의 시뮬레이션 중 최악의 각본을 피해 간 영화다. 나는 영화를 보기 전 배우 윤여정이 연기한 할머니 순자 캐릭터가 영 거슬렸다. 나는 부디 영화가 할머니의 죽음을 통한 가족의 성장이란 진부한 귀결을 택하지 않았기를 바랬다. 굳이 다른 국적의 영화에서까지 눈물로 축축해진 가족 드라마를 보기 싫었던 탓이다. 허나 나의 이러한 섣부른 걱정과는 달리, 영화는 순자를 이용해 극중 인물과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안일함을 보이지 않으며 각본이 헐거워지는 부분을 그녀의 유머만으로 벌충하려는 나태한 태도를 보이지도 않는다. 물론 순자의 유머러스한 태도는 퍽퍽해질 무렵의 영화를 거듭하여 환기하는 익숙한 장치로 사용되며 아울러 후반부에 그녀가 뇌졸중을 앓는다는 설정은 이 영화가 자칫 뻔한 노선을 택할지도 모를 전조처럼 보이기도 한다. . 허나 순자는 비단 그러한 기계적인 방식으로 소비되고 마는 캐릭터가 아니다. 두 부부간의 다툼을 중재하는 것, 데이빗과 앤의 성장, 그 사이에서 겪는 판이한 문화 차이, 모니카의 희망과 불안, 깨졌던 가족의 믿음을 재확인시켜주는 것. 이 모든 중심에 순자가 있으며 영화는 캐릭터의 이러한 포지셔닝을 위해 '전형적인 할머니 상'이라는 해묵은 성질을 빌려오는데 그치지 않고 스스로 만들어낸 순자라는 캐릭터 고유의 성향을 효과적으로 이용한다. 해외 평단의 반응 중 순자 캐릭터에게 유독 호평이 자자했던 까닭은 비단 그들에게 아시아계 할머니 캐릭터 상이 독특하게 느껴졌기 때문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전형적인 할머니상과 윤여정 배우 특유의 비정형화적 상이 부딪혔을 때 느껴지는 묘한 이질감, 그리고 그 이질감이 빚어내는 강력한 존재감. 그 느낌 하나로 윤여정은 극을 자신의 것으로 사로잡는다. 배우의 훌륭한 역량과 캐릭터를 조형하는 각본의 사려 깊은 공력이 더해진 순자라는 캐릭터는 <미나리>의 최대 장점 중의 하나가 틀림없다. . 영화는 이외에도 촌스럽고 진부해질 구석이 다분한 기로에 봉착할 때마다 영민하게도 그 갈림길에서 보다 더 나은 행로를 택한다. 우리는 80년대 아시아계 이민자들의 삶을 다룰 때 으레 등장할 법한 갈등들 중 몇 가지를 이 영화에서 볼 수 없다. 그중 하나만 언급하자면 인종차별적 갈등의 요소가 있다. 원색적인 혐오 발언을 쏟아내며 그들을 좌절케할 인물들이 꼭 한 번쯤 등장할 법한데도, 영화는 이민자 vs 그들에게 적대적인 백인 시민들.이라는 이분법의 편의적 사용을 지양한다. 물론 영화는 그들이 타지에서 받는 은근한 차별의 긴장감을 아예 배제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 차별의 뉘앙스를 서사를 손쉽게 추동 시키는 방식으로 악용하지는 않는 것이다. . 모니카가 처음 교회에 갔을 때 그녀를 배척하지 않고 되레 친근하게 품어주려 하는 태도를 보이는 현지 교인들과, 당대 인종적 분위기를 유념치 않고 데이빗과 친우 관계를 맺는 그의 친구를 생각해 보자.(물론 그가 데이빗의 외관을 지적하는 대사가 있긴 하나 이는 인종차별의 함의를 담은 장면이라기보단 자신과 외적으로 크게 다른 사람을 마주했을 때 그 나이 또래 아이들이 으레 보일법한 당연한 반응을 영화가 여과 없이 처리한 방안이라 보인다.) <미나리>에는 억지 갈등을 조장하는 악역이 없으며 서사를 신파의 늪으로 빠트리는 애처로운 선역 역시 부재하다. 이로 인해 우리는 극중 인물들이 타자로서 '미국인'들에게 받는 수난과 고통을 상기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공간이 주는 막연한 불안함과 희망, 그리고 그 공간에 무작정 내던져진 그들의 위태로운 존재 자체에 집중할 수 있는 것이다. . 개인적으로 생각하건대 <미나리>를 상찬할만한 요소의 태반은 영화의 선택이 아닌 영화가 선택하지 않은 것에 기인한다. <미나리>는 진부하고 낡은 갖가지 설정들을 덜어낸 뒤, 누군가가 조장하는 공포가 아닌 미국이라는 공간 자체가 자아내는 불안을 인물들이 어떻게 저마다의 방식으로 견뎌내는지를 묵묵히 응시할 뿐이다. 감독이 밝힌 바에 의하면 극중 데이빗은 한국계 이민자 출신인 감독 본인의 유년기가 명확히 투영된 캐릭터라고 한다. 그럼에도 영화는 비단 데이빗의 시점만을 고수하지 않는다. 어머니 혹은 아버지 그 어느 쪽의 편으로도 기울지 않으며 감독 본인의 향수에 젖어 질척거리지도 않는 영화의 공평한 시선은 다수의 시점을 경유하여 당대 아메리칸드림에 덧씌워진 허울을 직시하며, 동시에 그 허울이 있었기에 당시의 이민자들이 그 모진 나날들을 어떻게든 견뎌낼 수 있었음을 말한다. . <미나리는> 걸출한 영화는 아닐지라도 분명 좋은 영화다. 열 중 여덟이 재밌게 볼법한 유려한 스토리텔링과 더불어 이를 받혀주는 안정적인 연출, 그리고 배우들의 군더더기 없는 훌륭한 연기.(특히 한예리와 스티븐 연이 극 후반부에 서로의 불안과 그에 따른 일시적 작별을 고하는 대목에서의 연기는 정말 굉장하다.) <미나리>의 웃음과 눈물은 모두를 기분 좋게 할만한 순도가 높은 무엇이다. . 이처럼 이 영화의 준수한 완성도를 충분히 인정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겐 이 영화가 완전히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우선, 나는 좋은 영화 정도가 아닌 그 이상의 영화를 기대했다. 이 영화를 둘러싼 세간의 평가가 그저 이 영화를 좋은 영화라 칭하는 정도에 머무르지 않고 그 이상을 말했기 때문이다. 다소 공정하지 못한 시각일지 모르나 사전의 쌓인 기대감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건 관객으로서 우리의 어쩔 수 없는 한계인 것이다. . 영화는 그 수많은 진부한 요소들을 덜어냈음에도 불구하고 그 빈자리를 신선한 요소를 더할 발판으로 사용하지 못한다. 새로운 환경에 도착해 어떻게든 목표한 바를 성취한 뒤 가장으로서 떳떳해지고자 하는 제이콥, 겉으론 그런 그를 지지하지만 속에 축적된 불안을 온전히 숨겨낼 수 없는 부인 모니카. 이런 부모를 지켜보며 타지에서 성장통을 겪는 데이빗과 앤. 영화는 이러한 구도에서 예상 가능한 범위를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 영화는 이를 당대 한인 이민자들이 가지고 있던 가치관의 보편성을 구축하기 위한 설정이었다 변명할 것이며 물론 이는 충분히 납득할만한 것이다. 허나 이 영화가 무언가 특출한 지점에 도달했기를 희망한 나의 관점에서 그 보편성은 또 다른 진부함과 진배없는 것이었다. 가족 앞에선 모든 것이라 잘 될 것이라 위로한 뒤 나 홀로 뒤편에서 찌든 한숨을 내뱉는 가부장적 아버지, 비교적 그 불안을 숨김없이 표현하지만 어떻게든 꾸역꾸역 감내하는 강인한 어머니. 이 둘의 필연적인 가치관 충돌. 미국에서 살아본 경험이 없더라도 한 명의 한국인으로서 정말 그 시대의 한국계 이민자 부모들은 딱 저랬을 것이라는 막연한 짐작이 간다. 헌데 그렇다고 영화가 인물들의 성향을 딱 그 정형화된 틀 태에서만 묘사하는데 머무르고, 이로 인한 갈등마저도 정말 이러한 유형의 갈등이 있었겠구나 싶은 지점까지만 묘사하는 건 분명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 아무리 억지 갈등의 요소들을 배제하는 미덕을 보였다 한들 그 남겨진 자리에 영화만의 입체적인 갈등의 대안을 찾지 못했다는 건 그저 영화가 저급한 재미 대신 깔끔한 밋밋함을 택한 상대적 우위를 점한 것 정도에 불과하게 되는 것이다. . 이러한 아쉬운 점들과 더불어 사실 감상 직후 좀처럼 이 영화를 온전히 긍정하기 힘들게 만들었던 건 바로 영화가 취한 결말부의 선택이다. . 요컨대 <미나리>는 믿음에 관한 영화다. 그들이 선천적으로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는 식의 종교적 의미가 아니라, 당대 미국이라는 공간이 가져다주는 이유 모를 불안함이 그들로 하여금 믿어야 할 것을 필요케 했다는 점에서 <미나리>는 다분히 믿음의 영화로 읽힌다. 아버지 제이콥은 보란 듯이 농장주로 성공하여 가장으로서 언젠가 우뚝 서게 될 것을 굳게 믿는다. 이 믿음은 미국에서의 실패의 불안에 대한 그의 대항이다. . 아내 모니카는 믿음이라는 관념을 보다 직접적으로 들어내는 방안인 교회를 택한다. 공장에서 그녀가 동료 한인에게 한인 커뮤니티를 묻는 대목과 집에 신자를 잠시 들이는 장면은 그녀와 제이콥의 가치관 차이를 은연중에 드러낸다. 제이콥은 한국에서의 실패와 달리 미국에서만 성취할 수 있는 일종의 이상향을 희망하며 모니카는 유사한 믿음을 지향하는 이들의 공동체에 편입되어 본인의 불안을 해소하고자 한다. 개인의 성취에 토대를 둔 안정적 가정에 대한 욕망, 커뮤니티라는 공동체에 대한 지향. 즉 꿈과 가족. 서로 다른 방편으로 불안을 해소하려는 그들의 상반되는 믿음을 거칠게 요약해본다면 아마도 이러하리라. . 두 인물의 갈등이 극에 달하는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모니카는 제이콥에게 이제는 그에 대한 자신의 믿음이 떨어졌다고 고백한다.(<미나리>의 시나리오는 영문으로 작성된 뒤 사후적으로 한국어로 번역되었고, 이제 너무 지쳤다고 말하는 모니카의 대사는 I've lost my faith in you라는 영문자막으로 표기됐다.) 제이콥이 그 상태에서 긴 고민 끝에 모니카의 작별을 끝내 받아들인 이유는 자신의 믿음을 포기하고 모니카의 믿음에 의지한 채 살아갈 자신이 없었고 더 이상 본인이 믿는 것의 자장 내에서 모니카를 살게 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좀처럼 화합의 지점을 쉽게 찾지 못할 것 같아 보이는 후반부의 이들에게 나름의 답안을 주는 것은 다름 아닌 순자다. . 순자가 실수로 그들의 농장을 태운 뒤 함께 마룻 바닥에 누워 자며 후에 깨어나 그녀가 심은 미나리를 바라보며 이야기하는 제이콥과 데이빗의 시점에서 영화가 끝날 때 나에게 이러한 영화의 결말은 너무나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어떤 환경에서든 잘 자라는 미나리의 성질과 가족의 운명을 겹쳐놓은 엔딩부의 메타포가 너무나 성글게 느껴졌음은 물론, 같은 바닥에 누워 잠을 자는 그들의 모습을 통해 어떻게든 이 모든 역경을 이겨내리라고 말하는 서사의 마침표가 너무나 무책임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 이것이 관람 직후의 나의 일차적인 감상이었다. 감상한 지 몇 달이 지나고 이 영화를 믿음이라는 테마 내에서 재고한 결과 지금은 이 엔딩에 대한 입장이 다소 호의적으로 바뀐 편이다. . 순자의 의도치 않은 실수는 두 가지를 불태운다. 제이콥의 믿음과 직결되는 그의 농작물, 그리고 모니카가 영화의 초반부부터 불안해했던 그녀의 집에 대한 안정성.(허리케인 주의보에 벌벌 떨었던 초반부를 생각해 보자.) 이 화재는 말하자면 서로의 믿음을 완전히 불태워버린 사건에 다름 아닌 것이다. 허나 이 천재지변에 가까운 화재에 대항하는 그들의 소화와, 그 합심의 행위가 끝난 뒤 같은 곳에 머리를 맞대고 누워 자는 그들의 모습엔 이전과 같은 불안이 도사려 있다고 보기 힘들다. 이때의 영화는 제이콥과 모니카 각자의 믿음을 일시적으로 소각한다. 그리고 새로운 층위의 믿음을 형성한다. 자신들이 불안해하던 재앙이 실제로 닥쳐왔을 시 서로 합심하여 이에 저항하고 어떻게든 버텨낼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믿음. 제이콥과 모니카는 그 순간 무언의 몇 차례 행동들로 서로의 믿음이 일치되는 순간을 경험했던 것이 아닐까? . 영화는 인물들의 갈등과 상처가 완전히 아물기 전의 상태에서 미나리에 대한 희망찬 대사를 내던지는 제이콥의 모습을 보여준 뒤 별다른 첨언 없이 곧장 막을 내린다. 이는 곧 영화가 본인의 믿음을 드러내는 방식의 일환이다. 영화가 완전한 해결책을 제시하진 못했지만 이들은 어떻게든 잘 살아갈 것이라는 것. 이는 곧 그 험난한 여정을 무사히 헤쳐왔던 과거의 이들에 대한 헌사이자 그들의 역사를 제시하며 영화 밖 현재의 위태로운 이들에게 그 믿음을 설파하려는 제스처로도 보이는 것이다. . 이만하면 최선의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여전히 이것이 무책임한 만사형통의 태도를 논하는 설익은 봉합이 아닐지 의심된다. 결국엔 이 영화의 마지막 결단에 동의하게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영화가 이보다 더 나은 해결책을 강구할 수 있었으리라고 믿는다. <미나리>는 나쁜 영화가 되지 않는 법엔 빠삭했으나 훌륭한 영화가 될 방도엔 상대적으로 명민하지 못했던 영화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가 좋은 영화라는 것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이 영화에 대한 나의 판단은 아직도 이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중이다. . (감상한지 4개월 즈음이 지난 시점에서 쓰기에 디테일에 착오가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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