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처음엔 스트릿 아트라는 소재를 흥미롭게 풀어나가려는 다큐멘터리처럼 보인다. 한 한량의 눈을 빌어 고리타분한 전시관에 있기를 거부하는 거리의 예술에 바치는 헌사. 스프레이와 스텐실로 길거리에 행하는 이 '언더그라운드 예술'은 공인되지 못했기에 밤중에 행해진 다음 낮의 경매장으로 끌려나와 상품화되는 아이러니를 지니는 예술이기에, 수면 밑의 저항이며, 제도에 대한 반달리즘인 동시에 타의로 타락하는 창조다. 영화의 주인공이자 헌신적인 영상 기록자인 티에리는 이 무규율의 예술에 매력을 느끼고 거리 예술가들에 대한 동경 하나로 그들을 따라다닌다. 그저 따라다니며 대체로 기록하고, 때때로 일을 도와주고, 그렇게 오랫동안 그들과 함께하던 티에리는 우연한 기회에 평소에 우상처럼 여기던 스트릿 아트 끝판왕 뱅크시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스토리의 중심은 뱅크시가 아니라 어떻게 일이 잘 풀려 뱅크시와 협업을 하게 된 티에리가 뱅크시가 흘리듯 던져준 말 -예술을 해보는게 어때- 을 듣고서 예술에 도전해 엄청난 상업적 성공을 거두는 것이다. <선물 가게를 지나면 출구>는 예술적 감각이나 재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모방 예술가에 불과한 티에리가 거둔 성공의 이면을 보여주며 미디어 플레이에 놀아나는 언론과 무비판적 대중, 나아가 예술계를 조롱의 타겟으로 삼는다.   헌데 중요한 부분을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한다. 영화에서 인터뷰는 기가 막히게 아귀가 맞아 떨어진다. 또한 예술가로서의 자기를 까는 영화 제작에 호의적이지 않았을 것이 분명한 티에리는 '영화를 위한' 장면을 숱하게 제공한다. 게다가 오랜 세월 무보수 봉사를 하던 티에리의 그 경제력과 시간과 가족의 이해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비단 인터뷰 뿐만 아니라 전시회를 앞두고 자신에게 예술적 고찰이 없음을 너무도 손쉽게 고백하는 모습 (심지어 제 3의 촬영자에게 무방비로 찍히는 중), 작위적일 정도로 기괴하게 만들어진 티에리의 영화 등. 이 모든 것들은 뱅크시가 증언한대로 티에리의 자료들 중 선별해 편집한 것이 아니라, <선물 가게를 지나야 출구>를 만들기 위해 기획 후 찍은것이 분명해보이는 영상들이다. 결정적으로 티에리가 스스로 쓴 Life is beautiful이라는 문구-그의 만들어진, 허구적 명성의 상징-가 철거되는 장면은 이 모든것이 각본이었음을 알리는 영화의 고백임이 분명하다. 즉, 다큐멘터리를 자처하며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차용하고 있는 이 영화는 얼핏 보면 마치 심통난 뱅크시의 폭로전처럼 보이지만, 사실 뱅크시와 티에리, 셰퍼드가 공모해 만들어낸 다큐멘터리의 탈을 쓴 블랙코미디이다. 그리고 계획적으로 가짜 예술가를 만들어 팔아먹는데에 성공한 뱅크시는, 그 픽션의 과정을 낱낱이 기록해 모든 것이 상업의 논리(선물가게)로 귀결되어야 종료되는(출구) 허위 가득한 예술계에 통렬한 일침을 가한다.   이 사기극의 중심엔 미디어가 있다. 분명 대부분은 비어있었을 티에리의 테잎들이 가득 찬 이미지로 우리에게 다가온 것처럼, 미디어는 티에리를 야심과 재능으로 가득찬 예술가처럼 보이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자본을 끌어들여 이 황당한 쇼의 결말을 낸다. 뱅크시는 이처럼 거짓 이미지를 팔아먹는 미디어의 수법을 똑같이 흉내내서는, 외려 자기가 진짜(다큐멘터리)같은 가짜(픽션)영화를 만들어 보는 이로 하여금 정신을 차리게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작품이 상품화되어 비싸게 팔려나가는 것에 대한 항의의 의미로, 길거리에서 몰래 스스로의 작품을 헐값처분했다는 등의 그의 짓궃은 행보가 떠오르는것은 우연은 아닐테다. 제도권 밖에서 매체의 경계를 넘나들며 예술과 사회에 대한 비판을 감행해오던 뱅크시는 이번엔 영화로 이런 이야기를 한다. '이런 거짓 예술에 속든 말든 그건 니 자유다. 근데 속았으면 나가기 전에 선물가게를 들르시오.' 그러니까 이건, 매체만 바뀌었을 뿐 결국 뱅크시의 골때리는 퍼포먼스다.
좋아요 96댓글 1


    • 데이터 출처
    • 서비스 이용약관
    • 개인정보 처리방침
    • 회사 안내
    • © 2024 by WATCHA, Inc.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