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홍준영

홍준영

6 years ago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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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책 ・ 2018

평균 4.1

두 심연 사이에서. . 천안에서 아홉 살 짜리 아이가 여행가방에 갇힌 채 죽었어. 게임기가 고장난 걸 본 계모가 큰 가방에 가뒀다가, 아이가 소변을 보자 더 작은 가방에 7시간 동안 가뒀대. 숨이 안 쉬어진다고 아이가 꺽꺽대자 계모는 그 위에 올라타 조용히 하라고 짓눌렀다는군. 경찰이 차갑게 식은 아이의 몸을 꺼냈을 때 두피는 온통 찢어져 있었고 팔에는 담뱃자국이 가득했어. 그러는 동안 창녕에서는 친어머니가 아홉 살 딸의 손가락을 프라이팬으로 지지고 있었어. 그녀는 집안일을 시킬 때가 아니면 자식을 벽에 쇠사슬로 묶어놓았고, 실수가 있을 때면 달군 젓가락이나 글루건으로 발바닥을 쑤셨대. 알료샤, 나는 지금 논의를 간략히 하기 위해 죄없는 이들의 고통 중 극히 일부, 아이들의 고통만을 이야기하고 있는 거야. 선임들에게 구타당하며 화장실 바닥을 핥다 자살한 병사, 강제로 음란한 영상을 찍다가 결국 유린당하고 만 여자, 보험금을 노린 아들에게 살해된 늙은 어머니에 대해서는 아직 입도 못 열었어. 알료샤, 나도 창녕의 어머니와 딸이 화해하고 부둥켜 우는 걸 보고 싶다. 네가 믿는 신이 천안의 아이를 부활시켰을 때, 계모는 용서를 빌고 의붓아들은 그녀를 쓰다듬는 광경을 보고 싶어. 그렇지만 여행가방 속에서 육백삼십 분 동안 아이가 흘린 눈물은 어떻게 되는 거냐! 그 고통은 대체 어떻게 되는 거야? 쇠사슬에 묶인 꼬마가 '하나님, 살려주세요'라고 외친 순간은 어떻게 보상할 거냐고... .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결국 (오늘날 한국에서) 이반이 던지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작성된 두 복음서의 이야기이다. 자신의 작품에서 대칭을 이루는 '분신'을 자주 활용했던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마지막 역작에서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었던 복음서의 분신을 빚어내는 데 기어코 성공한다. 절대자의 존재에 기반해 사랑과 용서의 율법을 노래하는 복음서에 대항하여 무신론에 기반해 인간의 무한한 자유와 주권을 노래하는 '안티복음서'가 탄생한 것이다. 조시마 장로와 알료샤가 복음서의 대변자라면, 형제들의 아버지 표도르 파블로비치와 그의 사생아 스메르쟈코프는 안티복음서의 대변자라 부를 법하다. 드미트리, 이반, 카체리나, 그루셴카, 리자, 콜랴 등 나머지 인물들은 두 복음서(검사의 표현을 빌리면 '두 심연') 사이에서 방황하고 번뇌한다. 그러나 중간에서 방황하는 각 인물들의 이야기가 범죄소설이든, 연애소설이든, 청춘소설이든, 그들의 마음에서 진정 공명하며 선택의 기준이 되는 질문은 결국 한 개로 수렴한다. 정직한 하인 그리고리가 즐겨 읽는 성경 '욥기' 의 핵심을 꿰뚫는 질문, 처음으로 동생에게 마음을 연 이반 카라마조프가 들려주는 서사시 '대심문관'의 기초를 이루는 질문이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은 왜 일어나는가? 죄없는 이들에게는 왜 고통이 발생하는가? 다시 말해, 대체 아이들은 왜 고통받는가? . 안티복음서의 해답은 간단하다. 선의 기준인 신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결론에서 표도르 파블로비치는 한없는 자유의 빛을 발견한다. "왜냐하면 나는 끝까지 이 추잡함 속에 허덕이며 살고 싶거든, (중략) 다만 다들 몰래 그 짓을 하지만 나는 탁 터놓고 한다는 말이지. 내 이렇게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건만 이런 나를 온갖 추잡한 놈들이 못 잡아먹어 안달이라니까." 그는 양심, 도덕, 규범 등이 모두 공허한 허상에 불과함을 간파한다. "일단 인류가 하나같이 다 신을 거부한다면 (중략) 무엇보다도 이전의 모든 도덕률이 저절로 붕괴될 것이며 완전히 새로운 것이 도래할 것이다. 사람들은 삶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삶으로부터 취하기 위해 한데 뭉치겠지만, 이는 기필코 오로지 이 세계에서의 행복과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일 따름이다." 그는 이반의 선언처럼 돌아오지 않는 오늘의 순간을 만끽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여자들을 유혹하고 재물과 쾌락을 탐닉한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의지와 욕망을 온전히 실현하려는 표도르의 이러한 사투는 신성하고 진정 거룩한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나'뿐이고, 나의 삶을 방해하려는 모든 외부의 잣대, 종교적 교리, 신이라는 개념은 무익할 뿐 아니라 사악한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세계에서 중요한 축으로 기능하는 '모든 것은 허용된다'라는 하나의 테제는 이렇게 표도르에 의해 밝혀진다. . 그러나 복음서의 주인공은 테제를 밝히는 선지자가 아니라 그리스도다. 안티복음서의 적그리스도는 스메르쟈코프라고 할 만하다. 남자를 가까이 한 적이 없었던 백치(또는 성녀)가 마구간이 아닌 목욕탕에서 홀로 낳은 이 아이는 어렸을 때부터 성경을 논한다. "주 하느님이 빛을 창조한 건 첫째 날이고 태양과 달과 별은 넷째 날에 창조했다면서요. 그럼, 첫째 날엔 어디서 빛이 비쳤던 거죠?" 성전에서 강론한 예수를 마주한 학자들처럼 그리고리는 이 반역적 질문 앞에서 말문을 잃는다. 성부는 아들을 희생해 구원이 도래했다는 기쁜 소식(복음)을 선포하나, 두 무신론자만이 집에 남은 어느 밤 스메르쟈코프는 아버지의 두개골을 부수면서 모든 것이, 심지어 친부 살해까지도 가능하다는 기쁜 소식을 만천하에 알린다. 무신론적 태도를 견지하는 것처럼 보이던 이반은 이 충격적 과업 앞에 무너지고 만다. "그때만 해도 도련님은 줄곧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말씀하시더니, 이제 와선 왜 그렇게 불안에 떨고 계신 거죠?" 베드로처럼 세 번 찾아와 자신을 살인자라고 정죄하며 의심하는 이반에게 스메르쟈코프는 도리어 연민을 보낸다. 살인이 뭐가 어때서. 고작 '살인자'라는 칭호 앞에 두려워하다니. 안티복음서의 신앙으로 무장한 스메르쟈코프는 자신의 사역을 장엄한 자살로 마무리한다. 예수는 목숨과 영혼을 신에게 맡겼으나, 인간은 목숨과 영혼마저 스스로에게 맡겨야 한다는 선언인 셈이다. . 반면 조시마 장로가 표도르와 스메르쟈코프에게 대항하기 위해 꺼내드는 테제는 '만인은 만인에게 죄인이다'이다. 이 테제가 도출되는 과정 역시 직관적이다. 신이 존재한다면, 유한한 나의 1인칭 시점은 곧바로 무의미해진다. 영원 앞의 시간, 불멸 앞의 필멸, 보편 앞의 주관은 0과 다름없는 만큼 신을 받아들인 인간은 티끌만도 못한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존재에게는 신이 제공한 하루, 신이 제공한 타인, 신이 제공한 버찌 잼과 밀짚모자 위의 리본에 무한히 감사하며 신의 명령을 실천해 세계를 사랑하는 선택지밖에 남지 않는다. 그러나 진정 절대성을 인정하는 인간이라면 그러한 사랑은 자발적일 수밖에 없다. 신의 시점으로 삶을 응시하는 사람은 타인, 곧 신과 그의 세계를 향한 사랑에서 본질적 행복을 체험하기 때문이다. "사람이란 행복을 위해 창조되었기에 전적으로 행복한 자는 자기 자신에게 곧장 ‘나는 이 땅에서 하느님의 서약을 이행했노라.’라고 말할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조시마는 매일 자신이 감사하고 사랑할 시간이 남아있다는 사실에 행복해한다. 그는 자신이 진공 속에서 명멸하는 먼지가 아니라 삶의 의미로 충만한 먼지라는 사실에 감격한다. " ‘즐거워하자꾸나.’ 여윈 노인이 계속했다. ‘새 포도주를, 새롭고 위대한 기쁨의 포도주를 마시자꾸나.’ " 그에게 삶은 신의 무한한 은총 속에서 출렁이는 포도주와 같다. . 알료샤는 조시마 장로의 신앙을 체화한 뒤 그의 유언대로 속세로 나아가 카라마조프 가와 민중들에게 이 복음의 씨앗을 뿌린다. 그는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과 인류를 향한 동포애를 가슴에 품은 채 러시아의 대지와 만나, 소설 속 인물들에게 안티복음을 떨치고 진리와 불멸에 참여할 것을 제안한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두 복음서가 충돌하는 지점마다 알료샤는 조시마의 복음에 무게를 더하면서 소설의 균형을 가다듬는다. 그러한 그가 가장 열성을 기울여 '신의 심연'으로 이끄려 하는 인물은 작품의 주인공 드미트리다. 그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이반의 논리에 설득당하다가도, '만인은 만인에게 죄인이다'라는 조시마의 호소에도 흔들린다. 두 심연 사이를 헤매던 그는 카체리나를 배반하겠다는 생각의 죄, 아버지를 죽이겠다는 혀의 죄, 2등 대위를 구타하는 손의 죄를 저지르며 거듭 실족하고 넘어진다. 두 복음서는 그의 내면에서 가장 치열하게 대결하고, 작가는 우선 법정의 입을 빌어 그의 삶과 죄 모두에 유죄를 선고한 뒤 드미트리를 스메르쟈코프가 자살하기 전 머물렀던 병실로 데려간다. 그러나 그에게는 회의주의자 이반이 아니라, 그를 사랑했던 두 여인이 찾아와 구원의 햇살을 비춘다. 드미트리가 유형을 받아들이고 속죄에 나설지, 유형에서 탈출하지만 법이 심판하지 못하는 자신의 죄를 참회할지, 죄와 벌 모두를 부정할지 말해주지 않은 채 소설은 그렇게 끝이 난다. . 그렇다면 '왜 죄없는 자들이 고통받는가?'에 대한 복음서의 대답은 무엇인가? 첫째 해답은 티끌만도 못한 인간 그 누구에게도 죄있음과 죄없음을 감히 판단할 능력도 권한도 없다는 해답이다. 그러나 이 답변이 너무 가혹하다고 느꼈는지 도스토예프스키는 에필로그에 조그맣고 따스한 보충의견을 첨부한다. 신은 있습니다. 어떻게 신이 있는 세상에서 계모가 의붓아들을 죽일 수 있냐고 물으신다면,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 답변이 저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만 더 이상 가엾게 죽어가는 이들이 없도록 온 힘을 다해 인내하고 화평하며 사랑하는 것입니다. 죽은 일류샤를 그리워하는 친구들을 다독여 다시 삶으로 안내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신이 계시고 우리는 그의 세계 속에서 살고 사랑해야 하는 의무와 특권을 부여받았기 때문입니다... 스메르쟈코프는 쾌감을 위해, 자신의 정의를 위해, 아니면 아무 이유 없이 아이를 여행가방에 가둔다. 표도르는 한발치 물러나 킬킬대며 "좋은 일입니다. 모든 게 좋은 일입니다."라고 읊조린다. 이반은 쓰러진 아이 앞에서 하늘을 우러르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신에게 소리친다. 그러나 알료샤는 아이의 무덤 앞에서 그를 사랑했던 이들을 위로한다. 삶은 좋은 것이라고, 죽음 이후에 우리는 부활한 그를 다시 만나볼 것이라고. 그러는 동안 신은 침묵하거나, 없다. . "알료샤, 신은 있느냐?" 서사를 지배하는 표도르의 이 냉소적인 질문에 모두가 답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동안 작가는 다채로운 인물 군상들을 내려다보던 독자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더 던진다. 독자가 신을 믿는다면, 왜 지금, 여기에서 조시마 장로와 알료샤처럼 살고 있지 않는 것인가? 진정 불멸을 믿는다면 왜 독자는 지상에서의 작은 일에 넘어지고 실족하며 죄를 짓는 것인가? 신과 불멸에 대한 그의 믿음이 온전한데도 왜 그는 "'모든 것' 대신 달랑 2루블만 내고, ‘나를 따르라’ 대신에 그냥 미사만 보러" 다니는가? 반면 독자가 신을 믿지 않는다면, 왜 지금, 여기에서 스메르쟈코프와 표도르처럼 살지 않는 것인가? 왜 더 풍요롭고 행복한 순간들을 위해 남의 불행을 감수하지 않는가? 왜 양심이나 도덕이라는 우상에 매여 스메르쟈코프와 표도르의 자유로운 삶을 악하다고 비난하는가? 그는 왜 이반처럼 '살인자'나 '아동학대자'라는 타이틀 앞에서 무력해지고 괴로워하는가? 작중 모든 인물들이 '신은 있느냐?' '왜 아이들은 고통받는가?'라는 명시적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머리를 싸매는 동안, 숨겨진 이 세 번째 수수께끼는 오롯이 독자들의 몫으로 남는다. 두 복음서 중 어떤 진리를 고르던, 작가는 스스로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믿음에 어떤 함의가 있는지 머리가 쪼개져라 치열하게 고민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그 두 심연 사이에서 어느 방향으로 믿음의 도약을 내딛을지 선택하라고 외치는 작품이다. . +서사시 '대심문관', 가나의 포도주 잔치 환상, 이반과 악마의 조우, 최후의 법정 공방 등 그 자체로 한 편의 작품이 될 법한 명장면들로 가득하다. 적어도 한 장면은 한 호흡에 읽어야 온전히 그 감동이 전달되는 듯하다. +세 권으로 나눠진 민음사 판본으로 읽었다. 번역도 좋고 오탈자도 없다. 첫 페이지에 인물들의 풀네임과 별명들이 정리되어 있는데, 참고하면서 1권을 다 읽고 나면 2권부터는 이름 때문에 고생할 일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