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윤석

눈먼 암살자
평균 4.1
평소에 칭찬을 한 번 하면 후하게 하는 편이다. 소설 <눈먼 암살자>도 그렇다. 인물, 문장, 짜임새, 주제, 시의성 모두에서 완벽에 가장 가까이 도달한 작품. 버리지 않을 책. 내가 읽은 최고의 비극. Masterpiece라는 말이 아깝지 않다. _ 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도 힘든데 네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면서도 흐트러짐이 없다. 아무나 부릴 수 없는 기교다. 틀을 뒤집고, 또 멋지게 해냈다. 주요 등장인물의 퇴장을 미리 알리고 시작한 뒤 그 원인을 추적하는 스토리라인은 신선하다. 각종 상징과 단서들을 배치하고 회수하는 능력은 무서울 정도다. 처음에는 단순한 상징과 사건으로 지나간 것들이 결말에서 어떤 의미였는지 알게 되면서 소름이 돋았다. _ 문장은 예리하다. 당시 예순한 살 마거릿이 여든두 살 아이리스의 입을 통해 세상과 삶을 꿰뚫는 통찰을 전한다.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다. 쉬운 언어 안에 담긴 뜻은 많은 생각을 부른다. 계속 인용하고 싶은 문장들이다. "죽은 자를 이해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은 없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을 모른 체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일은 없다." _ 주제는 뚜렷하고 거대하며 아직 살아 있다. 먼저 눈먼 칼날에 희생되었던 이들을 기억하는 '기억 소설'이다. 아이리스는 유일한 생존자다. “진실을 줄 수 있는 마지막 사람”이다. 아이리스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는 데 실패했다. 그를 기억하고 고백하기 위해 글을 쓴다. 살아남아 진실을 말하는 것은 분명 위대한 과업이지만 은연중에 자신을 유리하게 포장할 수 있는 양날의 검이다. _ 그 점을 알았는지 아이리스 스스로 온전한 진실을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자신이 오류를 저질렀음을 인정한다. 그래서 나는 그의 서술에 별다른 의심을 품지 않는다. 실패를 기억하고 오류를 고백하는 일은 많은 용기를 요구하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다음 세대에 진실을 물려주고자 하는 목표에 존경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_ <눈먼 암살자>는 동시에 폭력과 권력 구조를 중요하게 다루었다. 앳우드는 많은 폭력 양상을 드러내고 독자에게 생각할 기회를 제공한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눈먼 욕망과 거래 대상이 되어 평생 자기 뜻대로 살지 못하고 희생당했던 아이리스와 로라의 이야기를 통해 페미니즘 담론을 제기한다. 1차 대전과 대공황, 스페인 내전, 2차 대전으로 이어지는 숨 가쁘고 잔인한 역사가 개인들에게 어떤 폭력을 가했는지를 처절하게 묘사한다. 계급 사회 아래 더러운 희생과 폭력이 행해지는 자이크론의 모습, 특히 귀족들이 아내와 자식을 팔아 빚을 청산하는 세태, 어린 나이에 카펫 공업에 동원되어 눈이 먼 아이들과 살해당하지 않기 위해 저항하는 소녀들의 혀를 잘라버리는 모습에서 강력한 문제의식이 드러난다. _ 처음 읽을 때는 로라가 무너지는 모습에만 집중했다. 끝내 붙잡혀 날아오르지 못하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배신당해 추락한 이카로스의 모습이 보였다. 그를 붙잡고 날개를 꺾어버린 리처드와 위니프리드에게 증오를 느꼈고 빼앗기기만 하고 힘없는 아이리스의 모습에 실망했다. 그러나 아이리스도 희생자였음을 잊었다. 아이리스도 분명 무언가 할 수 있는 존재였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이유는 역시 그도 붙잡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걸 깨닫자 그동안 나오지 않았던 강한 상실과 연민이 몰아쳐 나를 슬프게 했다. _ 또 소설 속의 소설, 눈먼 암살자와 자이크론 이야기는 의외로 재미있었다. 사랑 이야기는 언제나 끌어당기는 힘이 있으니까. 배경은 너무 화나고 슬프지만. 눈먼 암살자와 말할 수 없는 소녀가 만날 때 느끼는 찌릿함과 자신들을 붙잡는 손아귀를 피해 달아나는 여정은 독자를 두근거리게 한다. 행복한 결말을 바라는 여자와 슬픈 결말을 만들고자 하는 남자의 다툼, 그 대안으로 나온 도마뱀 인간 이야기와 아어아 행성 이야기에서는 장르문학 냄새와 앳우드가 듬뿍 집어넣은 은유에 취해 상상을 멈출 수 없다. _ 노래 하나를 생각한다. Dido's Lament. 디도의 비가. 영국 음악가 헨리 퍼셀이 작곡한 디도와 아이네이아스라는 오페라에 실린 아리아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다. 카르타고 왕 디도는 트로이 출신 영웅 아이네이아스를 사랑했다. 그러나 아이네이아스가 그를 버리고 이탈리아로 떠나자 슬퍼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디도가 숨이 끊어지기 전, 탄식하며 부르는 비가다. 퍼셀 이전,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도 이 이야기를 토대로 시를 하나 지었다. 아이네이스. 바로 아이리스와 로라가 라틴어 시간에 배웠던 시. 그리고 아이리스가 로라의 공책에서 발견한 흔적. _ 디도는 절망하며 흐느낀다. Remember Me. But Forget My Fate. 나를 기억해 다오. 나를 기억해 주오. 그러나 내 운명은 잊어주오. 절제되면서도, 저 밑 닿을 수 없는 곳까지 무너지는 디도의 슬픔. 디도와 로라가 겹쳐 보였다. 내 느낌은 아이리스가 한 말과 같다. “지금 내가 빠져들고 있는 이 깊은 슬픔을 어떻게 형용할 수 있겠는가? 도저히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시도하지 않겠다.” 나는 조용히, 곧고 떨리는 목소리가 주는 아이러니한 아름다움에 겨워 슬퍼한다. 탄식이 귀를 휩싸고 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