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수경

트릭 미러
평균 3.6
나에게 SNS란, 안 본 지 오래된 친구가 웨딩 화보를 올리면 좋아요를 눌러주면서 한때 우리가 어떤 일들로 웃었는지 잠시 회상할 수 있고, 지인의 가족이 급하게 RH B- 형의 피가 필요하다는 소식을 스토리에 올릴 수 있고, 꽤 싫어하던 친구의 커피 사진들을 수년째 지켜보다가 자연스레 앙심이 가라앉게 되고, 구제 옷가게 계정들을 살피며 멋이란 무엇인지 탐구하고, 고3때 긱스의 officially missing you를 소개해준 친구가 그로부터 10년 후에 릴보이의 쇼미더머니 결승 게시물과 루이의 결혼식 영상에 좋아요를 누른 걸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릴보이와 루이는 긱스의 멤버임). 오프라인에서 멀어진 사람들의 근황과 취향을 관음할 수 있는 터이며, 어떨 땐 종일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내가 현실과 닿은 유일한 창문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한마디로 나는 친SNS파다. 덜 돌려서 말하자면, 인스타 중독이다. 한밤중에 편의점에서 팥빙수를 먹으면서도 그걸 널리 알려야만 하고, 물건을 잃어버리거나 그보다 멍청한 짓을 했을 때 내 우매함을 생중계하고 싶어진다. 나의 비극이 SNS에 썰로 올라가는 순간 얼마간 시트콤화 되며, 인친들의 동정 어린 디엠을 받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주영이의 말을 빌리자면 내 인스타 자아는 내 흑역사의 사마천이다. 그럼으로써 내가 받는 위안은 기이하게 실제적이다. 온갖 과시와 허영으로 가득한 인스타는 사실 보고 싶지 않은 게시물이 더 많아진 지 오래다. 피드를 확인하는 내 마음은 ‘사람들의 허영 또한 내가 파악해야 할 시대 정신이다,’라는 호기심, 뒤처지기 싫은 조바심, 그저 나를 저격한 광고를 보고 쇼핑에 최소한의 시간을 쓰고 싶은 마음까지가, 온통 뒤섞였다. 전애인의 계정뿐만 아니라 그의 친구들의 계정, 친구의 전애인들의 계정까지도 염탐하면서 역사의 진실을 목격하고 있다는 느낌에 휩싸일 때도 있다. 그러니까 SNS는 내가 보고 싶은 줄 알았는데 실은 보고 싶은지 모르겠는 것들로 가득하다. 내 심미안을 위해 예쁜 연예인들을 팔로우하지만, 왠지 갑자기 살을 빼야 할 것 같고, 사진을 찍을 때는 저렇게 환하게 웃어야 할 것 같고, 여행을 갔을 땐 비싼 호텔에 머물러야 할 것 같은 그 느낌이 내 인생에 쓸모가 있는 건지 모르겠다. SNS로 인해 기분이 언짢아진다는 주변의 증언들이 누적될수록 나도 그곳을 영영 떠야 하는 건지 고민이 된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촌 동생이 고등학생이 되기도 전에 쌍커풀 수술을 했을 때 (이미 완벽한 얼굴이었는데) 아득해진 기분도 같은 맥락이다. 바디 프로필 날짜에 맞춰서 살을 빼지 못할 것 같다며 울던 친구에게 바디 프로필을 찍지 말라던 내 조언은 전혀 도움이 안 되었기 때문에 혼란스러웠던 경험도 마찬가지다. 그 친구는 다행히(?) 내 조언을 무시하고 만족스러운 프로필을 찍었고, 그로 인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나도 기뻤다. 하지만 방금 쓴 문장을 읽으며 내 사촌 동생이 보는 인스타 피드가 내 눈에 보이는 피드와는 달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그 애가 행복은 파인다이닝이나 인피니티 풀보다는 창문에 수놓아진 빗방울들과 더 닮았다는 걸 확실히 알기 전까지는 아예 SNS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런 내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꼰대인 것 같아서 그저 그 애의 행복이 내 걱정 따위를 한참 뛰어넘은 곳에 있길 바란다. 사실 모두의 행복이 그곳에 있길 바란다. 모두가 다 함께 SNS 속 우리 자신을 한바탕 비웃는 국면을 통과한 후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부한 사진들을 올리고 서로 좋아요를 눌러주는 포스트-비웃음의 SNS 시대를 바라는 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어떤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갈 것인가. 섹슈얼리티를 파는 사람들은 삐삐를 쓰던 시절에도 있었다. 그 수많은 문제들을 기술의 탓으로 돌리는 것에 회의적이다. 기술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교육 (우리나라만 해도 유튜브 거짓 뉴스의 최대 수요자는 4-50대 이상의 세대다. 정보를 검열하는 능력이 결여된 어른들이 키워낸 세대가 미디어의 영향을 어떻게 받을지는 정해진 셈이다)의 개선을 논하는 것이 더 생산적이라고 믿는다. ad-tech (광고 테크놀로지)에 자본이 걷잡을 수 없게 몰린 현 상황에 대한 논의나 AI에 대체되는 노동에 대한 질문 끝에는 결국 인간을 어떻게 교육시킬 것인지가 궁극의 질문이다. AI를 만들고 쓰는 인간들을 믿는다면 AI를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 나는 인류가 트릭미러를 단숨에 간파하고 진실을 조망할 수 있는 세대를 길러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럴 수 있을 것도 같고, 또 어떨 땐 절대 불가능해보인다. 그저 인간들끼리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열심히 얘기해야 한다고 믿는다. 아름다움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잘 만들어가야만 소행성이 날아와도 박살낼 수 있고 이 비좁은 행성의 건강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이 장황한 코멘트를 황급하게 마무리하는 이유는 내가 정말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게 딱 이 정도이기 때문이다. 현시대의 수많은 문제들은 결국 '노간지가 무엇인지'에 대한 합의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진정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걸 찾고 또 지키고자 하는 욕망만이 나를 성장시키고 그로 인해 행복하다. 내가 더이상 의심하지 않는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 그 사실은 나에게 안전하다는 느낌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