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이제 '이런 영화'는 좀 지겹다는 관객에게 장준환 감독은 아직 봐야 할 게 남았다며 또 한 편의 영화를 슬며시 건넨다. 하정우 특유의 경쾌한 스텝에 가볍게 미소 지으며 관람을 시작했다가 극 중 인물의 마음들이 같은 곳을 향해 점차 모이기 시작하면 자세를 고쳐잡게 된다. 강동원의 처절한 몸부림에 머리가 쭈뼛서는 경험을 한 뒤 김태리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보고나면 어느새 가슴은 뜨겁게 달궈져 있다. 영화 '1987'(12월27일 개봉)이 주는 영화적 경험이 그렇다. 현대사의 비극을 소재로 한 일련의 작품들을 일각에서 '이런 영화'로 평가절하하는 건 시대의 아픔을 영화의 힘으로 돌아보지 못하고, 그 아픔이 흥행 코드로 활용되는 데 그쳤기 때문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1987'은 다르다. 지금의 시대정신과 공명(共鳴)하는 과거를 다루면서 이야기의 도착점과 형식의 목표가 일치하며, 이 작품의 지향점을 마음 속 깊이 새긴 배우들이 함께있다. 영화만이 할 수 있는 것들로 '그때 그곳'(1987년)에서 '지금 여기'(2017년)를 보게 하는 것, 유사 소재 다른 작품들이 도달하지 못한 영역이다. 1987년 1월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받던 서울대생 박종철(여진구)이 고문당해 사망한다. 대공수사처장 박처원(김윤석)은 사건 은폐를 위해 시신을 하루빨리 화장할 것을 지시하지만, 서울지검 공안부장 최 검사(하정우)는 화장동의서에 사인하지 않겠다며 버틴다. 고문치사임을 직감한데다가 권력에 휘둘리기만 하는 검찰에 짜증이 난 그는 옷 벗을 각오로 이 일을 언론에 슬쩍 흘리고, 이로 인해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간다. 작은 물결이 모여 거대한 파도가 되고, 힘겨운 발구름이 합쳐져 땅을 뒤흔드는 지진을 만들며, 외마디 외침이 뭉쳐져 거대한 함성이 되는 과정이 '1987'에 담겼다. 역사는 영웅 혹은 구원자의 깜짝 등장이나 어떤 결정적 사건에 의해 찰나에 뒤집어지는 게 아니라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였던 평범한 사람들의 작은 행동이 쌓여 조금씩 전진하는 거라고 영화는 말한다(박 처장은 반복해서 "네까짓 게 혼자 뭘 할 수 있겠냐"고 한다). 그렇다면 사회에 내재된 공통된 의지가 검사에서 기자로, 교도관에서 대학생으로, 종교인과 운동가로, 그리고 결국 광장에 모인 시민의 거대한 물결로 이어져 확장되는 이 작품 특유의 릴레이식 전개는 필연적인 연출이었을 게다. 다시 말하자면, 이 영화의 주인공은 특정 인물이 아니라 비열한 권력에 굴복하지 않고 민주주의를 지켜나가려는 시민 공동체 그 자체다. 영화는 30년 전 그들의 폭압을 언급하며 슬퍼하고 분노하며 주저앉기보다 30년 전 우리의 인간적 숭고함을 보여주며, 상처입은 한 발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내딛으며 나아간다. 이 작품이 박종철의 죽음으로 열리고 이한열의 죽음으로 닫히는 건 바로 그런 의미다. 마지막 두 개의 시퀀스 또한 상징적이다. 자욱한 최루탄 연기 속에서 뒤로 물러서지 않고 민주주의를 외치며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나가는 이한열 열사, 좁고 더러운 골목길을 지나 넓은 광장으로 나와 군중의 함성을 목도하는 대학교 신입생의 얼굴이 그것이다. 박 처장은 애국(愛國)이라는 거창한 대의명분을 내세워 행동하지만, 교도관 한병용(유해진)은 다만 "사람이 억울하게 죽었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냐"며 움직일 뿐이다. '1987'은 출연 배우들이 가슴 속에 담은 공통된 염원이 스크린 밖으로 발산하는 광경을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영화이기도 하다. 단순히 김윤석·하정우·유해진·이희준·박희순·김태리 등이 뛰어난 연기를 보여줬다는 게 아니다. 이들은 여타 작품에서보다 적은 분량을 배정받고 특정 지점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퇴장할 뿐이지만, 영화가 끝날 때까지 관객의 마음 속에 남아 살아숨쉰다. 그건 아마도 그들의 눈에 담긴 의지와 바람을 관객이 충분히 알아챌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김윤석은 앞서 이번 작품을 '쇼트트랙 계주' 같은 영화라고 설명했는데, 자신의 역할이 끝나도 선수들이 경기장을 떠나지 않고 트랙 안에 남아있다는 의미다). 영화는 어쩔 수 없이 지난 겨울 광장을 밝혔던 촛불을 소환한다. '1987'은 올해 3월10일의 결정이 결코 우연히 얻어걸린 게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이 작품에는, 우리는 과거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마찬가지로 아무리 힘겨워도 역사를 스스로 만들어왔다는 일종의 자부심이 있다. 1987년에도 그랬던 것처럼 2017년의 변화 또한 어떤 이데올로기나 정치적 입장을 대변한 게 아니다. 그저 상식적인 세상에 대한 요구였다. 최 검사가 박 처장에게 "법대로 하자"고 말하면서 이 모든 일이 벌어진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아마도 영화 '1987'을 걸작이라고는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영화 전개상 전혀 필요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는 특정 설정과 장면이 삽입된 건 이 작품의 최대 단점이다. 과시적으로 보이는 몇 개 신(scene)은 의도가 분명치 않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1987'이 아름다운 영화라는 건 분명하다. 목표가 올바르고, 그 목표를 달성해 가는 과정이 정직하며, 이 과정에 참여한 배우들의 연기 또한 진솔하다. 1980년 광주를 온전히 담아낸 영화가 아직 나오지 않은 것과 달리 1987년 6월 항쟁은 '1987'로 상당 부분 완성됐다고 해도 과한 표현이 아니다. 손정빈 기자 jb@newsis.com
이 코멘트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좋아요 2485댓글 110


    • 데이터 출처
    • 서비스 이용약관
    • 개인정보 처리방침
    • 회사 안내
    • © 2024 by WATCHA, Inc.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