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상훈남
4.5

여름을 향한 터널, 이별의 출구
영화 ・ 2022
평균 3.2
2023년 09월 17일에 봄
카오루는 터널의 ‘끝의 지점’이 어디인지 알고 있었다.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는 곳’이 아닌, ‘잃어버린 걸 되찾을 수 있는 곳’ 그는 그곳에 ‘함께 들어가자’는 안즈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녀는 잃어버린 게 없었으니까. 그는 잃어버린 것에 대한 그리움과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지 못 하고 있었다. 하지만 간과하는 게 있었다. 시간을 바쳐서라도 얻어내고 싶은 건, 이미 끝나버린 사랑이 아니라, 지켜내야 하는 현생에 존재하는 ‘현재의 사랑’, 바로 하나시로 안즈였다. “넌 특별한 재능을 갖고 싶다 말했지만 이미 갖고 있어. 난 하나시로 안즈의 만화를 읽고 싶어. 그러니 넌 터널에 들어오지 말고 만화를 그려.” 안즈는 특별한 재능을 갖고 싶어 했다.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하기만 한 자신의 처지를 초라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자신의 만화를 재밌게 읽어주는 카오루로부터 ‘삶의 원동력’을 찾게 된다.계속해서 만화를 그릴 수 있고, 무언가에 기대지 않아도 되는 강인함을 얻게 된다. 그녀에게 필요한 건 터널 끝에 도달하지 않아도 얻을 수 있던 것이었다. 어쩌면 카오루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굳이 간절하게 그리워하지 않아도, 자신의 많은 시간을 세상에 반납하지 않더라도, 언제나 자신의 곁에 있어주는 존재. 계속 재미있게 볼 수 있는 만화를 그려달라는 그와, 계속해서 자신의 만화를 읽어주기를 바라는 그녀의 이다지도 먹먹한 사랑 이야기. 이 영화 OST를 들으며, 모든 장면들을 떠올리며 글을 쓰고 있으니, 당장이라도 눈물이 흐를 것만 같다. “읽어줄 사람이 없으면 그냥 종이 쪼가리 아니야?”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분위기 구현’에 있다.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게 반사되는 파도의 햇빛과,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몰아치는 비바람, 물 위에 동동 떠다니는 낙엽들을 밟을 때 나는 철벅철벅 소리, 어쩌면 혼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함께 있으면’ 좋을 것 같은 사랑의 먹먹함, 뒤늦게 보내지는 문자에 적혀져 있는 문구 ‘사랑해’. 황홀스러운 작화와 계속 귓바퀴를 맴도는 사운드트랙에 힘입어, 간만에 오랫동안 여진에서 쉽게 헤어나올 수 없는 일본 애니메이션이 나온 것 같다. 영화가 주는 따뜻한 감상엔 뭐가 있을까, 그저 이렇게 먹먹하고 장면의 잔상이 오랫동안 아른거리는, 이런 영화도 있다. “빌린 우산, 녹슬기 시작했어.” [이 영화의 명장면 📽️] 1. 첫 만남 비바람이 부른 안개 덕에 둘 말고는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에 홀린 듯이 건네보는 우산, 쉽게 받지 않는 상대. 지기 싫은 게 아니라, 자기보다는 그녀에게 더 필요한 우산이라는 걸 알기에 담담하게 설득해보는 것. 쉽게 마음이 열지 않다가도, ‘부모 같은 건 없다’는 다소 압도적인 말에 ‘아무렇지 않게’ 부럽다고 대답하는 카오루와, 그런 그를 보며 미소를 짓는 안즈. 비 오는 날 손을 하나 잃는 것 같은 불편함은 싫지만, 비 오는 날 우리가 떠올리는 그 날의 소중한 기억들은 그리 싫지 않다. 둘의 첫 만남도 그러했다. ‘돌려받을 우산’이 있다는 건, 언제나 ‘다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니까. “난 부모 같은 거 없어.” “부럽네.” 2.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말 (大好き) 끝이 보였다. 그녀에게 문자를 받을 수 있는 핸드폰은 일찌감치 버리고 왔고, 현실에서의 시간은 이미 셀 수 없이 지나고 있었다. 카오루는 그럼에도 잃어버렸던 사랑을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만을 바라보며 끝까지 달렸다. 그렇게, 다시는 잡지 못 할 줄만 알았던 동생의 체온을 느낀다. 그 동안 느꼈던 수많은 공허함을 위로받는다. 맛있는 음료를 마신다. 편안한 사랑을 느낀다. 하지만, 분명 이상했다. 자신에게 있어 ‘잃어버렸을 때 가장 치명적인 고통’은 동생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난다. 마침 분명 버리고 왔던 핸드폰에 답장이 온다. 현실에서의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만화가가 되어있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만화를, 카오루가 읽어줬으면 하는 만화를 그리고 있었다. 카오루는 헷갈렸다.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리려고 한다. 그 때, 누구보다 카오루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그의 동생이 가보라고 말한다. 이 곳에서의 ‘끝나버린 것에 대한 위로’보다 현실에서의 ‘앞으로에 대한 사랑’을 응원해준다. 카오루는 다녀오겠다고 말한다. 어렸을 적, 늘 그랬던 것처럼. “나는 그 날 이후로 계속 나아가고 있어.” 3. 가을비 하늘은 맑은데 비가 내린다. 낙엽은 떨어져있지만 물 위에는 떠 있다. 둘은 지나버린 시간 앞에 힘들어하지만 서로의 입을 맞춰본다. 여름은 지나버렸지만 그들은 여전히 짧은 옷을 입고 있다. 첫 만남엔 먹구름이 가득했지만 마지막 만남엔 해가 쨍쨍하다. 첫 만남엔, 한 명만 우산을 썼지만, 마지막 만남엔, 녹슬어버린 우산 아래 두 명이 존재한다. 카오루와 안즈의 사랑은 반어적이면서 뜻이 분명했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 본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이었다. “10초에 6시간 반짜리 키스였다.” 나는 이 영화를 보기 얼마 전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나와 다른 시간 다른 공간에서 이 영화를 보았지만 그런 그녀와 영화를 같이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보고 있는 세상이 내게도 보이는 기분이었다 “나한테도 너가 보는 세상을 보여줘.” “따분한 세상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