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성혁명
3.5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 ・ 2017
평균 3.3
이 영화에는 역사에 관한 흥미로운 정의가 등장한다.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다." . 원작은 주인공인 토니의 1인칭 시점에 따라 토니의 젊은 시절을 다루는 1부에선 토니의 부정확한 기억을, 토니의 현재 시점을 다루는 2부에선 토니가 마주한 불충분한 문서를 서술한다. 반면, 영화는 토니의 현재 시점을 기준으로 플래시백을 이용해 틈틈이 과거로 돌아간다. . 역사는 국가와 사회에게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한 개인에게도 역사는 존재하며 그 역사는 기억과 기록으로 보존된다. 문제는 그 기억이 부정확하고 그 기록이 불충분하다는 지점에서 발원한다. 더해지거나 빼지고 윤색되고 편집된다. 그렇기에 한 인간의 기억은 그의 사적인 문학이라고도 말해질 수 있다. . 만남과 헤어짐에 대한 토니와 베로니카의 기억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우리 그렇게 나쁘게 헤어지진 않았잖아."가 토니의 기억이라면 "나한텐 나빴어. 기억하고 싶지 않을 만큼."은 베로니카의 기억이다. . 현재의 토니(짐 브로드벤트)는 까칠하고 괴팍하며 꽤 이기적인 인간으로 묘사된다. 반면, 젊은 시절의 토니(빌리 하울)는 똑똑하긴 했으나 열등감을 가졌고 반항적이긴 했으나 반항심을 표출하기엔 용기도 배짱도 부족한 문학청년이었다. 종잡을 수 없는 성격에 신비로움까지 내뿜는 베로니카(프레야 메이버)를 첫 눈에 사랑한다. . 여기에 아드리안(조 알윈)이 등장하는데, 그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서 싱클레어를 매료시킨 데미안과 같은 존재로 토니에게 다가온다. 전술한 역사의 정의도 역사 수업시간에 헨리 8세의 평가를 묻는 교수의 질문에 대해 아드리안이 인용한 답이었다. 토니는 그를 동경하며 동시에 질투한다. . 토니와 베로니카의 관계는 여러 이유로 끝이 난다. 계급적 차이에 대한 토니의 자격지심, 육체관계의 발전에 대한 둘의 입장 차이, 두 사람의 미래에 대한 토니의 조바심, 베로니카의 어머니, 사라(에밀리 모티머)가 무심코 내던진 의미심장한 말, 그리고 아드리안의 존재... . 베로니카와 사귄다는 아드리안의 편지를 받고 토니는 베로니카를 포기한다. 그들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내며... 아드리안이 자살했다는 소식이 그 후 토니에게 전달된다. 자살은 유일한 철학적 질문이라는 알베르트 카뮈의 말을 믿은 아드리안은 그렇게 철학적 질문을 던지고 세상을 등진다. . 사랑과 동경의 대상을 한 번에 잃은 토니는 자신의 불행한 기억을 각색하고 편집한 채 편히 살고 편히 잠드는 방법을 택한다. 그랬던 토니가 40여년의 시간이 지난 후 다시 젊은 시절의 그들에게 돌아가야 했을 때 그를 사로잡는 감정은 오히려 설렘의 호기심이었다. 그러나 다시 만난 베로니카(샬롯 램플링)가 그에게 내민 편지 앞에 토니의 윤색된 기억들은 송두리째 무너진다. . 그 편지는 바로 40여년 전, 자신이 베로니카와 아드리안에게 보낸 것. 그 내용은 저주. 두 사람의 불행을 비는. 그것도 대대손손 이어질 저주. 시간의 복수를 믿는 자의 처절한 저주... . 토니의 충격은 거기서 끝이 나지 않는다. 베로니카를 미행하는 중 발견한, 베로니카와 아드리안 사이에 태어났으리라 믿은, 정신지체를 가진 한 남자가 사실은 아드리안과 사라의 관계에서 태어난, 즉, 베로니카의 남동생이란 진실까지... . 삼각관계의 피해자는 사실 가해자였고 시간의 복수를 믿은 자의 저주는 실현됐으며 이제 시간의 복수는 토니를 향해 칼끝을 겨눌 것이다. . 영화에서 시간을 상징하는 장치로 카메라와 시계가 이용된다. 토니가 베로니카를 파티에서 처음 만난 날, 베로니카는 라이카 카메라를 조작하고 있었고 바로 그 날 밤 어느 다리에 올라 사진을 찍었다. 지금의 토니가 카메라샵을 경영하는 이유가 그녀로부터 자유로울 리 없다. 카메라의 본질은 시간을 멈추게 하는 것. 젊은 시절의 토니는 시계를 거꾸로 찼다. 시계 앞면이 손목 안쪽에 오도록. 규칙과 관습에 대한 반항심 때문이었다.. 지금의 토니는 시계를 정상적으로 차지만 그 시계는 토니가 끔찍한 진실을 마주하기 직전, 운명처럼 작동을 멈춘다. 영화는 토니의 잠을 깨우는 자명종 시계를 굳이 여러 번에 걸쳐 비춘다. 그 자명종 시계를 토니의 잠이 아니라 기억을 깨우는 장치로 보아도 무리가 아니다. . 원작은 여기에서 끝이 나는 것 같다. 소설의 원작자인 줄리언 반스가 말했다고 한다. 이 150페이지짜리 책은 사실은 300페이지이다. 독자들이 두 번 읽을 수 밖에 없기에. 그의 예언대로 적지 않은 독자들은 마지막 3페이지 지점에서 책의 처음으로 다시 돌아갔다고 증언한다. 1부에서 진실이라 믿었던 토니의 기억이 어떻게 왜곡됐는지를 다시 확인하러... . 영화는 그러나 그 지점에서 더 나아간다.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지만 도덕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한 행위에 대해 토니는 현재 시점에서 속죄를 한다. 딸, 수지(미셸 도커리)의 출산을 정성껏 수발하고 전처, 마가렛(해리엇 월터)에게 자신의 부덕을 뒤늦게 사과하고 진심으로 사랑했음을 뒤늦게 고백한다. 심지어 매일 우편물을 배달하는 인도계 직원을 집으로 불러들여 커피를 대접한다. 영화의 엔딩에선 수지가 갓 태어난 손녀를 안고 토니의 카메라샵으로 찾아오고 가게 안의 평화로운 그들을 비추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 속죄를 받아야 할 아드리안은 세상을 등졌고 늙은 베로니카가 토니의 속죄를 거부함은 명백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니의 이런 방식의 속죄는 진정한 속죄로서 인정받을 수 있을까? 김중혁 작가는 불쾌하다고 말한다. 이동진 평론가는 "뒤늦은 회한의 끝에서 인간은 고쳐 살 수 있을까. 원작은 아니라고 하고, 영화는 그렇다고 한다." 라고 과거에 한줄평을 썼으며, 이번 영화당 코너에선, 선(善)의 총합은 같을 수 있다 할지라도 진정한 속죄로 보긴 힘들다라고 말한다. . 나는 이언 매큐언의 [어톤먼트]를 떠올렸다. 세실리아와 로비에게 속죄를 담아 바친, 브라이오니의 책이 자기만족과 자기기만이듯 주변 사람들을 향한 토니의 속죄 역시 어디까지나 자신을 위한 목적이라 생각한다. 최소한... 감독은 토니에게서 평온한 얼굴을 거두어야 마땅했다. . 아드리안의 자살이 토니의 편지로 촉발됐는지, 아드리안은 왜 베로니카가 아니라 그녀의 엄마, 사라를 사랑했는지, 사라가 토니에게 전하려 했던 아드리안의 일기엔 과연 무엇이 씌어져 있었을지, 토니를 향한 베로니카의 원망이 정당한지... 이제 우리들은 알 길이 없다. 불완전했던 기억은 완벽히 복원되지 못했고 불충분했던 기록은 그마저 사라졌으니... 그 누구도 진실에 대해 확신할 수 없으며 분명한 건 과거, 아드리안의 말처럼 "뭔가 일어났다는 것 뿐". 가장 먼저 잘못을 저지르고 가장 늦게 진실을 깨달은 토니는 자신에게 남은 삶을 자신에게 남겨진 사람들에게 충실하며 보내기로 마음 먹은 것 같다. 역사는 패자들의 자기기만일 수도 있다는 교수의 반론에 맞서 역사를 승자들의 거짓말이라 단언했던 젊은 시절, 토니의 정의는 "승자도 패자도 아닌 살아남은 이들의 회고록" 으로 수정된다. . 우리가 이 소설과 영화를 주제로 진지한 토론을 나누어야 할 이유는, 우리들 모두 토니가 처한 윤리적 딜레마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 인터넷상의 악플만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분노이든 증오이든 혐오이든 멸시이든, 어떤 이유로 내가 누군가를 향해 무심코 취한 언행이 다른 한 사람의 삶 자체를 바꿀 수도 있다. 더 무서운 사실은, 자신에게 유리한 것들을 더하고 자신에게 불리한 것들을 뺀 채 왜곡된 기억에서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 . 대개 속죄의 기회가 주어지지만 왜곡된 기억은 그 기회를 놓친다. 속죄의 기회를 놓쳤다가 나중에 깨달을 땐 또 다른 왜곡으로 그 기억마저 바꾼다. 누군가는 다행히 속죄의 기회를 붙잡지만 속죄의 대상과 방식이 부당할 경우도 있다. . 죄를 짓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이 인간인 한, 완벽한 인간이 있을 수 없는 한, 인간은 누구나 죄를 지을 수 있다. 중요한 건... 그 죄를 제대로 기억하고 그 죄에 대해 올바른 방법으로 속죄하는 것. . 바로 그것이... 죄를 지은 인간의 양심이자 의무이다. . 토니는 남은 삶을 그 양심에 괴로워하며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