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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받는 기분

도움받는 기분

3 years ago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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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자를 열지 않는 사람

책 ・ 2023

평균 3.5

백은선의 시집을 읽는 족족 저항 없이 좋아해 왔다. 정말 외형적으로 긴 글이지만 나는 그가 보고 느끼는 것에 대해 차분하고 분명하게 말한다고 생각했다. 언어가 사라지고 기호만 존재하는 텍스트 자체, 그 모든 의미가 사라지고 사물만 둥둥 떠다니는 풍경도 백은선이 감각하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그가 보고 쓰고 있는 것이 백은선에게는 너무 진실인 것 같아 그의 시집을 좋아했다. 좋아했던 가능세계의 문법에서 조금 벗어나 도움받는 기분이 나왔을 때에도 그 전의 것들보다 자신에게 밀착하면서도 지독하게 달라붙는 언술이 마음에 들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이렇게 탁월하게 시로 엮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유효하다고 생각했다. 이번 시집을 읽으면서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일상어들은 너무나 잘 달라붙고, 유효하게 떨어지는 것 같고, 부유하는 언어들은 처음부터 부유하라고 만들어진 언어였던 것처럼 각자의 위치에서 자기 할 일을 너무 잘 해내고 있었다. 그가 던지는 질문들이 너무 선명하고 다정해서 되려 거부감이 들었다. 조금 더 손 내밀지 않고 내달려도 될 것 같은데, 자꾸 건네는 손길이 적응하기 힘들었다. 그의 시가 길다는 생각, 읽으면서는 처음 했다. 더 이상 부서지지 않는 굳은 파편들이 이렇게까지 나열될 필요가 있는 거냐고 묻고 싶었다. 너무 잘 멈춰 있고, 정박해 있는 백은선이 내심 원망스러워졌는지도 모르겠다. 단단해진 그를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