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현승
4.0

이니셰린의 밴시
영화 ・ 2022
평균 3.9
인생은 짧고 예술은 영원하다는 나에게, 약간 모자라지만 착한 친구가. 언제부턴가 착하다는 말이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고 있다. 소개팅에 나간 친구가 상대방이 “참 착하다.”고 말한다면 그건 매력이 떨어진다는 말과 같다. 착하다는 말은 요즘 시대에 도무지 칭찬거리를 찾지 못했을 때를 위한 마지막 보루처럼 느껴진다. 영화의 주인공 파우릭(콜린 파렐)은 이 ‘약간 모자라지만 착한 친구’의 전형이다. 한없이 부드러운 그에게 그의 절친 콜름(브렌던 글리슨)이 돌연 절교를 선언하며 영화가 막을 올린다. 콜름이 파우릭과 절연하고자 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남은 인생을 예술에 전념해 자신이 죽고 난 뒤에도 영원히 기억될 걸작을 남기고 싶기 때문이다. 의미 없는 잡담은 고고한 창작 활동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강력한 의사 표명으로 콜름은 자신의 손가락을 내건다. 손가락을 자르는 행위는 악기를 연주하는 그에게 분명 방해가 될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시시콜콜한 이야기만 떠들어대는 친구가 간섭한다면, 죽기 전까지 불후의 명작을 만들지 못하는 것은 매한가지다. 절친했던 친구가 단호하게 절교를 선언하고 자신을 방해꾼 취급하자 파우릭은 혼란에 빠진다. 그에게 콜름과의 일상적인 대화는 무의미한 수다가 아닌 즐겁고 평범한 대화였기 때문이다. 콜름이 예술에 광기 어린 집착을 보이는 것은 그가 죽음을 목도했기 때문이다. 최후를 마주한 이에게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일상은 권태로 다가온다. 시간을 초월해 생명력을 유지하는 예술은 죽음을 극복하는 그만의 방식이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이니셰린 섬 전체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웠다는 사실이다. 러닝타임 내내 본토로부터 내전의 대포 소리가 울려 퍼진다. 죽음이 간접적으로만 암시되는 것은 아니다. 죽음의 순간이 직접적으로 노출될 때마다 죽음의 전령으로 보이는 한 노인이 방문을 예고한다. <이니셰린의 밴시> 속 인물들은 저마다 죽음에 제각각 다른 반응을 보인다. 누군가에게 죽음은 삶을 되돌아볼 기회이자 계기가 되고, 누군가는 죽음보다 죽음 직전까지의 삶을 훨씬 중요시한다. 심지어 어떤 이는 타인의 죽음을 오락거리로 여기면서 즐기기도 한다. 이처럼 각각의 캐릭터가 죽음에 대해 명확한 관점의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그들 사이의 갈등은 ‘죽음’이라는 키워드를 떼어놓고 설명할 수 없다. 죽음을 예고하는 아일랜드 신화의 ‘밴시’가 영화의 제목에 붙은 이유도 일맥상통할 것이다. <이니셰린의 밴시>는 선과 악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어 인물들 사이의 균형을 유지한다. 파우릭은 콜름의 절교를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파우릭의 입장일 뿐이다. 인생의 마지막 계획에 전념하겠다는 콜름을 악으로 규정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분쟁의 당사자들만으로 결론을 내릴 수 없다면, 그 주변 인물들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캐릭터는 파우릭의 여동생 시오반(케리 콘던)이다. 늘 모자란 오빠에게 친절한 위로를 건네는 그녀는 지식인의 면모를 보인다. 독서가 취미인 그녀는 모차르트를 운운하는 콜름의 말에서 오류를 지적한다. 식자(識者)와 무식자의 간극은 콜름이 파오릭을 혐오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친구를 유용함으로 판단할 수 있다면, 콜름에게 무식한 파오릭은 말 그대로 아무런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파오릭은 콜름이 권태를 느낀 일상의 일부분인 셈이다. 콜름의 권태는 이니셰린이라는 영화의 공간적 배경에서 두드러진다. 내전이 진행 중인 아일랜드 본토와 달리 변두리에 위치한 외딴 섬은 무료한 일상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새로운 소식’에 집착하는 주민들의 모습에서 그들의 삶에 짙게 밴 지루함을 엿볼 수 있다. 콜름은 시오반에게 “막연히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두렵지 않냐”고 묻는다. 시오반은 부정하지만, 아일랜드의 작은 섬 자체가 지루하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녀가 고향을 떠나 아일랜드 본토로 생활 터전을 옮기는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그렇다면 새로운 곳에 정착한 그녀에게 스펙터클이 넘치는 새로운 삶이 펼쳐질까? 아쉽게도 영화는 정반대의 결론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권태의 궁극적 원인은 한적한 섬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제1 원인은 죽음이다. 삶에 즐거움을 건네던 모든 가치가 무너져 내리는 죽음 앞에서 인간은 허망함을 느낀다. 궁극적 붕괴가 예정되어 있다면, 우리가 삶을 향유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거처를 옮긴 시오반은 파우릭에게 이사를 권유한다. 하지만 러닝 타임 내내 반복되는 대포 소리가 보여주듯 아일랜드 본토 또한 죽음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다. 죽음과 분쟁이 싫어 고향을 떠난 그녀는 다른 형태의 죽음의 장에 도달했을 뿐이다. <이니셰린의 밴시>가 파우릭의 삶의 자세를 정답으로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 그의 선함은 인간이 죽음을 극복할 유일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영원하다고 말하는 콜름과 정반대로 파우릭은 다정함을 불멸의 가치로 내세운다. 콜름은 “50년 후에 아무도 당신의 친절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고 반박한다. 그러나 파우릭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난 파우릭 시오반, 착하지요.” 끊임없이 유용함을 요구하는 세상에서 착함의 선언은 인상적인 가치의 전환을 일으킨다. 이 영화와 마찬가지로 아카데미에서 돌풍을 일으킨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 이와 유사한 주장을 확인할 수 있다. “Be nice.” 세상을 밝게 보는 것은 순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공허한 우주에서 살아남기 위한 인간의 투쟁 전략이다. 파우릭의 선함이 콜름의 예술혼에 의해 외면받는다. 거듭되는 외면에 파우릭의 좌절은 분노로 전환된다. 이때 콜름이 던진 손가락(불친절)에 의해 파우릭의 당나귀가 죽는 사고가 발생한다. 당나귀와 보더콜리는 스크린에 꾸준히 모습을 비추며 각각 멍청한 파우릭과 똑똑한 콜름을 상징해왔다. 그렇다면 당나귀의 죽음은 곧 파우릭의 죽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더 정확히는 그의 본질처럼 여겨지던 선한 자아의 죽음이다. “이게 새로운 나인가 보지!” 선함을 내팽개치고 다시 태어난 파우릭은 화재를 일으키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타고난 본성은 어쩔 수 없는 것일까, 그는 콜름에게 미리 화재를 예고하고 강아지를 대피시키라 말한다. 불을 놓고도 끝내 친구의 안전을 살핀 그였다. 영화는 친구 사이였던 두 사람이 소강상태의 내전을 바라보며 막을 내린다. 그들의 말처럼 잠잠해진 인간의 권태는 “언제든 다시 시작될 수 있다.” 콜름은 영원한 예술로 도피함으로써 인간의 유한함을 극복하고자 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영원하다는 격언은 인생과 예술을 대립 선상에 놓는다. 하지만 예술은 결코 인간의 삶에서 유리되어 시간을 넘나드는 신적인 존재가 아니다. 극단적인 허무주의에 잠식되었을 때 콜름은 ‘이니셰린의 밴시’라는 곡을 완성했다. 끔찍히 불안정한 선율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의 모습을 형상화한다. 파우릭과의 다툼이 소강 상태에 이른 바닷가에서 콜름은 악상이 떠오른 듯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예술은 인간이 새겨낸 처절하고 아름다운 삶의 기록이다. 세상일에 초연하여 홀로 서는 예술은 없다. / 롯데시네마 아카데미전 큐레이션 진행. 23.03.11 새로운 영화적 경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