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기연

미스터 터너
평균 3.1
영화의 첫 세 숏, 그리고 마지막 세 숏에 영화의 핵심이 담겨 있다. 빛을 색의 형태로 분리해 표현하던 터너의 미술은, 터너를 일종의 빛처럼 다루는 영화의 연출 형식으로 이어진다. . (2015.2.25.) (스포일러) . 이 영화의 제목은 <미스터 터너(Mr. Turner)>이다. 그러나 영화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것은 터너가 아니다. 영화의 첫 숏을 보자. 여명이 밝아오는 듯한, 아직은 어두운 하늘 아래. 카메라는 멀찍이서 두 여인이 걸어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그녀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카메라는 그녀들을 따라 패닝한다. 그러던 중 여명을 받으며 스케치를 하는 터너의 모습이 후경에 등장하면 카메라는 더 이상 여인들을 좇지 않고 그 자리에 정지해 터너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 숏에 이어지는 두 개의 숏에 걸쳐 카메라는 터너에게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간다. 마침내 카메라가 터너의 정면을 비스듬히 마주할 정도로 다가갔을 때, 오프닝 크레딧이 이어지며 영화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린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은 어떠한가? 터너가 죽은 뒤, 영화는 마지막에서 세 번째 숏을 터너의 몫으로 남겨둔다. 첫 숏에서 카메라가 정지했던 딱 그 순간처럼, 그러나 이번에는 황혼으로 보이는 빛을 받으며 스케치를 하는 터너의 모습이 롱숏으로 잡힌다. 그리고 그 숏이 지나고 나면 터너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으며, 나머지 두 숏은 터너와 관련된 또 다른 두 여인에게 할애된다. . 여명을 배경으로 알 수 없는 두 여인을 거쳐 터너에게서 카메라가 멈추고 뒤이어 터너의 두 숏이 이어지는 방식으로 영화가 시작하고, 황혼을 배경으로 스케치하는 터너의 숏 이후 영화 내내 부각되던 두 여인을 각각 담은 두 숏이 이어지는 방식으로 영화가 끝나는 이 구조는 그야말로 대칭적이다. 오프닝 크레딧이 영화의 실질적인 시작이며 터너가 죽는 씬이 영화의 실질적인 결말이라면, 처음 세 숏과 마지막 세 숏은 각각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서로 맞물려 있는 셈이다. 이렇게 맞물린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는 영화가 터너의 이야기를 다루는 태도에 있어 핵심적인 두 가지 요소를 보여주고 있다. 첫 번째는 여명과 황혼의 존재이며, 두 번째는 이야기를 시작하고 끝맺는 (터너가 아닌) 타인들의 존재이다. . 터너의 이야기를 표방하는 이 영화에서 그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가 각각 여명과 황혼에 맞물려 있다는 것은 곧 이 영화가 터너를 ‘빛’과 동등하게 바라보고 있음을 드러내는 듯하다. 터너의 작품에서의 핵심은 늘 빛이었다. 빛은 일반인으로서는 본질 그 자체를 파악하기 힘든 대상이다. 내리쬐는 빛을 직접 마주할 수도 없으며, 우리는 주로 그 빛이 어딘가에 반사된 색이나 밝고 어두운 정도를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빛은 존재한다. 또한 빛은 어떤 시간대에, 어떤 장소에서, 어떤 각도로, 어떤 물체와 함께, 어떤 심상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른 인상을 주게 마련이다. 터너는 그것을 빛의 자식이나 다름없는 색의 힘을 빌려 캔버스 위에 다시금 표현해 내고자 했다. 그는 굳이 어떤 명확한 형태 안에 빛을 가두어 빛을 파악하기 쉬운 무언가로 변질시킴으로써 빛 그 자체를 캔버스 안에 오롯이 담아냈다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저 그는 빛이 주는 주관적인 인상을 캔버스 위에 표현하려 한 것이다. 영화는 터너가 자신의 캔버스에 빛을 표현하기 위해 취했던 바로 그 태도를 바탕으로 필름 위에 터너를 표현해 내려 한다. . 우리가 빛을 온전히 파악해 내기는커녕 제대로 바라보기도 힘든 것처럼, 우리는 타인에 대해, 혹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조차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한 사람의 삶에 있어서 모든 순간순간들을 알 수도 없을뿐더러, 매우 많은 에피소드들을 건져내어 취합해 본들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주관적이며 단편적인 인상의 조각들에 불과하다. 하물며 2시간 30분의 러닝타임 하에서 한 인물의 삶을 ‘객관적으로’ ‘온전히’ 표현해 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한 사람의 삶에 있어서 특정 부분들만을 골라다가 그것들을 연결시켜 놓으면 무언가 거대한 하나의 이야기 덩어리를 이루어 이것이 마치 그 사람의 삶의 ‘정수’인 양 오인되기 십상이다. 이것은 두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한 사람의 삶을 온전히 들여다 본 것 같은 착각을 주기 위해, 전기 영화가 가장 쉽게 택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미스터 터너>는 그런 속임수를 쓰려 들지 않는다. 영화는 굳이 터너의 삶에서의 수많은 에피소드들을 물 흐르듯 연결시키려 하지 않는다. 단절된 시간대의 에피소드들이라면 그것들이 물 흐르듯 연결되는 것이 오히려 비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 듯한 태도이다. 이러한 태도로 인해 이 영화를 보는 많은 관객들은 아마 영화가 종종 뚝뚝 끊기며 씬과 씬 간의 접합이 어색하다는 느낌을 쉬이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바로 이러한 태도 덕분에, 몇 시간 만에 한 사람의 삶이 파악될 수 있다는, 아주 오만하기 짝이 없으며 영화가 다루고자 하는 그 인물에 대한 가장 큰 모욕이라 할 만한 전기 영화의 함정을 피해갈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이 영화는 전기 영화 자체가 타인의 눈을 통해 한 사람을 바라본다는 한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프롤로그, 에필로그에서 각각 다른 두 여인의 존재를 통해, 즉 타인의 존재를 통해 터너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끝났던 것 역시 이러한 영화의 인식을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 영화는 터너와 서머빌 부인이 분광기 실험을 하는 장면을 꽤 오랜 시간에 걸쳐 묘사한다. 서사상으로는 그리 중요치 않은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이 장면에 큰 비중을 둔다. 아마 그 장면이 이 영화의 태도의 핵심을 담고 있어서가 아닐까? 분광기는 빛을 색으로 분리시킴으로써, 상대적으로 더욱 가시적이고 분명한 형태로 변환시키는 역할을 한다. 빛이 주는 인상을 색으로 표현하고자 한 터너의 그림, 그리고 터너라는 인간의 삶을 한 줄기의 빛으로 인식해 이것을 가시적인 씬들의 집합으로 표현코자 한 이 영화는 결국 분광기의 예술적 변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한 줄기의 빛이 분광기를 거치면 수많은 색의 스펙트럼으로 분리되듯, 이 영화 역시 터너라는 인물을 두고 여러 갈래의 해석들을 제시한다. 우선 당대 미술계에서 그를 두고 극단적으로 갈렸던 평가들이 제시된다. 그의 의도가 어찌 되었든 장황한 해설을 늘어놓으며 그를 찬양하는 평자가 있는가 하면 엘리트들만이 향유하는 거짓 예술이라 여기는 대중들 역시 존재했다. 또한 시대가 감에 따라, 또한 그의 빛에 대한 연구가 더욱 깊은 지점으로 향해 갈수록 그의 예술은 많은 이들에게 외면받기도 했다. 사진의 등장은 특히 그에게 시대의 흐름을 명징하게 보여주는 증거였다. 미술계의 주류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낙오된 헤이든을 바라보던 시선은 곧 다른 이들이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되고 말았다. 전함 테메레르 호의 퇴역을 지켜보고 이를 캔버스로 옮기는 작업은 그런 면에서 그의 삶과도 맞물리는 지점이 있었다. . 한 편, 그의 인간적인 면모에 있어서도 영화는 다양한 해석의 결을 제시한다. 터너가 미술계의 주류 인사들을 대하는 태도와 주류로부터 멀어진 헤이든을 대하는 태도는 좀처럼 일치하지 않는다. 아들로서 아버지를 대하는 태도와 아버지로서 자신의 자식들을 대하는 태도는 거의 극단적으로 다르다 할 수 있을 정도이다. 특히나 여성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터너는 이중적인 면모를 극명하게 드러내 보인다. 서머빌 부인이나 부스 부인을 대할 때 터너는 그들을 존중하며 동료, 동반자로서의 신뢰를 보인다. 그 중에서도 부스 부인에게 그가 표현하는 애정은 순수하고 진실해 보인다. 하지만 그가 전 부인과 그녀의 딸들, 그리고 자신의 하녀를 대하는 태도에서는 인간적인 존중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특히 하녀의 경우, 그는 그녀를 거의 없는 사람 취급하다 집안일과 손님 대접 및 잔심부름을 시키거나 혹은 성적 착취의 대상으로 삼을 뿐이다. . 여기서 우리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의 두 여인의 존재를 새삼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의 두 여인의 존재가 이 영화가 타인의 시선을 매개 삼아 전개되는 터너의 이야기임을 분명히 하는 장치라는 점은 이미 언급한 바가 있다. 그러나 프롤로그에 등장한 익명의 두 여인들이 에필로그에서는 터너의 삶에서 그 옆을 지켰던 구체적인 두 여인, 부스 부인과 하녀로 대체된다는 점 또한 특기할 만 해 보인다. 이러한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의 대조는 ‘모호한’ 빛의 존재가 분광기를 거치며 ‘구체적인’ 색으로 대체되는 점과 닮은 듯하다. 이 영화가 터너와 그의 삶, 그의 예술을 빛처럼 대하며 분광기 역할을 자처하고 있음이 더욱 명료해진다. 그러나 에필로그에서의 두 여인의 존재의 변화는 단순히 빛에서 색으로의, 모호성에서 구체성으로의 변환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 에필로그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세 개의 숏으로 이루어져 있다. 터너가 황혼을 배경으로 그림을 그리는 숏, 부스 부인이 창을 닦다 미소 짓는 숏, 그리고 하녀가 어두운 복도를 지나 터너의 흔적이 남은 방에서 흐느끼는 숏. 터너의 존재가 황혼과 함께 사라진 뒤 등장하는 부스 부인의 숏에서 그녀는 창을 통해 쏟아지는 빛을 전면에 받으며 환히 웃는다. 그리고 이때 카메라는 빛이 쏟아져 내리는 창밖에서 그녀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이는 곧 카메라가 빛의 영역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음을 의미한다. 반면 그에 뒤이은 하녀 숏에서, 카메라는 어두운 복도를 걷는 하녀를 잠자코 바라보다 하녀가 방 안으로 들어간 뒤에도 여전히 어두운 복도에 남아 그녀를 바라본다. 그 방 안에는 빛이 내리쬐고 있으나 그 빛은 미약해 방은 여전히 어둡고, 그녀는 부스 부인처럼 웃기는커녕 오히려 눈물을 훔쳐야 한다. 그리고 카메라는 이 모습을 어둠의 영역에서 지켜본다. 작중 터너는 빛과 어둠의 대비에 대해 각각 신성한 것과 악한 것에 비유해 말한 바 있다. 그러나 빛과 어둠은 어쩌면 서로가 있기에 존재할 수 있는, 영원히 공존해야 하는 쌍이다. 터너의 작품들 역시, 테메레르 전함의 그림이 그랬던 것처럼 시간이 갈수록 스러져 가는 빛, 어둠을 품는 빛에 대해서도 말하고자 하지 않았던가? 이 영화는 터너의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 시점에 이르러 그가 존중하고 사랑했던 여인을 빛의 영역에서, 그가 무시하고 착취했던 여인을 어둠의 영역에서 바라봄으로써, 터너의 삶 역시 빛과 어둠이, 신성함과 악함이 공존하는 형상이었노라고 말한다. . 분광기를 거쳐 나타난 색의 스펙트럼, 그러나 이 수많은 색들은 다시 물감과 붓을 통해 캔버스 위에 옮겨지곤, 다시 한 데 모여 자신의 본체나 다름없는 빛에 대한 인상을, 하나의 그림을 완성해 낸다. 이 영화 역시 억지로 한 사람을 해석할 수 있는 명징한 한 가닥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대신, 일종의 스펙트럼처럼 한 사람과 그의 예술을 제시한다. 터너의 삶과 예술이 곧 한 줄기의 빛이라면, 극명하게 갈렸던 그의 미술에 대한 평가들, 그리고 그만큼이나 극명하게 갈렸던 그의 인간적인 면모들이 ‘씬’의 형태로 구현된 것은 곧 분광기를 거쳐 드러난 색의 스펙트럼일 것이다. 이 씬들의 연결은 마치 수많은 독립적인 붓질 아래 외따로 떨어진 것처럼 보였던 색의 덩어리들이 하나의 그림을 완성시키듯, 마이크 리의 손길 아래서 하나의 영화를 훌륭히 완성시켜 낸다. 각 씬의 구성과 그 씬들의 접합은 터너의 삶에 대해 감독이 받았던 ‘인상’의 조각들을 반영한 결과일 것이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영화는 이 모든 작업을 빛과 어둠의 공존으로 마무리 지음으로써, 그의 삶과 예술이 단순하게 평가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터너가 빛을 그림에 옮기는 데 있어서, 그리고 마이크 리가 터너의 삶과 예술을 영화에 옮기는 데 있어서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단지 주관적인 인상들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인상은 그 자체로 이미 충분히 유의미하다. 일생을 그 인상들에 몰두해 온 화가의 삶이 이를 증명해 주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