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비가 멈추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위트와 헤어지는 순간부터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파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첫 4문장이다. 소설은 이 영화처럼 기억을 찾는 탐정이 자신의 여인인지 친구의 연인인지 알 수 없는 그녀를 찾아 미궁 속을 빙글빙글 도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라켓을 돌리면 하늘을 날 수 있을 거예요' 영화 속 꿈의 언어, 꿈은 늘 그랬다. 인과에 맞지 않아도 꿈을 꾸는 동안에는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다. 꿈은 선험을 바탕으로 이루어졌기에 전후가 바뀐 내용을 뭉텅이로 받는다고 해도 이질감이 없다. 그러니 라켓을 돌리면 하늘을 날 것이다가 아니라 하늘을 나는 경험이 예정되어 있으니 먼저 라켓을 돌려봐의 맥락이 되는 것이다. 라켓을 어떻게 돌려야 할지 물어볼 필요가 있을까. 꿈을 꾸는 사람은 이미 방법을 알고 있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의 첫 4문장을 거꾸로 돌려 보면 이렇게 된다.
위트와 헤어지는 순간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비가 멈추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현실로 내려온 이 문단은 더 이상 이상하지 않다. 그러니 제발 꿈을 꾸듯 얘기하는 건 멈춰주기를, 영화가 위트와 헤어진 것도 불행한 일이지만 애초에 우리가 꿈의 언어를 나눌 만큼 내밀한 사이였냔 말이다. 가진 게 얄팍할수록 맥락을 숨길 순 있다. 그럼 꿈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친한 척은 하지 말았어야지. 정말 꿈을 말하고 싶었다면 내게 더 털어놓아야 했던 거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