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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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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years ago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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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우시절

영화 ・ 2009

평균 3.2

<비가 내리면 시간도 따라 내리고> 대나무가 비처럼 내리는 곳이 있다. 사진을 든 남자에게 그곳은 어떤 의미를 지닌 장소일까. 그는 이제 막 중국에 도착한 모양이다. 한 시간의 시차를 알리는 기내 방송을 들으며 남자는 시계 바늘을 정확히 한 시간 전으로 돌린다. ‘호우(好雨)’, 세상을 온통 잠기게 할 것처럼 퍼붓는 비가 아니다. 영화의 영어 제목을 보자. ‘Good Rain’. ‘좋은 비’라니, 꽤나 막연해진다. 좋은 비가 내리는 시절을 도대체 어떻게 그려낼 수 있을까. 영화의 주요 장면들에서는 대부분 비가 내리고 있다. 옷자락을 조금씩 적시는 봄비처럼, 허진호 감독은 수많은 빗줄기 사이에 가려졌던 우리의 ‘호우시절’, 그 책갈피를 슬그머니 빼내어 준다. 봄을 알리는 듯 두보 초당에는 해사한 봄빛이 만연하다. 그곳에서 남자는 오래전 알았던 여자를 만난다. 이윽고 호텔로 돌아와 펴든 책의 제목 역시 <두보 시선>이다. 그는 여자를 만난 기억 속에서 여전히 부유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시선 속 작품의 이름은 ‘춘망(春望)’으로, 직역하자면 ‘봄을 기다리며’라는 뜻이다. 이미 바깥에는 따스한 봄이 왔건만 그는 무엇을 기다리는 것일까. 영화를 보는 우리는, 그에게 봄이란 조금 다른 의미일 수도 있겠다며 짐작만 할 뿐이다. 재밌는 점이 하나 있다. 분명 둘은 언젠가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을 보냈음에도 각자가 떠올리는 사실이 다르다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엉뚱한 애인이 있었다고 한다던지, 생일 날 수줍음을 애써 감춘 채 했던 말이라든지, 하물며 자전거와 키스에 대한 진실 공방까지. 이제는 감정의 가닥이 조금은 잡힌 것인지 여자가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던 날, 하늘에선 둘을 적시는 가벼운 비가 내리고 여자는 이를 두고 ‘호우시절’이라는 표현을 쓴다.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라나, 확실히 둘 사이의 분위기에는 꽃이 피어난 듯하다. 다만 “꽃이 펴서 봄이 오는 건지,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건지”라니, 마냥 웃을 수만은 없겠다. 영화를 보다 보면, 관객은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게 된다. 필름이 분초단위를 다투며 끊임없이 다른 장면을 보여주듯, 얄궂은 시간은 이 둘에게 지난한 이별의 시간을 선사한다. 그러나 마지막 이별의 장소로 찾은 카페 안에서 남자는 도박과도 같은 승부수를 둔다. ‘리필’. 여자는 구태여 말리지 않지만, 복잡한 눈으로 응시하는 찻잔 속에서 꽃잎은 갈 곳을 모르고 하염없이 떠다니고 있다. 이 영화를 이루는 가장 큰 축은 바로 ‘비’와 ‘시간’이다. 영화의 변곡점이 되는 장면에서는 어김없이 비가 내린다. 그리고 그 비는 호우(好雨) 일때도, 호우(浩雨) 일때도 있다. 내리는 비의 성격이 어떤 것인지와 상관없이, 남녀 사이를 흠뻑 적시는 빗줄기 속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시간을 다시 한 번 ’호우시절‘로 되돌린다. 영화의 첫 신에서 남자가 시계를 중국의 시간에 맞게 맞췄던 것처럼, 돌아올 때는 다시 원래의 시간으로 되돌려야 하는 것처럼…극 중의 시간인 3박 4일 동안 차분할 틈 없이 자꾸만 요동치는 속내를 숨긴 채 한없이 정적으로만 그려지는 둘의 모습 너머로 그림자처럼 다가오는 필연적인 이별의 순간을 애써 미루려는 가슴 저릿한 분투가 조금씩 비쳐온다. 서서히 그 낯을 비추어 오는 이별 앞에서 단 몇 시간만이라도 더 서로의 감정에 온전히 충실하고 싶어한 두 남녀에게는 미안하지만, 3박 4일이라는 제한된 시간은 둘의 애틋한 감정을 관객에게 가장 잘 전달할 수 있었던 탁월한 영화적 장치였다. 서로 얼굴을 맞대지 않았던 지난 수년간 숱하게 내린 비로 인해 잔뜩 파인 땅의 자국이, 서로에게 내려 준 ’봄 비‘로 조금은 메워질 수 있었던, 극의 여주인공 ’메이‘가 병아리처럼 샛노란 자전거에 올라 힘차게 페달을 밟으며 다시금 청명한 웃음을 지을 수 있게 한 날들이 바로 그들의 두 번째 ’호우시절‘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