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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리골레토가 울려퍼질 때,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 1970년에 베르톨루치가 목도한 유럽은 이런 모습이었을까. 파시즘과 투쟁하는 혁명의 영웅이었던 아버지가 죽은 뒤 30년 후, 아들은 아버지의 고향을 방문한다. 더 이상 부르주아와의 투쟁은 없고 아버지의 혁명 동료들은 지주가 되어 있다. 그들은 아버지를 사랑했었다고 말하지만 아들은 그들이 아버지를 암살했을 것이라는 의심에 빠진다. . 영화는 곧 여러 복선을 거쳐 사실은 아버지가 혁명의 배신자였음을 밝힌다. 동료들은 아버지를 배신자가 아닌 영웅으로 남기기 위해 아버지의 죽음을 파시스트의 암살로 위장했던 것이다. 아들은 줄곧 아버지를 쥴리우스 시저로 생각했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쥴리어스 시저를 흉내낸다. 그렇게 과거의 역사는 새로운 역사로 복제되며, 영웅과 배신자의 경계가 사라진 포스트모던의 폐허 앞에는 허무주의와 무미건조한 삶의 텁텁한 순간들만이 남는다. 아들이 아버지라는 허상 뒤에 숨겨진 진실에 다가가면서, 마치 아버지가 쥴리어스 시저가 되었듯이, 아들은 점차 아버지가 되어 간다. 이러한 부분은 아들이 아버지의 옛 정부와 썸을 타는 관계로 발전하는 서사로서 표현된다. 이탈리아의 전통적인 음악인 리골레토가 울려퍼지는 암살의 순간에, 아들은 아버지의 육체를 빌려 그의 죽음을 항변한다. 이로써 한 명의 배우가 아버지와 아들의 역할을 모두 맡은 실험적인 형식은 그 자체로 영화의 실체가 된다. 이 순간에 적색과 흑색의 색채 대비는 너무나도 아름다워, 마치 동년도에 찍은 <순응자>가 그러하듯이, 서사가 스트라로의 뛰어난 촬영에 이끌리는 느낌을 준다. . 유럽 명화 풍의 고즈넉한 색감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내적 서사는 상당히 어둡고 비관적이다. 민중들은 아버지의 죽음을 매년 추모하며 파시즘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질 그날을 기대한다. 그러나 그 날은 결코 도래하지 못할 것임을 기차의 반복되는 연착은 암시하고 있다. 오히려 그들을 거짓 희망에 빠지게 만든 것이야 말로 아버지가 남긴 '거미의 계략'이라는 속임수임과 동시에 민중들이 축제를 한바탕 벌이게 하는 삶의 마법이다. 카메라는 20세기가 기다려 왔던 혁명이라는 이야기가 사실은 맥베드와 쥴리어스 시저와 같은 해묵은 유럽 신화의 표절과 재탕에 불과했다는 것을 폭로한다. 새로운 이야기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리골레토처럼 케케묵은 이야기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아들이 침묵을 지키고 마을을 떠나기에 그 폭로는 관객에게만 들리는 것이다. 인간들은 여전히 아버지-역사라는 거창한 허상에 불과한 거대담론들로 축조한 거미의 그물에 걸려 허우적 댄다. 결코 오지 않는 기차를 기다리며. 삶이라는 블랙 코메디를 반복하며. . 서커스에서 탈출한 사자가 사람들이 체포되어, 목이 잘린 채 쟁반에 담겨 나오는 이미지가 영화 내내 반복된다. 그 이미지는 혁명이라는 서커스의 용맹한 사자와 같았던 아버지가 목이 잘린 채 흉상이 되어 마을을 지키고 있는 풍경에 대응된다고 할 것이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아버지의 흉상은 존경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으나 영화의 결말에서 다시 등장한 아버지의 흉상은 섬뜩함을 준다. 여러 아버지들의 흉상이 유령처럼 떠도는 21세기의 한국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이 영화는 결코 먼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 좌파들에게 '왼쪽 깜박이를 키고 우회전을 했다'며 배신자 취급당하다 결국 자살에 내몰려 죽은 이후 한국 좌파의 신이 된 노무현과 그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인간악기가 되어 유튜브를 떠돌고 있는 MC무현이 목이 잘린 서커스의 사자에 자연스럽게 겹쳐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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