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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를 기울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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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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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궁전

영화 ・ 1990

평균 3.4

사랑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랑의 반대 상황은 확실하다. 사랑 ‘한다’의 반대말은 사랑 ‘했다’이다. 사랑은 시점이 개념을 좌우한다. 사랑할 때와 헤어질 때 혹은 ‘식었을 때’ 태도의 차이가 인간의 인격의 기준이라고 믿는다. 남겨진 사람은 시간에 따른 상대의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 사랑은 별 게 아니다. 사회 구조의 일부이면서 체제 안에서 만들어진 인지 활동이자 인류 역사의 한 부분일 뿐이다. <낭만적 사랑과 사회>(재클린 살스비),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울리히 벡)을 읽으면 사랑을 역사적 산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아, 내 사랑도 특별하지 않군. 사랑은 자본주의 사회의 거대 종교이자 산업이다. 물론 당장 사랑 때문에 고통받는 당사자들에게 이보다 얄밉고 의미 없는 말도 없겠지만 말이다.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인간관계다. 사랑은 그중에서 가장 치열한 관계다. 사랑은 모호한 개념이고, 계산할 수 없는 노동이며, 돌변하는 퍼포먼스다. 지금 <하얀 궁전>을 본다면, 거의 판타지다. 계급이 다르면 사는 동네도 다른 세상인데, 사랑은 무슨... 흔한 소재일 수도 있다. 남자는 스물일곱, 원래 부자에다 변호사다. 여자는 마흔셋이며 ‘하얀궁전’이라는 햄버거 가게의 점원이다. 지금 내가 동일시하는 대상은 확실하지만(여성), 이 영화를 남자 주인공과 같은 나이 때 보았다. 당시에도 나는 ‘여성’에 가까웠지만, 20대에는 누구나 그렇듯 내가 ‘마흔 세 살’이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그때는 계급 차이가 두드러져 보였다. 영화 속 두 사람 사이에는 되돌릴 수 없는 계급격차 그리고 지식, 교양, 다른 방식의 삶이 있다. 물론 남자의 나이가 많다면 ‘사랑의 장벽’ 같은 것은 없다. 여성이 어리다면 계급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젠더는 이렇게 강력하다. (즉, 부유한 40대 남자와 가난하지만 젊고 예쁜 20대 여자의 결합은 ‘자연스럽다’) ‘배우’ 수전 서랜든은 여기서도 멋지고 당당해서, 남자의 지인들 모임에 가서도 “노동 계급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거든요!” 라고 발언하면서 ‘그들’에게 먼저 선을 긋는다. 둘은 잠시 헤어진다. 여자는 ‘그럼 그렇지. 잠깐 지나간 놈’이라는 투다. 물론 속마음은 모르지만…… 이럴 때 여자에게 ‘그가 어느 날 불쑥 찾아올 것’이라는 희망은 고문이다. 대중가요는 기다리는 여자를 노래하지만 여자는 절대로 기다려서는 안된다. 여전히 방황 중인 남자가 다시 찾아왔을 때, 여자는 묻는다. “네 인생에 내가 필요한 거냐, 아니면 단지 그냥 좋은 거냐, 나를 원하는 거냐?” 남자는 당황스러워한다. 잘 모르겠단다. 모든 인간 관계에서 ‘필요(need)’, ‘원함(want)’, ‘좋아함(like)’은 심각한 주제이다. 더구나 이 말들의 영어 표현과 한글은 어감이 달라서 명확한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다. 예를들어 ‘원한다’라는 이 욕망의 스펙트럼은 대단히 넓다. 원함의 다른 측면인 소유라는 관점에서 보면 상대의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원하는지를 알기 어렵다. ‘원한다’는 ‘사랑한다’보다 숨 막히고 섹시하다. ‘필요’도 그렇다. 필요야말로 가장 절실한 사랑인지도 모른다. 마치 식욕과 수면욕처럼. ‘나’라는 생물체의 생존 조건이 ‘너’에게 달렸다는 말이다. ‘사랑한다’가 가장 위대한 말처럼 보이지만 연인 관계에서 필요, 원함, 좋아함, 사랑은 모두 다르다. 대개는 혼재된 상태에서 사랑의 사회적 각본(매뉴얼)대로 사랑한다. 규범 밖의 사랑은 지지를 받지 못하므로 ‘조금’ 다를 뿐이다. 제도 밖의 사랑이라고 해서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다. ‘모든’ 사랑은 사랑하는 자의 결핍이나 욕망에 대한 자기 판단, 회계(대차대조표), 자기 확신의 활동이다. 자기가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은 절대로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랑받음은 내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상대방의 자기 혼란이다. 사랑은 내가 타인의 상태에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달려있다. 본인이 매력적이고 잘나서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나는 <하얀궁전>의 두 사람은 서로를 ‘필요로 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영화를 엄청나게 좋아한다. 로맨스 영화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필요한 사람이 필요할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실제로 나타난 적은 없다. 그래서 이 영화는 나의 영원한 판타지다. 인생의 어느 고비에서 많은 이들이 그럴 것이다. 누구나 특정 시기에 절실히 어떤 사람이 필요하다. “제발 도와주세요.” 이토록 사람이 필요할 때가 있다. 문제는 필요한 관계를 얻으려면, 그 관계를 오래 이어 가려면 무엇이 가장 필요한가를 아는 것이다. 너무 절실하게 필요하면 분별력이 사라져서, ‘아무나’가 상대가 되고 그 상처로 다시 절실한 필요가 더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경우가 많다. ‘필요’가 ‘사랑’이 되려면 윤리가 필요하다. 사람들이 인간관계에서 가장 분노할 때는 상대가 나를 이용했다는 판단이 들 때다. 자신이 ‘고양이에게 먹힌 생선’이었다는 기분이 들때, 화가 나고 불쾌하고 때론 비참하고 자책하지 않는 사람은 드물다. 그것은 내가 사물로 다루어졌다는 의미다. 상대에게 무시당하고 어느 부분만 착취당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대가 나를 함부로 대하고 나의 고통을 즐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모든 것을 나는 몰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 이전에 윤리. 윤리는 정치학이고 사회 정의다. 윤리는 상대를 존중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이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이렇게 말하면 된다. “사랑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지금 내 사정이 이래요, 그래서 잠시가 될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나는 지금 당신이 필요합니다. 당신의 존재,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대신 최선을 다해 당신과 협상하고, 당신에게 정성을 다하겠어요. 당신도 내게 필요한 것 혹은 불편한 모든 것을 말해주세요. 물론 당신에게만 충실하겠어요.“ 의사소통이 사랑의 기본이건만, 우리는 타인과 대화하는데 익숙하지 않다. 대화 자체가 권력 관계의 규제를 받는다른 점도 문제다. 언어적 의미로만 볼 때 ‘필요’는 ‘사랑’에 비해서는 부분적으로 조건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필요와 사랑에 위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무조건적인 완전한 사랑은 존재하지 않으며, 필요의 조건을 명확히 하는 것이 상대를 더 존중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영화 마지막에 두 사람은 다시 만난다. 두 사람 모두 “I embarrassed you”라는 요지의 표현을 몇 차례 나눈다. 두 사람 사이에 오간 대화의 정확한 의미는 어원에 있다. Em/im(안에) +barrass(가두다). 그러니까 상대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지 못하고 자기가 원하는 생각에 가두어놓고,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혼자서 괴로워했다는 사실을 주인공들은 깨달았다. 이 영화는 내가 제임스 스페이더의 필모그래피를 섭렵(?)할 때 눈에 띈 작품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내가 정말 좋아하는 남자 배우였다. 저평가된 배우이고, 아쉽게 나이든 배우라고 생각한다. 굉장한 미모에 지성, 무력함, 악마성, 취약함, 평범함, 피로가 다 묻어난다. 수전 서랜든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어떤 배역을 맡아도 지적이고 기품이 있다. 정희진 박사님의 ‘혼자서 본 영화’ 를 읽는 밤- 필요와 원함 좋아함의 차이를 느낄 수 있도록 오롯이 나에게 집중하는 명상의 시간을 가져 보라고… 에리히 프롬님도 말씀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