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누군가를 우상으로 만드는 것은 그 인물의 고결함이 아니라 그 인물을 숭배하는 우리들의 맹목성. . . (스포일러) <우상>은 청각을 불신한다. 극중 인물들이 누군가로부터 전해 듣는 청각적 정보는 화자와 청자사이에 존재하는 무언가에 의해 항상 방해받아 간접적으로 변환된다. 영화는 이를 첫 장면에서부터 공고히 한다. 영화는 해외출장을 다녀온 명회(한석규)가 공항에서 정계인물들을 만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명회는 그 사람들을 눈앞에 두고도 서로를 반으로 등분하는 유리막에 의해 청각적 정보를 전달받지 못한다. 서로가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는 것이 한 눈에 보이는 시각적 정보와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 마냥 소통이 안 되는 청각적 정보의 충돌은, 사실 영화의 맨 처음 장면에서부터 볼 수 있다. 영화의 첫 숏에서 우리에게 보이는 건 공항에서 걸어가는 명회인데 이상하게도 우리에게 들려오는 내레이션의 화자는 중식(설경구)이다. 이처럼 영화는 첫 숏에서부터 청각과 시각을 고의적으로 충돌시킨다. 심지어 중식의 내레이션에는 목적어가 빠져있기에 그 청각적 정보마저 관객에게 온전히 도달하지 못한다.(“저는 해줬어요.”라는 중식의 첫 대사는 후반부에 한 번 변주되지만, 그전까지 관객의 입장에선 그것이 어떤 행동이었는지 전혀 알 도리가 없다.) . 영화는 ‘청각의 불완전한 전달‘이라는 모티브의 사용을 알아달라는 것 마냥 이를 계속 반복해서 노골적으로 배치한다. 공중전화 부스에서 흥신소에 접촉을 취하는 명회는 부스에 가로막혀 본인의 비서와 원활히 소통하지 못하고, 후의 장면들에서 중식역시 련화(천우희)와 면회실의 유리막으로 인해 완전한 소통이 불가하다. 중요한 순간 마다 중식이 전화를 받지 못하는 것 또한 이와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된다.(이와 비슷한 예시들은 영화 속에 무수하다.) 왜 이들은 항상 듣지 못하는 것일까. 깊게 생각해볼 법한 질문이다. (물론 관객이 인물의 대사를 정확히 듣지 못하는 건 이런 맥락에서가 아니라 영화의 음향 믹싱문제겠지만;;) . 이러한 질문에 대한 나만의 답을 하기 이전에, 영화의 제목이 <우상>인 만큼 과연 세 인물이 추구한 우상은 누구, 혹은 무엇이었는지 짚고 가고 싶다. 물론 극을 이끌어가는 세 인물 모두에게 저마다의 우상은 존재했던 걸로 보이지만 그래도 ‘우상’이라는 키워드와 가장 밀접하게 붙어있는 인물은 명회인 것 같다. 명회를 대하는 극중 주변 인물들의 태도로 보아 명회는 그 자체로 타인의 우상이기도 하니까. . 우상에 관해 조금 더 할 말이 많을 것 같은 명회는 잠시 뒤로하고 일단 중식과 련화 부터. 중식은 지나칠 정도로 혈육, 내지는 혈연관계에 집착한다. 중식이 정신적 문제가 있는 아들을 굳이 힘들게 장가까지 보낸 이유는 아들의 성욕을 직접 풀어주어야 하는 곤욕의 피로라 하기 보다는 어떻게든 아들이 대를 이어나가길 바란 그의 아집이나 고집에 더 가깝게 보인다. 심지어 그는 아들의 이름을 ‘유부남’이라 지으며 본인의 의지를 이름의 작명에서부터 강하게 투영했다.(여담이지만 감독의 말에 따르면 ‘중식’이라는 작명은 조식 중식 석식 할 때 그 중식이라 한다. 대충 한 끼를 때우며 사는 고달픈 인생을 은유한 거라나 뭐라나... 아무튼)시종 뜨거운 모습으로 영화 내내 일관했던 중식이지만 그는 막상 련화를 만났을 땐 의외로 침착하게 처사한다. 화라도 한번 내볼 법하기도 한데 말이다. 이러한 중식의 의외의 행동은 비록 련화가 본인의 친 손주를 임신한 것은 아니지만 그 뱃속의 아이를 자신의 손주로 받아들이려고 다짐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중식은 아들을 잃은 상실감을 이런 방법으로 메우려 한다.)위험을 무릅쓰고 기꺼이 련화를 돕는 중식이지만 사실 련화는 중식의 안중에 그다지 없는 것 같다. 중식이 진정 관심 있어 하는 건 련화가 아닌 뱃속의 아기일 테니까. 그는 련화를 만나자말자 양수의 보충을 위해 이온음료를 권하며 련화의 안위를 챙기는 듯 보였지만 사실 그건 태아의 안위를 걱정한 것이 아닌가. 그 연장선상에서 추방위기에 처한 련화를 돕는 것도 사실 련화의 추방이 아닌 손주의 추방을 막는 행위라 읽히고 다소 치욕스럽게 명희의 밑으로 들어가는 결단 또한 가족을 위한 가장의 희생정신처럼 보이는 부분이다. 여러모로, 중식은 현386세대를 연상시키는 인물이다. 그렇게, 뱃속의 아기가 정확히 누구의 아이인지도 모른 채 그는 혈육, 더 정확히 말하면 혈연'관계'를 위해 전력한다. 왜 이렇게 중식이 혈연에 집착하는지 영화는 구태여 부가설명을 덧대지 않는다. 마치 혈연에 대한 중식의 집착과 신념은 그저 이유 모를 맹목성에 기인하는 것이라 말하는 것처럼. .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중식은 여러모로 참 불쌍한데, 그렇게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는 혈연이라는 본인의 우상을 맹목적으로 신뢰하나 그 우상은 되려 중식을 가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구조에서, 계급의 측면에서 볼 땐 이득과 손해의 흐름은 우리가 으레 생각하던 논리대로 흘러간다. 영화 속에 피해를 보는 계급은 (예상대로)상대적으로 낮은 사회적 계급이다.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명회의 동료인 한 인물은 치킨을 먹는데 영화는 마치 하나의 ppl숏처럼도 보이는 치킨의 클로즈업 숏을 인서트 한다. 다소 의문을 품게 만드는 이 숏은 후에 병치의 장면과 이어진다. 후에 등장하는 련화의 언니인 수련은 닭을 잡으며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다. 사회적 계급의 높낮이에서 상대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정치인은 닭의 가공물인 치킨을 취식하고 그 반대의 사회적 계급인 수련은 원재료인 닭을 다듬는다. 후에 수련이 죽은 뒤 닭이 그녀의 목을 조아 먹는 장면을 계급의 측면에서 보면 이 얼마나 무서운 사회적 알레고리인가. 또한 후반부에 중식이 명회의 편에 서서 본인이 아들의 성욕을 계속 풀어줬으면 이런 악연이 없었을 텐데. 라고 스스로 자책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결국에 쌍방의 비극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선 상대적 하층계급의 고충이 지속되어야 함을 말하는 꼴이 아닌가. 이처럼 계급의 측면에선 이득과 손해가 으레 짐작되는 방향으로 오가는 중이다. 허나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이 혈연의 측면에서는 정반대의 형국을 보인다. <우상>은 기본적으로 명회와 중식을 위시한 아버지들의 수난사다. 이러한 아버지들의 수난은 어디서 온 것인가. 바로 본인들의 혈육인 서로의 아들이다. 명회와 중식은 각자의 아들로 인해 뜻하지 않은 피해를 보는 중이다. 더 아이러니 한건 명회와 중식은 혈연의 피해자이지만 때가 되면 스스로 혈연의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명회는 본인의 집에 습격한 련화를 막기 위해 위험할 것을 알면서도 노모를 집으로 보낸다. 결국 아들의 말을 들은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는다. 중식역시 본인의 복수심을 위해 보험금을 취소하며 본인의 누나에게 금전적 피해를 주는 이기적인 면모를 보인다. 이처럼 혈육의 측면에선 사회적 계급에서와 달리 ‘하’가 ‘상’에게 피해를 끼치는 양상이다. “내가 죽어서 해결되면 모르겠는데“라고 강하게 내쏘는 명회의 모친에게 중식은 ”그건 수지가 안 맞지“라고 강하게 응수한다. 하지만 정작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곳은 본인의 우상인 혈연에 종속된 논리체계다. 그는 오씨 사건을 비롯한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극중 인물 들 중 유일하게 반성하고 본인의 삶을 반추하지만 그래도 이미 늦었다. 뒤늦게 ‘우상’이라는 상징성의 공허를 깨닫고 만인의 우상이라 불리는 이순신동상에 메타포로서의 테러를 가해보지만 대중들은 그의 의도를 정반대로 해석한다. 유독 중식이 불쌍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 련화의 경우엔, 셋 중에서 가장 단순해 보인다. 하지만 그녀의 우상은 단순하기에 가장 맹목적이고 가장 무섭다. 그녀는 오로지 ‘생존’하나에 전력한다. 생존이라는 본능은 그녀를 움직이게 하는 가장 큰 동력이다. 련화는 겉으로는 순진하고 유약하게만 보이지만 그녀는 본인의 생존을 위해 중국에서 다른 이의 목숨을 끊고 한국으로 넘어왔다는 전력이 있고 현재에서도 때가 되면 무시무시하게 돌변하며 숨기고 있던 발톱을 드러낸다.(련화는 최근 개봉한 ‘더 페이버릿’의 에비게일을 강하게 연상시킨다. 그녀 역시 련화처럼 생존본능으로 움직였던 인물이고 또 그녀 역시 련화처럼 스스로를 약한 인물인 것 마냥 위장해 상대를 오해시키는 능력을 타고났지 않았던가. 두 인물모두 극의 강력한 변수로서 작용한 것 또한 마찬가지.) 그렇게 생존 이라는 한 길만을 내리 달렸던 그녀는 후에 그 길이 막다른 길이었음을 직감한다. 그리고 그녀는 명희의 집을 찾아가 무시무시한 결단을 내린다. 직전에 련화는 중식을 찾아가 금전적 빚을 갚겠다고 말한다. 허나 련화가 중식에게 갚으려 했던 것은 정말 금전의 빚이었을까? 본인의 생존이 불가능함을 알아챈 그녀는 굳이 타인의 생존까지 가로막아서야만 성미가 풀리는 것 같다. 중식은 명회의 가족들에게 “내가 너네 폭파시켜버린다.”라고 말하는데, 가스폭파테러로 명희의 가족들을 몰살시킨 그녀는 중식의 윗 문장을 대신 수행하며 금전의 빚을 본인만의 방식으로 대체하여 갚으려는 것은 아니었을까? 련화가 신봉하는 생존의 체계에선 죽음만이 유일한 복수일 테니까. . 마지막으로 명회의 우상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라는 물음이 필연이 되는데, 이는 셋 중에 가장 모호해 보인다. A=B라는 식으로 단순히 정의하는 건 개인적으로 선호하지 않는 독법인데 그래도 굳이 그렇게 해본다면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명회의 우상은 절대자, 내지는 종교가 아니었을까 싶다. 영화의 메인 테마OST인 ‘아그누스 데이’는 대략 “신이시여 죄인을 구하소서.”라는 뜻을 담고 있다. 개인적으로 중요하게 받아드린 부분은 이 테마곡이 사용되는 지점, 그리고 맥락이다. 영화의 테마곡은 대략 3번에 거쳐 반복된다. 명회가 련화를 납치하기 직전 교회에서, 우발적으로 용구를 죽일 때, 그리고 아들이 내심 죽기를 바라는 마음이 투영된 명회의 꿈속에서. 세 장면에 공통으로 배치된 감정은 명회의 죄의식이다. 죄의식이라는 관점에서 “신이시여 죄인을 구하소서.”라는 구절은 명희의 마음과 상당부분 상통하는데, 명회는 악의를 품었을 때, 그리고 악행을 실제로 행할 때, 마음속의 절대자를 편의적으로 호출해 구원을 갈구하며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그렇게 그는 (최소한 영화 내에서는)우러러 볼 지상의 인물이 없으니 가상의 인물을 동아줄 삼아 힘겨운 현실과 위태로운 내면을 버텨내려 안간힘쓴다. (갑작스러운 일이 닥치기 이전에 명회는 지극히 (악의보단 선의가 훨씬 앞선)보통 사람처럼 보이는데, 이 관점에서 보면 고난이 닥치자 갑자기 교회를 방문한 명희는 어쩌면 평소엔 종교를 믿지 않다 감당하기 힘든 일이 닥치면 그제서야 종교에 의지하려는 영화 밖 의 수많은 인물들과 닮아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 사실 개인적으로 흥미가 가는 부분은 명회의 우상이 무엇이었느냐가 아니라 영화가 명회를 우상으로서 다루고 있는 방식이다. 영화는 명회를 만인의 우상과도 같은 높은 위치에서 등장시킨 뒤 서서히 인물을 타락시키며 끌어내린다. 시종 우상으로 자리했던 그였지만, 그는 종국에 이르면 영화가 행하는 조소와 조롱의 대상이 된다. 얼굴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도통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을 짓거리는 명회를, 우리는 그저 비웃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영화는 갑자기 이 지점에서 섬뜩한 질문을 던진다. 애초에 명회를 우상으로 만든 이들은 누구였을까. 영화의 마지막 숏에 등장하는 것은 명회가 아니라 명회의 말을 듣는 청중들이다. 여기서 영화는 명회의 해석 불가능한 언어로 또 한 번의 청각적 차단을 유도한다. 마지막에 이르면 그토록 영화가 시종 고집해왔던 청각적 차단에 대한 나름의 이유가 확립된다. 흔히 사회적 우상으로 대표되는 인물들을, 우리 대부분은 매스컴이라는 장벽을 거쳐 접하게 된다. 들리는 말들과 이미지로만 특정인물을 섬기며 숭배하는 사회적 현상에 대해, 영화는 우리가 잘 느끼지 못하고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공공연하게 존재하는 청각적 장벽을 구태여 시각적으로 구현해내며 우리의 경각심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 영화는 청중을 비추는 마지막 숏에 명회의 얼굴까지 청중석 가운데 스크린에 같이 비추며 극중 청중으로 대변되는 영화 밖의 관객과 명회를 동급으로 두려한다. 이러한 시도에 관객입장에서 상당한 불쾌함을 느낄지도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뭐 딱히 그럴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 역시 갑작스러운 사건이 닥치기 전까진 선의가 악의를 짓누르고 있는 우리와 같은 보통사람이었으니까. 명회에서 시작해서 중식, 련화, 그리고 다시 명희로 이어진 메인 캐릭터의 바통은 결국엔 관객의 손에 쥐어진다. <우상>의 가장 섬뜩한 광경은 수위 높은 폭력장면이 아니라 개처럼 짖는 명회를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는 청중들의 평온한 얼굴에 있다. . . +쓰고 한 번 읽었는데 제대로 보면 비문 많고 논리가 다소 비약적일 거라 예상. 시간 남을 때 수정할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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