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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유정

나유정

8 years ago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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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코의 미소

책 ・ 2016

평균 3.9

2017년 07월 17일에 봄

"기억은 재능이야. 넌 그런 재능을 타고났어." 할머니는 어린 내게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란다. 그러니 너 자신을 조금이라도 무디게 해라. 행복한 기억이라면 더더욱 조심하렴. 행복한 기억은 보물처럼 보이지만 타오르는 숯과 같아. 두 손에 쥐고 있으면 너만 다치니 털어버려라. 얘야, 그건 선물이 아니야." 나는 영화관에 발을 들여놓기 전까지 친구라고 부르던 사람들은 거의 다 잃어갔다. 기다려준 친구들도 있었짐나 그림자를 먹고 자란 내 자의식은 그 친구들마저도 단죄했다. 연봉이 많은 남자와 결혼하는 친구는 볼 것도 없이 속물이었고, 직장생활에서 서서히 영혼을 잃어간다고 고백하는 친구를 이해해주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고소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의 끔찍함에 놀랐으나 그조차 오래가지는 못했다. 집에 점점 혼자 있는 식나이 늘어났다. 아무도 만나고싶지 않은 때가 많았고, 엄마와 할아버지를 찾아 가지도, 따로 전화하지도 않았다. 선배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진심을 말할 때, 선배의 목소리는 언제나 조금씩 떨렸다. 선배는 말할 때 감정이 배어나오는 나약한 습관을 고치고싶다고 말했었다. 마음이 약해질 때 목소리가 떨리는 버릇, 사람들과 잘 섞이지 못하는 성격, 느리게 걷고 느리게 먹고 느리게 읽는 기질, 둔한 운동신경,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서 백 가지 의미를 찾아내 되새김질하는 예민함 같은 것들을 선배는 부끄러워했다. 그런 약점들을 이겨내고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선배가 생각했던 자신의 장점이 무어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선배가 스스로 약점이라고여겼던 것들을 사랑했고, 무엇보다도 그것들 덕분에 자주 웃었다. 선배의 애정없이는 그 시간을 건너올 수 없었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랬다. 나에대한 선배의 끝없는 관심과 조언이 고마웠지만 그 고마움만큼이나 불쾌감도 커졌다. 선배가 '나'의 테두리를 짓밟고, '나'라는 공간을 무례하게 침입하는 것 같았다. 선배는 멀리에 있으면서도 내게 너무 가까웠다. 나는 나의 가장 추한 얼굴까지도 거부하지 않는 선배의 마음을 견딜 수 없었다. 나는 애초부터 사랑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인간이었으니까. 엄마의 감사 타령 속에서 그녀는 오히려 엄마의 초라한 현실을 봤다. 언제든 외식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굳이 그런 일에 감사할 필요가 없을 테니까. 언제든 맘껏 돼지고기를 먹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돼지고기 가격이 내렸다고 감사할 필요가 없을테니까. 돈이 있다면, 부유한 부모나 남편이 있다면 통증을 견뎌가며 매일 열 시간씩 서서 일할 수 있음을 감사할 필요가 없을 것이므로. 그녀는 차라리 엄마가 스스로의 처지에 솔직해져서 불평하기를 바랐다. 초라한 현실에 대한 엄마의 감사가 얼마간은 기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