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환

홀리 모터스
평균 3.7
“결국은 내가 아닌 타인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이유. 움직이는 것만이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가 되어버린 세상. 관객마저 죽어버린 이 세상에서 간절하게 살아가고 싶은 우리들의 영화.” 말하고자 하는 주제던, 줄거리던 하나로 통일되기 마련인 숱한 영화들 속에 여기 한 편의 영화가 있었다. 감히 생각해 보건대 10여 년 만에 새로운 영화로 찾아온 이 감독에게는 그동안 느낀 것들과 생각들이 너무도 많이 있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영화가 지닌 또 다른 역할 중 하나가 자전적인 것이라면, 가령 예를 들어 그동안 밀린 나의 일기장을 한 번에 쓰자니 쓸 내용이 너무도 많은 것처럼. 때문에 나는 당신이 무엇을 얘기하고 싶은지 쉽게 알 수도 없을뿐더러, 당신은 우리를 이해시켜 줄 마음조차 없어보였다. 하지만 보고 또 보며 느끼는 감정은 이유모를 슬픔이었다. 그 슬픔의 근원은 당신의 사적인 이유였을 지는 모르겠지만, 슬픔이라는 감정만큼은 보편적이기에 이해조차 가지 않는 그 감정에 우습게도 나는 공감을 했다. 당신은 과연 그동안 어떤 생각을 했을까. 벽을 넘어 상영 중인 영화관 속 죽은 것 마냥 잠들어버린 관객들을 보며 한탄하고 있었을까. 모션 캡처와 같이 점차 빠르게 발전, 아니 변하고 있는 영화계를 보며 어딘가 조급해지진 않았을까. 힘없이, 결국 아무것도 못한 채 죽어가는 것들을 보며 살고 싶다며 삶과 죽음에 아등바등 거리진 않았을까. 슬픔이 가득했다. 어쩌면 이 영화는 영화를 보고 느낄 감정들에 대한 의문과 이유들을 제시하기 보다는 그 감정 자체를 오롯이 느끼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것 때문에 슬퍼.’라기보단 ‘지금 내가 느끼는 슬픈 감정을 당신들과 함께 느끼고 싶다’라는 쪽에 무게를 두고 싶다. 정말 당신이 원한 의도이건 아니건, 지금 당신이 기쁘던 슬프던, 나는 당신의 영화를 보면서 이유 없이 슬펐다. 정말 아플 때, 아픈 이유를 말하기보단 누군가 나의 감정에 공감해주길 기다리는 나라서 그렇게 느꼈을 지도. 사회에 나가기도 전, 어릴 적부터 몸에 배어 온 가면들. 내가 아닌 오로지 타인을 위해 쓸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가면들과 내 뜻과는 달리 변해가는 세상에 내가 정말 하고 싶어 했던, 하기 싫어했던 것들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들에 대하여 고개를 숙였던 많은 날들. 저마다의 시간과 속도가 있거늘, 의지와 상관없이 뛰기 바빴던 우리들. 움직이지 않으면 뒤처지고, 뒤처지며 서서히 죽어가는 우리의 꿈들. 이 세상에서 숱하게 흘렸던 눈물들. 나만이 느끼지 않았을 슬픔들. 그 슬픔에 격하게 반응했던 영화였다. 영화라는 것이, 특히나 이렇게 사적으로 여겨지는 이 영화에게 바라는 건 애초부터 내 이야기를 들어달라는 의도보다는 지금 슬픔을 느끼는 모든 이들에게 당신만의 영화가 되어주겠다며 건네는 하나의 위로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나에겐 결국은 내가 아닌 타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 움직이는 것만이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가 되어버린 세상. 관객마저 죽어버린 세상에서 간절하게 살아가고 싶은 우리들의 영화였다. 나는 감독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전혀 모르기에 해석을 하며 뜻을 풀어내겠다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였다. 그저 당신이 만든 이 영화를 보며 죽은 관객만큼은 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나의 슬픔에 곁들여 어느새 나의 영화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