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스포일러 포함) 미셸이라는 인물은 혐오의 대상이자 혐오의 주체이다. 그녀는 아버지의 행위가 만들어낸 사회적 혐오의 질서에 종속되어있지만 그것에 완강히 저항하는 인물이며, 이 거부감은 아버지에 대한 혐오와 더불어 아버지를 두둔하고 재혼을 고려하는 어머니에 대한 증오로도 표출된다. 이는 그녀가 아버지와 만나기를 거부하는 것, 빈센트 부부가 아이를 낳는것에 보이는 냉담한 시선, 리처드와 임신가능성이 있는 연애를 하지 않기로 약속한 사실에서도 드러나는데, 그녀는 기어코 아버지의 질서가 재생산되는것을 원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녀의 사도마조히즘적 속성을 드러내고 캐릭터를 다층화시키면서 관습을 벗어난다. 그녀는 고통을 주는것을 상상하고 미소지으며 (패트릭), 고통을 주고 (로버트), 가학 속에서 흥분한다. 미스테리 스릴러의 기조 속에서 종잡을 수 없는 여인을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이 영화는 고통받는 여인의 뻔하디 뻔한 성장드라마가 되기를 거부하고 있다.   종잡을 수 없는 여인, 미셸은 서사를 위해 만들어져 서사에 종속되는 캐릭터가 아니라 흐릿하며 비관습적인 서사를 스스로 구성해나가는 인물이다. 그녀는 그녀 자신이 닥치는 사건들에 우리가 도저히 예상치 못하는 리액션들을 보인다. 성폭행을 당한 이후 그녀는 경찰도 부르지 않고 차분하다. 비밀로 하려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지만 친구들에게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듯 얘기한다. 또한 성폭행범이 옆집 남자로 밝혀진 이후에는 그 남자와 일종의 외설적인 게임을 진행한다. 영화는 그녀의 이런 행동들을 보여주며 무슨 의미를 도출해내려는 것일까. 질문은 쉽게 답을 얻을 수 없다. 다만 그렇게 ‘극적 인물’이 아닌, 매 순간 예측할 수 없는 그녀의 행위를 따라가다보면 문득, 이 영화에서는 각본이 인물에 선행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뿐이다. 즉, <엘르>는 한 여인에게 서사의 모든것을 내맡기고 사건에 대한 그녀의 리액션을 관찰하는, 배우의 연기력에 상당부분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과감한 시도를 하고 있다.   지금부터는 추측과 가정의 영역으로 들어가보고자 한다. 우리는 <엘르>를 통해 미셸이 외부의 억압을 이겨내며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 심리 드라마를 한 편 보았고, 심지어 그 과정에선 그녀가 보여주고 싶어하지 않을법한 내밀한 속사정들까지 엿보게 되었다. 서사 내에서 주체성을 획득한 미셸은 마치 볼테면 보라는 듯 자신의 가장 은밀한 순간까지 곧잘 내어보인다. 그리고 영화는 그 순간을 지켜볼때마다 시점 쇼트를 등장시키며, 엄폐물과 멀리에 고정된 카메라를 통해 마치 몰래카메라를 통해 그녀를 지켜보는 느낌을 준다. 미셸의 태도와 더불어 특징적으로 사용된 시점쇼트 장치는 관객에게 일종의 공범의식을 부여하고, 그 결과는 관객으로 하여금 ‘만들어진 극’이 아닌 실제 벌어진 사건의 내막을 훔쳐본 느낌을 갖게 만드는 것이다. 자, 우리가 본대로라면 미셸은 강인한 여성이며 자기 주관이 강하고 혼자만의 비밀도 갖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그녀를 아는걸까? 여기서 필자는 과거의 사례에 기반한 한가지 가정을 세워보려 한다. 폴 버호벤 감독은 이미 <스타쉽 트루퍼스>를 외부의 적에 대항하는 인류의 군국정신을 찬미하고 숭배하는 노골적인 파시스트 선전물처럼 만들면서 텍스트 이면에서 역설적으로 파시즘을 비꼬는 모습을 보여준 바가 있다. 어쩌면 <엘르> 또한 유사한 방법론을 통해 스릴러나 페미니즘 서사의 텍스트 이면에서 표면과는 또다른 게임을 거는 영화라면?   미셸의 아버지인 조지 르블랑이 수십년전 행했다고 알려진 살인극은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미셸은 이 사건에서 트라우마를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고, 그녀를 속박하고 있는 아버지의 굴레에서 벗어나려고 고군분투하는 중이며, 우리는 실제로 그녀에게 가해지는 외부의 폭력 또한 목격했다. 그리고 줄곧 미셸의 시선만을 따라가는 카메라는 그녀가 받는 고통을 보여주고, 그녀의 세상에 대한 대응을 그려내고, 의중을 알기 힘든 그녀의 표정 속에서 무언가를 찾아내려 한다. 여기서 문제는 우리가 객관성이 확인되지 않은 카메라로 찍어낸 2시간 10분짜리 영상만을 보고 그녀를 판단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는 미셸 자신의 것일지도 모르는 증언만을 듣고 그녀에게 공감하고 있다. 이 증언은 상술한 영화적 장치가 주는 효과로 인해 그녀가 아닌 또다른 객관적 서술자의 것인것처럼 보이는 증언이다.   반면 극중에서 미셸이 보게 되는 다큐멘터리, 미셸에게 적대적인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고 있는 바로 그 다큐멘터리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증언들 중, 그녀의 것이 아니라는것을 확언할 수 있는 유일한 관점이다. ‘조지 르블랑은 왜 그런 일을 저질렀을까, 이 사건에서 딸 미셸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다시금 생각해보자. 미셸을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해당 다큐멘터리나 미셸이 극혐하는 경찰(아마도 미셸이 범죄를 동참했을 가능성에 대해 의문을 가졌을)의 행위가 2차 가해에 불과하다고 느끼겠지만, 우리는 다큐멘터리 제작이나 경찰수사가 그렇게까지 근거없이 진행되는것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만약 다큐멘터리에서 제기하는 의문대로, 미셸이 아버지에게 누명을 씌운 해당 사건의 진범, 혹은 (10세 소녀의 신체능력을 감안해) 최소한 공범이라고 생각해본다면? ‘나는 피해자가 맞다’고 소리치는 그녀의 절규를 이렇게 쉽게 믿어도 되는걸까?   우리는 미셸이 로버트와의 관계를 끝내겠다고 선언한 뒤에 다시 한 번 마지막 섹스를 하며 불륜의 증거를 남겨놓는 것을 보았다. 미셸은 그 후 안나가 불륜을 눈치채기를 기다렸다가 그 대상이 자기였다고 고백하며 새디즘적 욕망을 충족한다. 또 우리는 미셸이 후반부의 파티에서 빈센트(그 전까지는 일자리를 줄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 파티 기획을 맡긴)에게 일종의 암시를 주는듯한 장면과 뒤이은 빈센트의 표정, 미셸이 집 앞에 도착한 뒤 패트릭을 자극해 강간상황을 의도적으로 조성하는 장면을 연이어 보았다. 이 일련의 시나리오의 끝은 빈센트에 의한 패트릭의 죽음이었지만, 미셸은 경찰에게 태연한 거짓말을 하며 상황을 종결시킨다. 우리는 여기서 그녀의 의도가 얼마나 개입했는지, 이 사건의 전말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지 못한다. 다만 그녀가 보여주는 주도면밀함, 공감능력이 부재하는 냉철함에 비추어보면, 그녀를 향하는 의심에 또다른 단서가 생기게 된다. 하나 더, 다큐멘터리에 담긴 10세 미셸의 싸늘한 눈빛은 아무리 봐도 가해자의 눈빛이다. 최소한 가해자의 눈빛으로 보일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연출된 눈빛이다. 되짚어보면, 그녀의 내면에서 더없이 덤덤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녀의 트라우마가 가해자의 위치를 벗어나 피해자의 위치에 놓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은 충분히 가능하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아마 ‘내 새로운 인생을 위해 얼마나 힘들게 싸웠는데’ 라는 미셸의 대사가 지칭하는것은 일상적 삶에서의 단순한 노력이 아닌 상상 이상의 연기력과 계획이었을지도 모른다.   제목이 ‘미셸’이나 ‘르블랑’이 아닌 'elle'라는 여성인칭대명사라는 것 또한 눈여겨보아야 할 점이다. 영화는 미셸을 어떤 하나의 이름을 가진 대상으로 부르는것이 아니라 확정할 수 없는 익명의 여인, elle라고 칭하며 그녀의 불투명함을 언질한다. (스파이크 존즈의 <그녀>처럼.) <엘르>는 표면으로 드러난것처럼 젠더 담론을 괴상한 방식으로 다루고 있는 불편한 스릴러 혹은 냉혈한 여성의 성장영화임에 더해서, 촘촘한 서사와 탁월한 심리묘사를 통해 ‘당신이 보고 믿는 것이 과연 진실일까’ 라는 텍스트 이면의 불확정성에 대한 게임을 걸고 있는 영화다. 이 영화에서 진정으로 중요한것은 그녀가 살인을 저질렀는지의 진위여부가 아니라, 단편적 정보만으로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단언할 수 없다는 것, 혹은 대상을 ‘안다’고 해도 그 앎이 거짓일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한다는 것이다. <엘르>는 진실을 미궁 속으로 밀어넣은 뒤 우리에게 ‘진실을 알 수 없음‘을 인정하라고 추궁하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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