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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은찬

양은찬

1 year ago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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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론

책 ・ 2018

평균 3.8

언어는 어떤 개인의 작품도 아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성의 증표와도 같은 언어는 기이하게도 익명성을 띤다. 언어는 개인의 소유라기보다 날 때부터 우리를 둘러싼 환경에 더 가깝다. 대개의 경우, 가장 훌륭한 시인들도 오직 무수한 사람들이 과거에 셀 수 없이 많이 사용한 단어들을 가져다 씀으로써만 자신의 가장 내밀한 느낌을 발설할 수 있다. 물론 신조어 같은 것들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신조어들은 이미 확립된 의미들을 통해서만 이해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유물론의 역설, 곧 인간이 비인간에서 유래한다는 역설에 봉착한다. 물론 언어는 어떤 의미에서 인간의 발명품이다. 그러나 언어는 우리로 하여금 어떤 완강한 힘을 깨닫게 한다. 언어는 창조의 터전일 뿐 아니라 그에 못지않게 숙명이다. 유독 언어만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는 역사, 유전, 친족, 사회제도, 무의식적 과정들의 산물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것들을 대체로 선택하지 않는다. 비개인적 힘들과 마찬가지로 이것들도 우리를 방해한다. 이것들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창조물인데도 말이다. 따라서 인간 주체는 항상 어느 정도 자기 자신에게 낯선 자, 자신이 완전히 소유할 수 없는 힘들에 의해 구성된 자다. 바로 이것이 유물론의 주장이다. (34p)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의 스승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몸’이라는 단어를 시체에 적용하기를 거부한다. 대신에 그는 우리들도 때때로 그렇게 하듯이 ‘몸의 잔재’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죽은 몸은 그저 명목상으로만 몸이다. 데니스 터너가 지적하듯이 “죽은 사람은 죽었음이라는 불운한 상태에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은 부적절하다. ‘도서관 안의 몸’이라는 문구를 들으면 우리는 온갖 것들을 생각한 다음에야 가까스로 독서에 열중하는 사람을 떠올리는데, 이는 데카르트의 유산에서 비롯된 폐해일 따름이다. 누가 당신에게 전화를 걸어서 ‘조지가 거기 있나요?’라고 묻는다고 해보자. ‘예, 그런데 자고 있어요’라는 대답은 적절할 것이다. 반면에 ‘예, 그런데 죽었어요’라는 대답은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조지가 죽었다는 말은 그가 거기에 없다는 말과 같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와 아퀴나스가 보기에, 조지가 거기에 없는 이유는 그의 몸이 거기에 없기 때문이다. 비록 그의 몸의 잔재는 거기에 있더라도 말이다. 묘비는 누군가가 더는 현전하지 않는 위치를 표시한다. 조지의 물질적 잔재는 거실 바닥에 널브러져 있거나 주방 수납장 안에 쳐박혀 있을 수 있겠지만, 속세의 조지였던 활동적, 소통적, 관계적, 자기의식적 몸은 거기에 더는 없다. 조지의 시체는 조지임의 또 다른 양태가 아니라 ‘전혀 조지가 아님’에 가깝다. (…) ‘조지의 몸’은 조지에게 그의 몸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는 인상을 풍기는데, 그 인상은 사실과 다르다. 물론 우리는 흔히 그런 무언가를 상상하곤 하는데, 이는 단지 조지가 특정 유형의(이를테면 활동적이며 관계적이며 소통적인) 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인간 몸에 덧붙은 속성들이 아니라 ‘인간 몸임’의 의미에 속한다. 자기를 뛰어넘기는 인간 몸의 내재적 속성이다. (56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