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현승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평균 2.9
북한, 수학, 입시, 사회배려자, 교직 윤리, 바흐. 무엇 하나 진중하게 다루는 소재가 없다. / 1. 사회적 배려자를 향한 배려 없는 시선 리학성(최민식)은 지우(김동휘)에게 “자기연민만큼 안 좋은 것이 없다”고 설교한다. 그러나 영화는 정반대로 사회배려자를 지극히 연민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언더독 감성을 자극해 관객에게 휘발성이 강한 분노를 일으킨다. “있는 집 아이들은 둥글둥글 해서 좋다”는 대사가 대표적이다(<기생충>에서 영감을 받았음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없는 집 아이’에게 돌을 던지는 것은 쉽다. 중요한 것은 저지른 말을 책임지기 위한 노력이고, 이는 애정 어린 관심이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찰이 요구된다. 그러나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에 이러한 뒷수습은 전무하다. 구조의 문제가 배제된 채 혐오와 악이라는 현상만을 다루는 영화는 나름의 해결책으로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를 택한다. 극이 진행됨에 따라 빈곤층에 한정되어 있던 사회배려자는 비경제적 사회배려자인 한부모가정의 아이와 새터민으로 확대된다. 세 사람이 ‘언더독 어벤져스’ 팀을 이뤄 세상의 악과 맞서 싸우고 운 좋게 승리하는 것이 영화의 주된 서사다. 따라서 영화의 전개는 세상의 풍파를 견뎌내며 부조리에 맞서는 결핍자들의 ‘낭만’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낭만과 감정 소모에 대한 과도한 의존은 논리의 결여를 낳는다. 리만 가설을 북한의 수학자가 거뜬히 해결할 때, 두 사람이 우연히 가족의 결핍을 공유할 때, 갑을 관계가 만년필 하나로 역전될 때 가뜩이나 부실했던 영화의 원동력은 헛웃음을 자아낸다. 논리성을 잃은 극은 개연성을 잃는 법이다. 세상을 바꾸려는 노력도, 부조리가 만연한 사회 구조에 대한 통찰도, ‘켄 로치’식의 위로조차도 없다. “착한 사람은 해피엔딩을 맞이한다”는 과한 기대감에 부푼 동화적 낙관주의는 어떠한 결론도, 감동도 남기지 못한 채 무너진다. 영화가 끔찍이 운 좋은 사회배려자를 다룰 때, 행운이 따르지 않는 현실의 사회배려자는 소외된다. “가난을 연민하지 말라”는 대사와 가난을 도구화해 극의 주된 정서를 형성하는 영화 사이의 모순은, 성범죄의 끔찍함을 고발하기 위해 나신을 전시하고 탐닉하는 영화들의 위선을 상기한다. 2. 북풍 영화 한국 상업 영화에서 북한은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민족주의를 자극하는데도, 납치 혹은 살인 사건을 전개할 때도, 그저 이야기의 규모를 크게 키우기 위해서도, 사회적 약자의 전형을 떠올릴 때도 북한만한 ‘효자’가 없다. 마치 과거 북한 없이 정치를 못 했던 독재 세력처럼, 영화계에도 북풍은 여전히 세차다. 물론 이 영화에서 캐릭터의 전형성은 북한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형적인 사이드킥으로 남주 곁을 지키는 여자친구와 ‘평면’을 넘어 모든 말과 행동이 예상되는 ‘선적인’ 악역들에서 미래를 향해 발전하는 영화의 모습은 발톱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 서사의 중심이 되는 캐릭터가 온전하지 못하니 당연히 인물들이 내뱉는 ‘앱실론’도, ‘바흐’도, ‘만년필’도 충분한 의미를 형성하지 못하고 스크린을 미끄러져 내린다. 겉멋 가득한 대사를 입 밖으로 꺼낼 수 있는 배우들의 ‘용기’가 감탄스러울 뿐이다. 3. 꿀꿀이죽 각 장면을 살펴보면 하이틴 영화, 어드벤쳐, 호러 스릴러 등 다양한 장르 문체가 혼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체적인 주제를 붙들지 않고 줏대 없이 갈팡질팡하는 카메라는 다분히 상업적인 선택이라 확신한다. 중심을 잡지 못하는 카메라의 혼란스러움을 상쇄하고자 거의 모든 장면에 음악이 삽입된다. 음악이 염치없이 특정 감정을 강요할 때마다 한 발자국씩 이 영화와 멀어졌다. 차라리 뒷걸음질 치다 굴러떨어졌으면 좋았을 텐데. / 그리고 정말 미안하지만, 수학은 엄밀한 학문이다. 출제자의 의도 운운하며 반례를 무시하는 수학 교사 따위는 없다. 주워들은 입시, 올림피아드, 수학 이론으로 혐오를 위한 혐오를 양성하지 말아줬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