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너무나도 뚜렷한 '상'과 '하'의 계급구조보다 우릴 더 무력하게 만드는 것은 '하'와 '최하'의 공생불가능- . . (스포일러) 기우처럼 대학진학에 실패한 것도 아니고 유복함과는 거리가 멀더라도 반지하에 살만큼 형편이 궁핍하지는 않음에도 내게 영화<기생충>은 그 어떤 봉준호 감독의 영화들보다도 강한 무기력함과 불편함을 가져다주었다. 단지 현 시대의 계급과 자본의 매커니즘을 다루었기에 느껴지는 당연한 불편함이라 치부하기엔 그 불편함의 수치가 말 그대로 피부에 와닿을 정도로 높다고 느껴졌기에, 영화의 힘을 다소 과소평가하는 나의 시각에선 개인적으로 조금 놀라운 부분까지 있었다. 봉준호 감독 특유의 웃음 뒤에 숨겨져 있는 비수와도 같은 씁쓸함이 이번엔 유독 더 쓰라렸던 이유는 무엇일까. . 전원백수 가족의 장남인 기우(최우식)가 상류층 저택에 고액 과외 면접을 보러 간다는 영화의 기본 시놉시스는 우리로 하여금 본 영화는 (자본의 원리가 규정한)‘상’과 ‘하’의 계급적 충돌, 내지는 (제목으로 좀 더 유추해 보면) ‘하’가 ‘상’을 갉아먹는 이야기일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허나 영화의 오프닝은 우리가 으레 예상하고 기대해온 그러한 내용이 어쩌면 아닐지도 모름을 방증하는 것만 같다. 영화의 첫 숏에서, 기우네 가족의 거처가 반지하라는 것을 구태여 확인시켜주는 것만 같이 지상에 머무르던 카메라가 수직으로 하강하고 나면 우리는 와이파이 접속에 실패하는 기우의 모습을 확인한다. 곧바로 이어지는 기택(송강호)이 바퀴벌레를 쫒아내는 장면과 기정(박소담)과 기우가 피자집 알바를 험담하며 은근슬쩍 구직을 도모하는 장면은 그 자체로 와이파이와 관련된 오프닝 에피소드의 연장선상이다. 지상에 거주하는 가족들은 그 밑의 반지하의 가족들에게 도움을 차단하고, 반지하의 가족들은 애꿎은 지상의 알바생을 내쫓으며 본인들이 그 자리를 대체하려 하는 이러한 영화의 오프닝은 사실 본 영화의 내용이 ‘상’과 ‘하’의 계급적 혈전이 아닌 그 아래 계급들 간의 치열한 암투에 더 가까움을 은연중에 슥 내보인다. . (오프닝에서 이미 드러난 것처럼)영화 전체를 작동시키는 원리는 양자의 이득과 손해의 합이 0을 이룬다는 제로섬게임이다. 본 영화에서, 누군가의 이득은 필히 또 다른 누군가의 손해를 전제로 한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누군가의 이득만큼. 기택의 가족이 박사장내 저택으로 하나 둘 침투하는 과정은 뒤집어 생각하면 이미 저택 내에 자리 잡은 인물들을 하나 둘 쫒아내는 과정이다.(여기서 흥미로운 건, 기택의 4인 식구 중에서 기정만 누군가를 대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른 3명의 가족이 스스로 이득과 손실을 파생시키며 저택에 침투한 것과 다르게 기정은 스스로 이득만 본 셈이니 어쩌면 결말부에 기정이 죽게 되는 건 제로섬게임의 원칙에 따른 필연적 결과였을까?) 따라서 우리는 문광(이정은)이 저택에서 쫓겨나게 되는 영화의 시퀀스를 그 경쾌한 리듬에도 불구하고 그저 웃으며 바라볼 수는 없다. 후에 문광이 길거리에서 쫓겨나는 장면이 덧붙여지면 우리의 씁쓸함은 배가됨과 동시에 기택의 가족에 대한 우리의 몰입이 윤리적으로 올바르긴 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까지 추가된다.(당연히 우리는 영화가 끝날 때 까지 기택네에게 몰입하게 되고 그들의 편에 서게 되나, 엄밀히 영화 속 인물들의 잘잘못을 전부 따져봤을 시, 그건 윤리적으로 꽤나 위험하다고 봐도 무방할 만큼의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허나 기택의 가족은 본인들의 이득으로 파생된 다른 이들의 손해를 걱정하지 않는다. 그저 기정이 쫓아낸 기사는 지금 쯤 뭐하고 있을지를 가볍게 농담처럼 내뱉을 뿐이다. 그러던 찰나에 이들에게 본인들이 낳은 누군가의 비극을 상기시켜줄 문광이 갑작스럽게 등장한다. 번쩍하는 번개에 이어 영화의 전개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치닫고 지상과 반지하의 대결로 시작한 영화는 반지하와 지하의 암투극으로 변모한다. . 미처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공간과 인물의 등장에 대해 영화는 끝없는 추락과 하강의 프레임으로 일관한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감독의 전작인 <설국열차>가 수평의 계급적 투쟁기였다면 <기생충>은 유사한 이야기를 수직으로 구현한다. 그리고 계급을 다룬 수많은 영화들이 그랬던 것처럼 <기생충>역시 계급에 관한 이 수직의 구도를 상승과 하강, 더 구체적으로는 계단으로 형상화한다. 예컨대 박사장(이선균)의 집으로 가는 동안, 기우는 끊임없이 어딘가를 올라가야하고, 반대로 근세의 거주지인 지하로 가기위해선 계단을 통해 끝없이 밑으로 내려가야만 한다. 허나 계단은 이들의 계급적 높낮이를 상기시키기도 하지만 상승에 대한 기택네의 욕망이 내포되어 있기도 하며 또 자의에 따라 오르고 내릴 수 있기에 계급의 측면에서 나름 고무적으로 보일 여지 또한 존재한다. 하지만 영화는 여기에 물의 속성을 대입해 이들의 희망이나 의지를 무력화시킨다. 물의 속성을 하나로 단정 짓기는 힘들겠지만 물은 기본적으로 위에서 아래로 흐르며 역류가 불가능하다. 이러한 물의 비가역적인 성질은 극중 기택네의 계급적 상황을 묘하게 암시하는 맥락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영화는 기택네의 가족이 계급적으로 가장 상승했을 때의 모습을 기정이 고급의 물을 마시며 목욕을 하는 장면으로 대체하고, 반대로 가장 계급적으로 하강했을 때의 모습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폭우에 쩔쩔매는 이들의 힘겨움으로 대체한다. 물론 이때는 계단역시 상승의 욕구대신 하강의 강요로서 기능한다.(영화는 끝없이 계단을 내려가는 기택과 기정, 그리고 기우의 모습을 의도적으로 오랫동안 전시한다.) 구직에 실패했을 때엔 술에 취한 행인에게 꼼짝도 못했던 것과는 다르게 본인들의 계급적 상승을 처음 자축할 때가 돼서야 마침내 노상 방뇨하는 행인을 물로 쫓아내는 것 또한 그 연장선상에서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과한 해석일지도 모르겠다만 소변 또한 체내에 존재하는 수분의 일환으로 바라본다면 그들에게 물을 뿜어대는 만취한 행인의 행동 역시 반지하에 대한 지상인의 공격, 즉 영화를 이끌어가는 주된 모티브 중 하나인 아래계급들 간의 실랑이로 읽어볼 법 한 여지가 있다.) 극중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물이라곤 변기에서 역류하는 오물 뿐이다. 기택의 가족은 계급적 상승을 위해 열심히 계단을 오르내리며 분투해보지만 영화는 되려 이들을 오물로 치환해버리며 이들을 처연하게 만든다. 그렇게 <기생충>은 계단의 희망을 물의 속성으로 잠재워 버린다. . 영화는 폭우로 인해 체육관으로 피신한 기택의 가족의 처량함을 계속 이어나간다. 그날 저녁 기택은 아들 기우에게 최고의 계획은 무계획이란 괴상한 논리를 설파한다. 허나 그 괴이한 논리를 그저 괴상하다고만 치부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미 눈을 감았음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손으로 본인의 눈을 가리며 정말 아무것도 보지 않겠다. 라는 기택의 행동엔 오로지 무기력한 의지만이 오롯하다.(기택이 처음 손으로 눈을 가리는 순간은 박사장네 탁자 밑에 숨어 박사장 부부가 내는 민망한 소리와 본인에 대한 모독을 마지못해 들어야하는 순간이다. 기택은 피할 수 없는 인생의 고난이 찾아올 때마다 아무것도 보지 않으리란 의지를 표하며 본인의 무기력함을 스스로 반증하는 것으로 보인다.) 허나 정말 뜬금없게도 그러한 기택의 무력감은 분노로 전환되며 결국엔 우발적 살인의 계기가 된다. 여기서 영화가 초반부터 쌓아온 기택의 모멘트를 재구성 해보려한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사건의 발단은 텍스트 바깥에 존재하는 인물의 뜬금없는 대사로 비롯된 것 같다. 영화의 초반부에, 기택의 가족이 부업으로 삼는 일에 문제가 생기자 사장은 넷 중에 하나는 불량인 것이라 비아냥거리며 이들을 면박한다. 분명 대사는 누군가를 특정적으로 지목하진 않지만 이때의 카메라의 포커스는 기택에게로 향하며 그의 자격지심을 자극한다. 기택이 박사장의 차를 운행하는 후의 장면에서, 그는 기분이 너무 좋은 나머지 박사장의 사생활에 대해 논하다 조금 선을 넘게 되고 박사장에게 다시 앞을 보고 운전하라는 면박을 받게 된다. 기택의 자존심이 긁히는 순간이며 동시에 영화가 기택의 모멘트를 사소한 방식으로 추가하는 두 번째 순간이다. 위에서 언급한 대목들이 사소한 순간들이었다면, 기택이 캠핑을 간 박사장내 집에 몰래 침입한 이후에 쌓이는 모멘트들은 대단히 막중하다.(사실 그 이전에 문광을 쫓아내는 시퀀스의 말미에서 연교(조여정)가 악수를 위해 내민 기택의 손을 꺼림칙하게 쳐다보는 순간을 결정적 모멘트의 첫 순간이라 봐도 무방하다.) 먼저, 여기서도 시작은 사소하다. 캠핑을 간 박사장네 빈집에서 술을 마시며 기택은 박사장과 연교에 대해 넉넉한 벌이와 훌륭한 성품을 두루 갖춘 인물들이라 평하며 그들을 칭찬한다. 이에 충숙(장혜진)은 그들이 착한 이유는 그들이 부자이기 때문이라는 다소 이상한 논리를 펼치며 대답한다. . ‘부’와 훌륭한 성품을 연결시키는 충숙의 논리는 개개인의 특성을 그 개개인이 속한 계급의 특성으로 돌려 생각해버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 언뜻 보면 오류투성이의 논리처럼 보이지만 핵심은 기택을 제외한 나머지 가족들이 모두 충숙의 논리대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폭우를 맞으며 만약 민혁이였다면 어땠을까 라고 묻는 기우의 말에 기정은 민혁이에겐 이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다며 강하게 내쏜다. 말하자면 자신들의 수난을 자신들의 계급의 문제로 여기는 방식이다. 기우 또한 별반 다르지 않다. 모든 일이 종결되고 뇌수술을 받은 뒤에 그는 의사 같지 않은 의사와 경찰 같지 않은 경찰이 본인 앞에 서있었다고 서술한다. 기우 역시 개개인의 특성을 부정하며 머릿속에 확고하게 지정된 본인만의 특정 계급에 대한 인물상이나 사회적 지위의 상이 존재한다. 하지만 기택은 그러한 충숙의 논리에 동의하지 못한다. 그는 밑의 계급은 무식하고 천하며 부당한 일을 겪어야하고 위의 계급은 고결하고 하층 계급과 모든 면에서 반대일 것이라 단정 짓는 1차원적인 계급론에 반대한다.("아내를 사랑하시죠?" 라고 묻는 그의 말엔 너나나나 결국엔 한 가정의 가장이지 않느냐라는 동등함을 주장하는 뉘앙스가 서려있다.) 기택이 충숙의 말에 동의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후에 본인을 바퀴벌레에 비유하는 충숙의 말에 크게 분개한 이유다.(영화는 해당 장면을 기택의 장난처럼 묘사했지만 웃음으로 상황을 무마하기 이전에 그의 뒷모습을 보여주며 진짜 감정을 괄호 친 것으로 보아 이는 기택이 정서적으로 크게 타격받은 장면의 일환으로 봐도 무방할 것 같다. ) 하지만 씁쓸하게도 영화를 보고 있으면 작금의 세상은 그 어이없게 들리는 충숙의 말이 오히려 더 그럴듯한 것 같다. 기택은 박사장네 집에서 술을 마실 땐 비오는 밖을 바라보며 운치에 감탄하지만 동일한 폭우에 잠겨버리는 본인의 원래 거주지로 돌아옴으로서 개인의 잘잘못이 아닌 개인이 어찌할 도리가 없게끔 계급이 단호히 결정지어버리는 비정한 결과론을 몸소 체감한다. 이전에 기정을 향해 정말 여기 사는 사람 같다고 말하는 기우의 대사가 이 이상한 논리에 그럴듯함을 더한다. (여담으로 후에 박사장이 갑작스레 들이 닥칠 때 기우가 정말 바퀴벌레처럼 네 발로 기어 도망가는 장면은 참으로 웃긴 동시에 씁쓸할 따름이다.) . 박사장 또한 충숙과 유사한 논리를 펼치며 기택의 분노를 쌓는다. 기택에게 지하철 타는 사람들의 냄새가 난다며 뒷담화아닌 뒷담화를 하는 박사장의 말에는 기택이 싫어하는 개인을 계급으로 묶어버리며 비판하는 논조와 인간적으로 가장 수치스러울 만한 폭언이 모두 담겨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 순간 탁자 밑에 숨어 자식들이 있는 앞에서 그 말을 그저 듣고 있을 수밖에 없는 기택의 무력감은 대폭 증가한다. 마침내 파국이 발생하는 당일에, 영화는 가혹할 정도로 기택을 공격한다. 그가 아들에게 계획의 무용함에 대해 주장하던 전날 밤에 이어 다음날 날이 밝자 그는 연교의 부름에 곧장 달려간다. 연교가 속칭 번개모임이라 일컫는 약속은 미리 계획되어 있지 않고 급하게 잡힌 모임을 뜻한다. 계획이 의미 없는 자는 계획이 필요 없는 자의 분부를 받들며 더더욱 무력해진다. 마트에서 카트를 끌며 마치 하인처럼 연교를 뒤 따르는 것에 이어 차에서 연교가 기택의 가족에겐 끔찍하기 그지없었던 비에 대해 감사함을 표하며 그의 냄새에 혐오하는 태도를 취할 때, 비로소 기택의 무력감은 분노가 된다. 이렇게 연쇄적으로 그의 모멘트가 쌓인 와중에 박사장이 그에게 거듭 계급적 박탈감을 주며 또다시 냄새와 관련된 그의 수치심을 자극했으니 더 이상 기택의 우발적 살인에는 별다른 부가설명이 필요가 없어진다.(여기에 칼에 찔린 기정을 두고 제 살길만을 찾아 도망가는 주변 인물들의 모습은 하층의 고통에 무감한 상층이란 주제를 더 공고히 하며 이야기 내적으로는 기택의 분노에 더더욱 열을 가한다. 다른 요소들을 다 차치하고, 무력이란 감정을 환멸의 감정으로 탈바꿈시키며 클라이맥스에 종지부를 찍는 송강호의 클로즈업은 그 자체로 영화의 개연성역을 톡톡히 수행하였다 봐도 손색이 없다.(정말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던 연기였다.)) 분명 기택의 살인을 정당화 할 수는 없다. 허나 이러한 기택의 극단적 행위와 그 전까지의 과정들은 상류층의 악의 없는 행동들이 어떻게 하류층의 수치심을 팽창시키는지를 환기하며, 동시에 계급과 사회적 차별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둔감한지, 혹은 민감한지를 판가름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로 읽어도 좋을 법만큼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남다르다. (근세와 문광을 포함한 모든 하층계급은 상층계급을 절대적으로 숭배하고 반대로 상층계급은 아래계급을 철저히 내리 깔본다. 그 가운데, 개인은 계급이 아닌 개인으로 바라봐야한다는 지당한 생각을 가진 인물이 비인간적 행위의 주체가 돼버리는 영화의 서사는 인지상정의 마음이 더는 통용되지 않고 다수의 비정상으로 인해 소수의 정상이 비정상으로 내몰리고 있는 현 사회의 축약본이 아닐까? 뭣보다도, 기택이 그리도 강조한 무계획의 산물이 결국에 우발적 살인으로 구현된 것이 가장 가슴 아픈 대목이다. 분명 박사장은 죽을만한 짓을 하지 않았고 결정적 잘못을 한건 기택이지만 이상하게 기택에게 더 마음이 가는 건 묘한 감정적, 윤리적, 더 나아가 계급적 아이러니로 다가온다.) . 기택의 살인은 영화의 서사적으로나 주제적으로나 상당히 중요한 행위로 보인다. <기생충>은 얼핏 보기에 ‘상’과 ‘하’ 양자사이의 암투처럼 보였지만 실은 서로 ‘하’를 독점하려 드는 ‘하’와 ‘최하’의 비열한 주먹다짐에 가까웠다. 이러한 영화의 구조에서 박사장에 대한 기택의 공격은 ‘상’에 대한 ‘하’의 유일한 공격으로 기록된다. 아마 대부분의 관객이 박사장의 삶 보다는 상대적으로 기택의 가족에 가까운 삶을 살고 있을 것이고 또한 영화가 기택의 가족을 필두로 진행되기에 기택의 살인은 관객에게 상당한 당혹감을 선사하긴 하지만 동시에 일말의 카타르시스를 안겨줄 여지 또한 다분하다. 허나 이런 순간의 해소감이 기택을 궁극적으로 이끄는 것은 지하의 자리다. 기택은 본인의 우발적 행위로 인해 ‘하’의 자리에서 ‘최하’의 자리로 처박히게 됐고 이는 ‘상’에 대한 ‘하’의 공격은 한낱 객기에 지나지 않을 뿐임을 그대로 방증하는 꼴이다. 기택이 근세가 담당해온 최하의 자리를 대체한 것에 이어 박사장의 집 또한 누군가에게 팔리면서 단지 대상이 바뀌었을 뿐 결국에 ‘최하’가 ‘상’에게 기생하는 체제는 보란 듯이 되풀이된다. . 사실 기택이 박사장을 공격하기 이전에도 ‘상’에 대한 아래계급의 작용은 존재했다. 그 작용에 해당하는 것은 공격이 아닌 도움의 요청이었다. 영화의 계급 상에서 최하단에 위치하는 근세는 박사장에게 몸소 존경을 표하며 동시에 모르스부호를 알지도 모르는 다송에게 구조를 요청한다. 허나 다송은 근세가 이마에 피를 흘려가면서까지 온몸으로 간절히 보내는 구원의 신호를 해석해내지 못한다. 해석에 어려움을 겪자 곧바로 잠을 청하는 아이의 모습은 ‘최하’의 고통에 대한 ‘상’의 무심함과 좀처럼 소통이 불가하며 좁혀지지 않는 양 계급간의 간극을 동반한다.(후에 유사한 계급인 기택과 기우는 동일한 방식으로 소통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 영화는 사실 훨씬 전부터 양계급간의 넓은 간극을 여러 차례 보여준 바가 있다. 기정이 처음 저택에 들어왔을 때, 모든 내막을 아는 기정 기우의 상태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연교 다혜의 상태는 서로 정보의 비대칭을 이루며 그 연장선상에서 기정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는 다혜의 표정은 우리에게 기정의 정체가 탄로 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자아낸다. 허나 이어지는 씬에서 드러나다시피 다혜의 의미심장한 표정에 담겨있던 건 기정의 정체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가 아니라 사춘기 나이 특유의 치기어린 질투심이었다. 자신들에 위협을 가하는 자들의 존재를 인지조차 하지 못하는 다혜의 모습을 시작으로 영화는 양계급간의 틈을 점점 벌려나간다. 이어지는 장면에선 박사장이 이를 방증해 보인다. 박사장이 기정이 몰래 벗어둔 속옷자락을 미심쩍게 여기며 이에 대해 본인 생각을 연교에게 속삭이는 대사는 순간 무음으로 처리되며 우리에게 이전과 비슷한 유형의 긴장감을 일시적으로 불러일으킨다. 허나 우리는 곧이어 박사장 역시 한참을 잘못짚고 있음을 마약과 관련된 연교의 대사에서 재차 확인한다. 박사장이 연교의 귀에 속삭이기 직전에, 카메라는 의도적으로 후에 공개될 무시무시한 어둠의 지하를 포커싱한다. 진짜 위험은 본인들의 코앞에 도사리고 있지만 박사장과 연교는 이에 대하여 철저히 무지한 것이다. 이처럼 박사장네 가족은 본인들을 은근슬쩍 갉아먹는 ‘하’의 인물들의 의중을 모를 뿐더러 ‘최하’에 속하는 인물들에 대해선 그 존재의 유무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양계급간의 간극이 명확해지는 순간이다.(우리가 으레 봐오던 악한 상류층과 선한 하류층이 아닌 부주의한 상류층과 비겁한 하류층으로 양계급간의 격차가 묘사되는 대목들이 있다는 측면에서 영화는 꽤나 비범하게 느껴진다.) 이후에도 영화는 하류층의 얍삽함에 부주의하게 처사하는 상류층의 모습으로 영화의 텐션을 유지한다. 앞전 문장을 역으로 해석해도 좋다. 몰래 숨어있는 가족들이 걸릴 듯 말 듯 긴장감이 팽팽한 중반부의 시퀀스에서, 기택의 가족들은 죄다 상류층의 발밑으로 피난하며(가령 기정이 숨은 탁자 밑이나 기우가 숨은 침대 밑)우리에게 계급적 차이를 재차 환기한다. 그리고 박사장네 가족들은 여전히 이들의 존재조차 눈치 채지 못한다. 이밖에도,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서로 명확한 소통이 불가한 첫 만남에서의 기택과 박사장의 모습처럼 계급 차에 관한 유사한 맥락이 조금은 다른 형태로 구현된 사례도 있다. 마치 가량 비에 옷이라도 젖게 하듯 세세히, 그리고 세밀히, 영화는 계급적 간극을 점차 형성해왔다. . 양 계급간의 간극차이에 명확함을 더해준 다송이에 대해 조금만 더 알아보자. 그저 천진난만하고 순수하게만 보이는 다송은 실은 굉장한 모순으로 조형된 캐릭터다. 인디언 코스프레를 하는 다송의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인디언과 관련된 역사적 전례를 상기시켜 양립과 공생이 불가능한 두 계급간의 형국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다. 이런 1차원적으로 보이는 이 비유는 스쳐지나가는 듯 보이는 연교의 대사를 업으면 그 의미가 보다 더 다채로워진다. 인디언 복장을 미국에서 직구한 것이라 툭 내뱉듯 기우에게 던지는 연교의 대사는 상당히 아이러니하다. 그렇다면 결국 다송이 입고 있는 인디언 의상은 과거에 인디언을 쫓아낸 미국이 후에 상품화를 위해 모조로 생산한 옷이란 말이 아닌가. 다송의 인디언 코스프레는 진지하게 약자를 위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약자를 착취한 전례가 있는 강자의 코스프레를 이중으로 코스프레한 것으로 귀결된다. 부실해 보이는 겉과 다르게 방수의 기능까지 두루 갖춘 다송의 텐트는 그 자체의 성질로서 캐릭터와 캐릭터가 대변하는 계급의 모순적 특징을 몸소 부언해주고 있는 게 아닐까? . 결국 ‘최하’는 ‘상’에게 배반당한다. ‘상’은 여전히 ‘최하’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다는 것이 조금은 슬픈 대목이다. 더더욱 슬픈 건 영화의 클라이맥스에 진흙탕 싸움은 온전히 ‘최하’와 ‘하’의 몫이라는 것이다. 공허하기 짝이 없는 피바다 소동을 기택이 ‘상’을 공격하는 의외의 행동으로 마무리해 보지만 결과는 알다시피 참담할 뿐이다. 이러한 참극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선 ‘하’와 ‘최하’의 공생이 필수적인 덕목으로 강조되는 부분이지만 요즘의 세상엔 도통 통용되기 쉽지 않은 교훈이다. 여기에 <기생충>의 가장 큰 무력감이 있다. . +글자수 제한 때문에 후의 내용은 댓글로 대신합니다.(아무쪼록 여기까지라도 길고 부족한 글 읽어주신 분들 정말 감사드립니다ㅜ 그나저나 시험기간인데 뭐하고 있는지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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