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양기연

양기연

7 years ago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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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소나

영화 ・ 1966

평균 3.8

(2013.7.30.) . 조금은 혼란스런 도입부 뒤에 오프닝 크레딧까지 지나면, 비로소 우리는 의사에 안내에 따라 두 여인을 만나게 된다. 간호사 알마와 배우 엘리자베스. 그러나 두 여인이 한 사람의 분열된 두 얼굴임을 눈치채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 우선 엘리자베스의 아들로 추정되는 소년이 어머니가 보이는 스크린을 어루만질 때, 그 스크린엔 알마와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뒤섞여 나타난다. 한 편, 영화 내에서 가장 객관적인 위치에 서 있는 의사는 알마와 엘리자베스를 동시에 만나는 일이 없다. 또한 의사는 알마에게 '왜 당신이 엘리자베스를 간호해야 하는지' 말해주겠다더니, 엘리자베스가 입을 닫게 된 원인과 현재 상황만 말할 뿐 왜 알마여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또한 이때 의사가 엘리자베스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와중에, 카메라는 긴장해 있는 알마의 신체 곳곳을 보여준다.). 알마가 엘리자베스의 담당 간호사를 바꾸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하는데도 의사는 바꿔주지 않는다. 그녀 자신의 문제이니 그녀 스스로 돌보는 게 맞다는 듯 말이다. 또한 의사가 엘리자베스의 갈등을 이해한다며 말하는 내용이, 후에 알마에게서 비슷한 양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 알마와 엘리자베스가 의사의 별장으로 향한 뒤에도 영화는 둘이 한 인물이라는 것에 대해 여러 가지 힌트를 보여준다. 알마가 유리 조각을 일부러 내버려 두어 엘리자베스가 이를 밟는 순간, 카메라가 알마의 얼굴을 비추자 갑자기 필름 열화 현상이 일어난다. 이로 인해 알마의 얼굴이 반쯤 타 들어가더니 이내 화면이 뚝 끊기고, 알마의 얼굴이 사라진 자리엔 또 다른 여인의 실루엣이 등장하는데 곧 그 실루엣의 정체가 엘리자베스임이 드러난다. 바닷가에서 알마와 엘리자베스가 다투는 장면의 경우, 방금 전까지 한 프레임 안에서 다투던 엘리자베스가 등을 돌려 프레임을 벗어나자, 다음 숏에서 바로 알마가 마치 엘리자베스를 쫓듯 달리기 시작하는데 아무리 달려도 엘리자베스가 프레임 안에 나타나질 않는다. 두 인물이 별개의 인물이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 외에도 영화 전반적으로 두 인물의 신체를 겹쳐서 보여주는 연출도 자주 등장하며, 기본적으로 별장 파트에서 시각적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알마와 엘리자베스 두 명인데 청각적으로 존재감을 갖는 인물은 알마 한 명 뿐인지라(화면은 엘리자베스를 보여주는데도 알마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장면 역시 자주 나온다.) 지속적으로 두 인물을 동일시하는 뉘앙스를 품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 엘리자베스의 과거 이야기가 두 번 반복될 때, 알마는 이상하리만치 엘리자베스의 과거를 잘 알고 있으며 이를 지어낸 이야기라 치부하기엔 엘리자베스의 반응이 크고, 또한 그 장면의 끝에 영화는 두 인물의 얼굴을 겹쳐 버리는 연출을 통해 사실상 두 명이 한 인물임을 확증해 보인다. . 언뜻 보기엔 엘리자베스는 시각적으로만 존재하고 알마는 시각적으로도 또한 청각적으로도 존재하며 청각의 영역에선 영화 속 세계를 거의 지배하고 있기에 알마가 본질적 존재이고 엘리자베스가 그로부터 분열되어 나온 가면, 페르소나인 것처럼 보인다. 영화도 일부러 이런 식으로 호도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마야말로 의사가 언급하는 '엘렉트라' 공연 시점 이후에 엘리자베스로부터 갈라져 나온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알마는 간호사이지만 별장 파트에서 간호사로서 하는 일이 없다. 그녀는 오히려 마치 애초부터 간호사가 아니었다는 듯, 오히려 자신이 더 환자인 것마냥 격정적인 모습을 보인다. 엘리자베스의 과거는 '엘렉트라' 공연 장면과 보글러 씨의 등장 등으로 명확히 실체화되는 데 비해, 알마의 과거는 알마의 발화 내에서만 존재할 뿐 한 번도 실체가 드러난 바 없다. 그렇다면 알마는 대체 어떤 존재인가? . 알마가 어떤 존재이고 왜 나타났는지를 알기 위해 우리는 엘리자베스가 입을 다문 시점에 위치한 '엘렉트라' 공연과, 후반부에 알마를 통해 밝혀지는 엘리자베스와 아이 이야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엘렉트라는 남동생과 함께 복수를 위해 어머니를 죽인 신화 속 인물이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아버지와 남동생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인다. 엘리자베스는 주변에서 하는 말 때문에 어머니가 되고자 남편을 졸라 임신을 하지만 자신이 잉태하고 낳은 아이에 대해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왜 죽지 않느냐'고 묻고 싶어할 정도. 엘렉트라가 아버지와 남동생이라는 남성 가족 구성원에 대해 집착했듯, 엘리자베스도 주변에서 언급하는 남편의 '아내', 아들의 '어머니'이라는, 남성성에 종속된 채 강요된 여성성으로서의 역할에 집착해 임신을 했으나 오히려 그로부터 남들 앞에 가면처럼 드러내 보이는 자기 자신(페르소나)과 본질적인, 아내도 어머니도 아닌 본연의 자기 자신 사이의 괴리로 갈등을 겪기 시작한다(이는 의사가 엘리자베스에게 하는 말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아마도 여배우인 그녀가 페르소나로서 엘렉트라를 내세워 연기하는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이 삶 속에서 내보이고 살았던 페르소나와 엘렉트라 사이에서 놀라울 정도의 유사성을 보았을 것이다. . 의사의 말에 따르면, 엘리자베스는 동료 배우들에게 '웃음을 참으려' 공연 중 말을 멈추었다고 고백했으며 그 뒤로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일상 속 페르소나와 무대 위 페르소나 사이의 일치, 그리고 그 페르소나에 본질이 짓눌려 가는 자기 자신의 모습에 대한 자조 섞인 웃음이 터지려 한 것은 아닐까? 그런데 엘리자베스는 극중에서 두 번 더 웃는다. 병원에서 라디오를 듣다가 '용서해 달라' 말하는 여성 연기자의 목소리에 웃고, 별장에서 알마가 자신에게 공격적 태도를 보이자 웃는다. 그녀는 억지로 어머니가 되어 보려 했으나 실패한, '좋은 아내', '좋은 어머니'가 될 수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는 동시에, 본질과 페르소나 사이의 괴리에 대해서도 죄의식을 느껴, 아예 입을 다물어 버리기로 결심한 인물이다. 그렇기에 '용서'를 구하는 여성 연기자의 목소리는 엘리자베스의 또 하나의 페르소나와 같고, 그래서 그녀는 또 한 번 '엘렉트라' 무대 위에서 그럴 뻔했던 것처럼 소리내어 웃는다. 그렇다면 알마의 경우는 어떠한가? . 알마는 엘리자베스가 자신의 내적 갈등, 죄의식으로부터 탈출하려 구현해 낸 존재라 할 수 있다. 엘리자베스가 '아내', '어머니'의 역할을 수행하는 페르소나를 자신의 본질로부터 온전히 분리해낼 수 있다면, 적어도 본질로서의 엘리자베스는 그 죄의식으로부터 깨끗해질 수 있다. 따라서 그녀는 무의식 중에 자신의 페르소나를 알마로 실체화시킴으로써 자신의 본질에게서 일차적으로 분리해 낸 것이다. (엘리자베스에 의해 창조된) 알마 자신의 고백에 따르면, 알마는 칼 헨릭을 사랑하지만 그가 자신에게 소홀하자 친구의 이끌림으로 인해 외도를 하게 되고, 나아가 외도 상대의 아이인지 칼 헨릭의 아이인지 알 수 없는 아이를 임신하지만 칼 헨릭의 강요로 낙태를 한다. 즉, 그녀는 남자를 사랑하는 '좋은 아내', 아이를 사랑하는 '좋은 어머니'이면서 결혼을 아직 하지 않았으므로 아내의 역할에서 자유롭고 남자의 강요로 낙태를 했으므로 어머니의 역할에서 자유로운, 엘리자베스의 이상적인 페르소나이다. 직업조차 엘리자베스 자신의 내적 죄의식을 치료하기에 적당한 간호사이니, 이 얼마나 완벽한가. 따라서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죄의식을 모두 떠안은 알마가 (엘리자베스에게 있어서는 이상적인)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자, 페르소나와 자신의 본질 간의 온전한 분리를 무의식 중에 확신하기라도 한 양 자신의 상태가 호전되었다며 박사에게 편지를 보내려고까지 한다. . 그러나 엘리자베스가 예상하지 못했던 바가 있으니, 그것은 곧 엘리자베스의 페르소나인 알마조차도 다른 이와의 정사와 낙태로부터 비롯된, 페르소나와 진짜 자기 자신 간의 괴리로 인한 갈등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이는 후에 더 구체적으로 언급할 이 영화의 다층적 구조와도 닮아 있다.). 엘리자베스는 박사에게 보내는 편지 말미에 이것이 흥미롭다고 언급하고 있으나 이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알마 자신이 또 한 번 본질과 페르소나로 분열된다는 것은 곧 알마가 자신을 '본질'로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병원 장면에서 알마는 엘리자베스의 담당 간호사를 바꾸어 달라며 의사에게 '엘리자베스는 정신적으로 매우 강하기에 자신이 정신적으로 견뎌낼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무의식 중에 알마 자신이 엘리자베스에게 종속된, 상대적으로 그 존재의 뿌리가 흐릿한 존재임을 깨닫고 있음을 드러내는 동시에, 알마 자신이 엘리자베스의 존재에 짓눌리지 않으려는 반감 역시 드러낸다. 알마에게 있어서는 알마 자신이 '본질'이어야만 하고, 따라서 엘리자베스가 본질로서 스스로를 지키고자 입을 다물고 있는데 이를 마주해야 하는 것 자체가 두려운 일인 것이다. . 알마는 처음에는 엘리자베스에게 그래도 싹싹한 모습을 보인다. 별장에서 시간을 보내며 엘리자베스에게 자신의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을 때 이러한 모습이 가장 잘 나타난다.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은 알마는 술기운에 엘리자베스가 자신에게 '침실에서 자라'고 걱정 섞인 말을 뱉는 것을 듣고, 밤중에 엘리자베스가 자신의 침실로 찾아와 거울 앞에서 자신의 앞머리를 엘리자베스 본인처럼 들춰주며 둘이 닮았음을 확인시켜주는 환상을 본다(이것이 환청, 환상인지 실제 엘리자베스의 목소리와 모습인지 영화는 확실히 보여주지 않으나 적어도 엘리자베스는 이를 부정한다.). 이는 엘리자베스가 본질로서의 자신을 페르소나인 알마로부터 꼭꼭 감추지 않고 느슨히 풀어둔다는 신호이며, 적어도 알마는 자신의 이야기를 엘리자베스에게 털어놓음으로써 이러한 위안을 얻었다고 볼 수 있다. . 하지만 알마가 엘리자베스의 편지를 읽는 순간 이 모든 것이 깨진다. 표면적으로는 자신이 털어놓은 비밀을 의사에게 말하려 했다는 데서 오는 분노이지만, 사실 그 기저에는 엘리자베스가 알마의 이야기를 통해 오히려 엘리자베스의 본질로부터 알마를 온전히 분리해냈다는 확신을 얻었음을 확인함으로써 페르소나이지만 '본질이어야만 하는' 알마 자신의 존재가 위태로워지리라는 위기감이 깔려 있다. . 이제 알마는 위기감을 극복하고자 슬슬 본질로서의 엘리자베스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깨진 유리 조각을 방치함으로써 엘리자베스가 이를 밟고 상처입는 모습을 지켜본다. 이때 화면은 엘리자베스의 피를 보여주지 않는다. 반면 이후 다툼 끝에 엘리자베스가 알마의 뺨을 때리자, 이번에는 카메라가 알마의 코에서 난 피를 정면으로 보여준다. 즉, 아직은 본질로서의 엘리자베스가 페르소나인 알마보다 우위를 점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그 뒤 알마는 엘리자베스에게 말을 시키기 위해 거의 발악을 하기 시작한다. 엘리자베스가 거짓과 위선을 말하지 않기 위해 입을 다물고 본질을 지킬수록 페르소나인 알마의 존재는 점점 위태로워지기 때문일 것이다. 알마는 '거짓을 말하면, 위선 떨면, 게을러지면 뭐 어떠냐' 윽박지르며, 엘리자베스가 다시 입을 열고 페르소나인 자신을 뒤집어쓰길 바란다. 결국 알마가 극단적으로 끓는 물을 끼얹으려고까지 하자, 엘리자베스는 결국 '하지 말라'며 입을 열고 만다. 이때부터 둘 간의 관계에 조금씩 역전의 싹이 트기 시작한다. . 그 후엔 별장에 엘리자베스의 남편인 보글러 씨가 찾아온다. 알마는 그를 맞으러 나가기 전 '그가 무얼 원하는지 알아 보아야지'라며, 마치 엘리자베스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만 듣고도 그가 보글러 씨임을 알아차린 듯 행동한다. 이때 칼 헨릭과 보글러 씨 간의 관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알마의 남자인 칼 헨릭은 그 이름과 직업까지 언급되는 반면 단 한 번도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반면(오로지 알마를 통해 '청각적 정보로만' 등장), 엘리자베스의 남자인 보글러 씨는 직접적으로 등장함에도('시청각적 정보 모두로' 등장) 성이 아닌 이름이나 직업 등 그 신상에 대해서는 조금도 밝혀지지 않는다. 엘리자베스는 그 실체가 명확하나 영화 속에 (두어 번의 대사를 제외하곤) '시각적으로만' 등장하는 반면 알마는 그 실체가 흐릿하나 '시청각적 정보 모두로' 등장한다. 즉, 칼 헨릭과 보글러 씨의 관계는 엘리자베스와 알마의 관계와 대칭을 이루며 또 하나의 분리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영화가 다층적 구조를 취하는 것처럼, 영화 속 페르소나와 본질의 분리도 결코 한 가지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 여하튼 이때도 엘리자베스는 '아내', '어머니'의 역할과 그로 인한 죄의식까지 모두 대신 떠안은 페르소나 알마를 자기 대신 내세워 보글러 씨와 사랑을 나누게 한다. 알마와 보글러가 대화를 하는 동안, 엘리자베스는 그 곁에 명백히 존재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보지 않고 다만 화면을 응시할 뿐이다. 그러자 엘리자베스를 자처하던 알마는 끝내 '모든 것이 다 거짓이며 환영'이라 울부짖는다. 자신이 엘리자베스의 페르소나, 거짓이자 환영일 수밖에 없음을 온전히 깨달은 뒤의 좌절의 증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이제 알마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그녀는 엘리자베스를 마주한 채 엘리자베스가 자신을 만들어낸 원인을 읊기 시작한다. 이때 카메라는 처음에 알마의 시선 숏으로 엘리자베스의 클로즈업을 담아내면서 그 위에 알마의 음성을 들려준다. 화면을 장악한 것은 엘리자베스이고, 알마가 그 구석에 음성으로 자리한 모습이다. 이야기가 끝나자 영화는 그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들려주는데, 이번에는 45도 각도로 엘리자베스의 뒷모습과 알마의 앞모습을 비스듬이 함께 보여준다. 바로 전 숏보다 엘리자베스의 존재감은 훨씬 작아지고 대신 알마의 존재가 커진다. 결국 최종적으로 알마의 클로즈업 숏에서 이야기가 마무리되는데, 이제 그 프레임 속 세계를 시각적, 청각적으로 모두 알마가 지배하게 되는 셈이다. 그 뒤 영화는 화면을 멈추더니 알마의 얼굴 위에 두 여자의 얼굴이 반씩 나타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전에는 알마가 엘리자베스에 종속되어 있었으나 이제는 알마의 존재 위에 엘리자베스가 가면처럼 덧씌워진 꼴이다. . 다음 장면에서 알마는 다시 간호사복을 입고 등장한다. 알마는 발악 끝에 자해해 팔에 피를 내는데, 엘리자베스는 이를 두고보지 못하고 입을 대어 빤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죄를 떠안기기 위해 자신의 페르소나를 실체화한 존재 알마를 창조했으나 그 페르소나를 차마 자신에게서 온전히 떼어내지 못하는 나약한 존재이다. 남들 앞에 자신의 본질만으로 서 보일 자신이 없는 것이다. 알마를 자신의 죄를 대속할 제물로 삼기 위해서는 그 제물이 피를 흘리고 죽도록 해야 했으나 엘리자베스는 알마가 죽도록 방치할 수 없어 그 피가 흐르지 않도록 입을 갖다대고야 만다. 그러자 엘리자베스의 나약함을 목도한 알마가 엘리자베스를 구타함으로써 본질인 엘리자베스를 압도해 버린다. 이어지는 장면에서는 그들이 다시 병실 안에 있다. 알마는 간호사, 엘리자베스는 환자이다. 알마는 엘리자베스로 하여금 '아무 것도...(스웨덴어 ingenting=영어의 nothing)'라는 말을 따라하게 한다. 엘리자베스는 그 말을 따라함으로써 말 그대로 '아무 것도 아닌 존재(nothing, ingenting)'가 되어 버린다. 간호사복 자체가 알마가 페르소나로서 부여받은 역할을 상징하지만, 알마는 간호사복 차림으로 본질로서의 엘리자베스를 압도하고 아무 것도 아니게 만듦으로써 페르소나로서의 자신을 그대로 '본질화'시킨다. . 이제 알마가 잠에서 깨서 문틈으로 엿보면, 엘리자베스가 짐을 싸고 있다. 알마도 짐을 싼다. 그러나 별장을 나서서 버스에 오르는 것은 오로지 알마 뿐이다. 다만 알마가 별장을 나설 때 마치 엘리자베스의 존재를 대신하듯 프레임 안에 피를 흘리고 있는 듯한 한 여성의 두상이 들어오고 이에 초점이 맞춰진다. 아마도 이 두상은 엘렉트라의 모습을 표현한 것 같다. 엘리자베스는 페르소나를 실체화해 자신의 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나려 했으나 오히려 그에 압도당하더니, 본인 스스로가 자신의 페르소나를 닮아 있던 무대 위 페르소나인 엘렉트라, 그것도 엘렉트라를 또 한 번 모방한 이중의 페르소나로서의 조각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반면 알마는 별장을 나서기 전 거울을 보고 (이전에는 엘리자베스가 손수 앞머리를 넘겨 주었으나) 스스로 앞머리를 넘겨 이마를 까 보임으로써 본질화된 자신의 존재를 확고히 하고, 그 뒤 홀로 별장을 나서 버스에 오른다. 본질이 페르소나로, 페르소나가 본질로 완전히 뒤바뀌어 버리는 순간이다. . 한 여성이 페르소나와 본질 간의 괴리에 죄의식을 느끼고 이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페르소나를 본질로부터 분리해 실체화하고, 그 실체화된 존재는 다시 자신의 본질과 페르소나 간의 괴리에 괴로워하며 죄의식을 느끼고, 하나이자 둘인 두 인물이 각자의 죄의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온전한 본질로서 존재하기 위해 싸운 끝에 결국 페르소나에 본질이 집어삼켜져 버리는 이 비극의 근원은, '아내',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타자화된 여성성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 속에서 내부적 공간에는 오로지 여성들(엘리자베스, 알마, 그리고 이들의 상태를 파악하고 있는 담당 의사)만이 위치하고, 남성(소년, 보글러 씨, 남성 목소리 나레이션, 남성 감독 인서트 숏)은 모두 외부의 존재들로 그려지고 있다. 영화는 다층적 구조를 통해서 이 점을 더욱 명료하게 드러내고 있다. . 우선 이 영화가 구성되어 있는 그 구조를 들여다 보자. 영화는 영사기에 불이 붙고 돌기 시작하면서 시작하고, 영사기가 멈추면서 끝난다. 이 가장 테두리를 이루는 영역, 가장 바깥의 영화이자 우리가 본 이 영화 그 자체를 A라 하자. 그 뒤 일련의 장면이 지나고, 오프닝 크레딧이 시작되기 바로 이전, 잠에서 깬 소년이 책을 읽다가 스크린에서 어머니를 발견하고 스크린을 어루만지기 시작한다. 이로써 영화 속의 또 한 편의 영화의 존재가 상정된다. 그 뒤 오프닝 크레딧을 통해 비로소 이 영화 속 영화가 시작된다고 할 수 있는데, 이를 B라 하자. 이 B의 영역에서 의사의 소개로 알마가 엘리자베스와 만나게 되고, 의사가 엘리자베스를 이해한다며 별장으로 갈 것을 제안한다. 그 뒤 알마와 엘리자베스가 별장에 도착하면 난데없이 남자 목소리의 나레이션이 등장하는데, 이 나레이션은 그 이후로도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별장의 이야기가 페르소나와 본질 간의 자리바꿈으로 끝나고 알마가 별장을나서면, 이번에는 난데없이 남성 감독이 카메라 뒤에 앉아 있는 모습이 인서트 숏으로 들어온다. 영화 상에서 매우 이질적인 남성적인 신호를 통해, 그러면서도 매우 영화적인 신호(나레이션과 카메라)를 통해 별장에서의 이야기가 다른 부분과 경계를 짓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영화 속 영화 속 영화 C라 볼 수 있다.(이때 C의 시작 부분엔 남성의 청각적 신호, 끝 부분엔 남성의 시각적 신호가 등장한다는 것도 인상적이다. C에서 청각적 신호는 주로 알마가 지배하고 있다. 청각적 신호를 지배하는 존재 알마가 홀로 별장을 나서는 순간, 청각적 신호로 시작한 영화 덩어리가 시각적 신호로 끝난다는 것은, 청각 신호만을 지배하던 알마가 시각적 신호마저 온전히 지배하고 엘리자베스라는 본질을 오롯이 삼켰음을 다시 한 번 못박는 증거이다.) . 이때 남성인 소년과 보글러 씨가 각각 외부의 영화로부터 내부의 영화를 바라보는 관객으로 등장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C에서 보글러 씨는 별장 밖에서 엘리자베스의 이름을 호명하며 등장한다. C라는 영화가 별장과 그 주변 공간에 머물고 있음을 고려할 때, 그 공간은 사실상 C라는 영화가 상영되는 극장이나 다름없는 셈이며, 보글러 씨는 B라는 외부의 영역에서 극장으로 들어서듯 C의 영역에 문을 두드리는 존재이다. 소년은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A의 영역에서 스크린을 어루만지며 B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존재이자, B라는 영화의 관객이다. 한 편, C의 관객인 보글러 씨와 B의 관객인 소년은 모두 엘리자베스에게 있어 남편과 아들로서 아내와 어머니의 역할을 떠안기는 존재이기도 하다. 즉, 영화는 구조를 나눔으로써 남성과 여성을 외부의 억압하는 존재와 내부의 억압되는 존재로 더욱 확실히, 반복적으로 나누어 보이는 것이다. . (리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