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진영
3.5

청춘 돼지는 꿈꾸는 소녀의 꿈을 꾸지 않는다
영화 ・ 2019
평균 4.3
제목의 길이를 보고 관심이 갔다. 다른 정보는 하나도 없이 오직 제목만 보고 영화를 보기로 결정. 원래 눈이 주먹만한 캐릭터가 나오는, 특히나 여자 주인공의 자리를 놓고 그 캐릭터들이 다투는 내용(찾아 보니 이걸 '히로인 쟁탈전'이라고 따로 부르는 것 같다)의 이야기는 선호하지 않는 편이다. 근데 이건 제목으로 내용을 가늠하기는커녕 제목 자체도 이해가 가지 않아서 궁금했다. 게다가 양옆으로 함께 뜨는 영화를 보니 시리즈인 것 같았다. 많은 시리즈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리고 평점과 리뷰가 꽤 괜찮은 것으로 보아 어쩌면 이건 내가 보지 못했던 원석 같은 영화가 아닐까! 내가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들은 영화 속에서 전부 설명해주겠지 :D 라고 생각했지만 내가 제일 궁금했던 '청춘 돼지'라는 부분을 제대로 설명해주는 부분은 없었다. ...? 뭔가... 영화 채널에서 시작한 지 한참된 영화를 중간부터 보는 기분이었다. 캐릭터간의 대사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 뜻한 '청춘을 허송세월 낭비하는 돼지 같은 사람' 정도인 것 같다. 사실 이게 맞는지도 모르겠고, 최소한 이 영화에서는 그렇게 중요한 부분도 아닌 것 같았다. 그냥 '바보'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갔다. 덧, 나중에 찾아보니까 해당 제목은 많이 순화된 거라고 한다. 원래는 돼지새끼 정도의 심한 욕설이라고 한다. 영화는 크게 주인공 사쿠타, 주인공의 현재 연인 마이, 그리고 정체모를 쇼코라는 아이/어른 세 사람의 이야기(어쩌면 네 사람의 이야기라고 해야 맞는 건가, 라고 적고 있었는데 생각해보니까 다섯 사람의 이야기라고 해야 하나 싶다). 이야기라고만 단순하게 말하기에는 굉장히 심오한 사건과 작용들이 녹아있지만 아무튼 세 사람이 주된 등장인물이다. 외에는 위의 사진에 머리 질끈 묶은 후타바 리오라는 캐릭터가 친구이자 조력자도 등장한다. 전형적인 사회성 결여 너드 캐릭터로 등장하고, 나로서는 전혀 이해하지 못할 뻔했던 주요 작용들에 대해 실마리를 흘려주는 캐릭터였다. 물론 친절하지는 않아서 그나마도 그런 기미가 있다, 라고 추측할 정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1. 일본 애니메이션 특유의 막무가내 판타지 감성이 정말 낭낭하다. <썸머워즈>에서도 여자주인공 나츠키가 남자주인공 겐지에게 '아르바이트'를 부탁한다며 본가로 초대한다. 알고 보니 그 아르바이트는 애인대행 아르바이트. 뒤늦게 사실을 깨달은 겐지가 당황하고 거절하지만, 꽤나 막무가내로 밀어붙인다. 심지어 겐지는 나츠키를 어느 정도 좋아하는 상태. 이런 막무가내가 또 어딨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에게 애인 역할을 해달라고 부탁'하는 판타지가 또 어딨어.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에서는 여자주인공 사쿠라가 남자주인공 하루키에게 꽤나 적극적이고 꾸준하게 들이댄다. 심지어는 함께 여행을 가서 혼숙을 강요할 정도로 들이댄다. 사쿠라가 하루키에게 마음이 있었던 것도 있겠지만, 표면적으로는 사쿠라의 버킷리스트를 실행하기 위함이었다. 이런 막무가내가 또 있네. 이처럼 주변에서 흔히 일어날 수 없는, 정말 누군가의 판타지에 가까운 일들을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라고 강제한다. <청춘 돼지는 꿈꾸는 소녀의 꿈을 꾸지 않는다>에서도 냅다 '동거'를 요구한다. 보는 사람은 둘이 무슨 관계인지 모르는데 냅다 동거니 마니 하고, 그 상황에 놓인 남자주인공 사쿠타는 작게 동요할 뿐이다. 심지어 주인공 사쿠타에게는 현재 연인 마이가 있음에도, 성인 쇼코는 막무가내로 며칠 머무르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도의적인 차원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아니고, '사쿠타를 좋아한다'라는 폭탄 발언까지 하면서 막무가내로 밀어붙인다. 결국 현재 연인 마이가 함께 머문다는 것을 조건으로 허락하면서 영화가 진행된다. 이후 쇼코가 종종 선을 넘는데(모닝키스를 해주겠다느니 데이트를 하자느니), 최소한 당장은 공감할 수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아무튼 이 장면을 전후로 하여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분명히 같은 이름을 쓰고, 외향도 비슷한데 나이가 다른 두 인물이 등장한다. 성인 쇼코와 아이 쇼코. 그리고 사쿠타는 이 두 명을 모두 알고 지내는 것 같으며 크리피한 상황이 분명함에도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는다. 복제인간? 타임슬립?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영화를 보게 되는데, 이런 가능성들 때문인지 현실 인물들로 구성했다면 기함을 토할 만한 해프닝에 크게 집착하지 않을 수 있었다. 2. 복선, 그러니까 떡밥을 정말 무진장 뿌린다. 근데 친절하지도 않다. 앞서 말한 성인 쇼코와 아이 쇼코로 시작해서, 사춘기 증후군, 사쿠타 가슴의 상처, 슈뢰딩거의 고양이와 관측, 의미심장한 구원과 희생, 미래와 현재와 과거, 양자역학 등 넓은 범위에 걸쳐 다양한 떡밥이 등장한다. 원작을 모르거나 배경지식이 전무한 사람들에게는 어쩌라는 거지 싶을 정도로 불친절하다. 설명이 전혀 없다. 사춘기 증후군이라는 현상은 꽤나 중요한 현상 같고, 영화 안에서는 아는 인물들만 아는 현상으로 보인다. 일종의 병이나 증상 같은데 주인공 사쿠타는 이를 앓고 있거나 앓아 본 적이 있는 것 같고, 그의 친구인 후타바 역시 해당 증상에 대해 알고 있는 것 같다. 후타바가 명석한 캐릭터라는 점, 그리고 양자역학 등 과학 개념에 대해 빠삭한 것으로 보아 사춘기 증후군의 몇몇 현상들은 과학적으로 어느 정도 설명이 되는 현상들인 것 같다. 최소한 그렇게 묘사하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덧, 이미 현실성과는 거리가 먼데 굳이 그렇게까지 노력을 해야 하나 싶고, 근데 또 한편으로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너무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될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원작의 사춘기 증후군에 대해서는 하낫-또 모르기 때문에 그냥 모든 것을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영화 보면서 세운 가설 + 검색으로 찾아본 결과로 정리하면 '내적인 고뇌나 고통이 극심한 나머지 강렬한 소망이 생기면 발현하는 증상' 정도인 것 같다. 이를테면 모두가 날 알아보는 것에 대한 환멸을 느끼고 있는 캐릭터가 아무도 날 몰라봤으면 좋겠다는 강렬한 소망을 갖게 된다면 누구에게도 인식되지 않는, 그러니까 존재가 아예 사라져버리는 증후군을 앓게 된다. 한편 시한부 판정을 받은 캐릭터가 시한부라서 꿈꿀 수 없는 미래를 강렬하게 꿈꾼다면 미래에 도달해버리는 증후군을 앓게 된다. 인터넷에는 상대성 이론이니 뭐니 추가 설명이 덧붙는데 나는 이래저래 죄송한 문과라서 잘 모르겠다. 영화 볼 때도 문송해야 하는 거야...? 이 영화가 라이트노벨 원작으로 했다는 걸 몰랐고, 이런 판타지 요소가 있다는 걸 몰랐기 때문에 설명을 잃으면서 좀 벙쪘었다. 이런 요소들을 포함해서 인물 간의 의미심장한 대사나 눈빛들, 아무튼 이래저래 떡밥은 많은 것 같았다. 보는 사람이 알아듣지는 못하더라도. 3. 특이한 설정 + 보편적인 감정 그럼에도 이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난 뒤에 마냥 부정적으로만 생각할 수 없는 것은 떡밥이니 인물의 대사나 감정 따위를 꽤 능숙하게 한 줄에 꿰어 펼쳐보인다는 점이다. 자세한 원리나 현상에 대해서 설명하는 대신에 그 현상에 노출된 인물들에게 집중한다. 배경지식이 있든 없든 이 영화 자체에만 집중하게끔 만드는 꽤 영리한 방법이었고, 몰입할 수 없을 것 같았더 캐릭터들에게 이입할 수 있게끔 하는 방법이었다. 약간 떨떠름한 표정으로 영화를 보던 나도 중후반부의 딜레마에는 주인공과 함께 고민했다. 심지어 끝날 즈음 콧날이 시큰해지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특수한, 그리고 불친절한 설명으로 시작했음에도 보편적인 갈등과 감정을 묘사하는 데에 충분한 시간을 들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다. 그렇게 캐릭터의 감정을 오롯이 보여주기 위한 긴 호흡의 장면들이 꽤 있었음에도 지루하지 않았다. 오히려 쓸데없는 설명을 하지 않아서 속도감 있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영화 자체가 특정 날짜들을 기준으로 전환되는 장면들이 많았어서, 더더욱 그렇게 느껴졌던 것 같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슬리는 건 여전히 존재한다. 시리즈에 설명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이 영화 안에서는 너무 얼레벌레 넘어간 게 꽤 있다. 그토록 오랫동안 앓았고, 절망적인 상황을 연출했으면서 갑자기 기증자는 어디서 나왔을까. 기어코 해피엔딩을 위해 아득바득 기어가는 느낌이었다. 토끼탈 쿠타와 비교한다면 성인 쇼코는 그냥 신기루 같은 인물인가. 여러 가지 의문점이 남는데, 굳이 더 깊게 파고 들 정도로 흥미가 가지는 않았다. :D 마무리 즈음에는 기억 속에 남아있는 여러 타임슬립 영화들이 떠오른다. 대부분의 타임슬립에는 주의사항이 뒤따르는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뻔한 사항들이 이 영화에도 녹아있다. 조금 고차원적으로...? <백 투 더 퓨쳐>의 무도회장이나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에서 헤르미온느가 사용하던 타임 터너와 그 주의사항. <엑스맨 :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의 몇몇 장면들(뜬금없지만 엑스맨 시리즈 중에 가장 수작이라고 생각합니다 :D). 특히나! 니콜라스 케이지 주연 영화 <넥스트>가 떠오른다. 누구는 깔끔하다며 칭찬할, 누구는 더럽게 허무하다고 욕할 만한 엔딩 구조였다. 그래도 이정도면 나는 만족했다. 한 편을 보고 나니까 다른 시리즈가 궁금하기는 하지만 굳이 막 찾아서 보고 싶을 정도는 아닌, 약간 일본 영화 특유의 그 감성 채우기는 딱 좋은 영화. 난해할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훨씬 정직한 내용의 정직한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