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천수경

천수경

6 months ago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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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지나가면

영화 ・ 2024

평균 3.6

어느 농촌이 서울 아이를 삼켰다가 도로 뱉었다. 그 소년 하나 때문에 몇이나 체했는지 모른다. 소년의 위장도 충분히 훼손되었길 바란다. 부끄럽게도 그게 내가 바라는 정의다. 누구에게도 좋지 않을 협소한 복수심. 버려진 플레이스테이션을 본 영문이가 나지막하게 읊조린 세 글자, 개 X X, 정도의 마음. 영문이는 자기한테 현금다발을 건넨 서울 어른의 마음을 정확히 알았을 것이다. 동생한테 필통을 사준 서울 촌놈한테 호의적이었던 본인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을 테니. ‘내 소중한 사람이 내 눈에 안 보일 때 네가 잘 해줘라.’ 의 마음. 그러니까 영문이는 그 돈을 더할 나위 없이 이해했다. 권력이 얼마나 저렴했는지 꿈에도 모를 기준이의 무지까지도 이해했다. 그 애의 순진함이 형제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한 나쁠 건 없었다. 기준이를 호위하는 어른들의 힘이 형제에겐 냉랭하다는 걸 영문이는 다 알고 있었을 테다. 문제는 기준이가 영문이에게 너무 많이 매혹된 것. 너무 많이 동경하게 된 것이다. 누구도 말릴 틈 없이 기준이는 영문이가 되길 꿈꾸기 시작했다. 황새를 따라가려던 뱁새의 다리가 찢어졌다. 그 부상에 대한 책임을 황새가 져야 하는 세상이다. 뱁새가 부자고 황새가 가난하면 그렇게 된다. 미친 세상. 텅 빈 거실에서 영문이를 흉내 내던 기준이의 모습이 나는 애틋하면서 메스껍다. 권위가 사람을 매료시키는 방식을 알아서. 그걸 내 손에 쥐고 싶었던 때가 있기 때문에. 내가 밟고 싶은 사람을 밟도록 허용하는, 재능의 영역일까 싶은 어떤 것. 그건 어느 정도 그 사람의 분위기에서 온다는, 그 분위기는 사람이 뱉는 대사나 표정에서 온다는 심증을 여전히 갖고 있다. 나는 다 커서 서른세 살이 되었는데도 영문이의 앞 머리부터 오토바이를 타는 폼까지 전부 짜릿하다. 영문이 같은 애들은 연민이 차마 다 꺼트릴 수 없는 동경을 기가 막히게 자아낸다. 어릴 때 부모님은 내게 가르쳤다. 누가 돈을 요구하면 가진 걸 다 주라고. 노숙자가 많은 도시에서 살았기 때문에 마트에서 장을 보거나 공원 산책을 하다가도 돈을 요구하는 낯선 이가 나타나면 부모님은 현금을 즉각 건넸다. 타인에게 친절해야 하는 이유, 타인의 요구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내 안위, 내 안전을 위해서라는 걸 자연스레 학습했다. 자식에게 빠르고 확실한 해결책을 가르치는 부모의 모습은 보편적일 것이다. 특별히 끔찍해 보이지 않지만, 의외로 끔찍한 결과를 낳는다. 덕분에 나는 보호 수단을 넘어선 진짜 선의가 무엇인지, 타인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무엇인지 꽤나 늦게 깨달았다. 이 영화를 만든 감독도 그렇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영문이보단 기준이와 비슷한 처지였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 전체가 사과 편지처럼 느껴져서 그렇다. 아들을 괴물처럼 바라보는 엄마의 얼굴을 가장 괴물처럼 그려낸 것이 이 영화가 사과하는 방식이다. 농어촌 전형을 악용해서 입시의 우위를 점하길 바라는 마음, ‘학부모 정보’를 위해 동의하지 않는 시위에 참여하는 마음은 모성애일까 자기애일까. 어디까지가 자기애고 어디서부터 모성애인지 구분하지 못하면 그 대가를 아이가 치른다. 언제나 그렇다. 기준이가 상실하고 있는 것은 돈으로 지켜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사실에 관해서 영화가 모호한 태도를 취하기 때문에 나는 막판에 영화와 사이가 틀어졌다. 기준이는 결코 무사한 채로 저곳을 탈출하지 않았을 것이다. 깊은 곳에 잠복해 있다가 문득 떠오를 여름을 불시에 앓아야 할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영문이를 보고 “혀-엉,” 하며 너무 반가워하는 사람이라서 그렇다. 기준이의 목소리에 묻어난 걱정을 나는 믿는다. 잘만 생존하는 수호의 태도를 꺼림칙하게 여기는 애라서, 경찰들한테 그런 식으로 화내는 아이라서. 기준이는 자신의 부모가 얼마나 천박한지 깨달을 것이다. 여름이 지나가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