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XEO

힌트 없음
평균 3.6
애프터 ⠀ ⠀ 밤이 깊다 이제 들어가자 네 앞에서 발길을 돌리며 밤이 깊다는 건 무엇일까 생각한다 나는 반복하고 끝내지 못하고 서랍장을 모두 열었다 숲에서 숲까지 가는 길을 모른다 밤에는 시소를 타야지 솟아오르는 일과 가라앉는 일의 깊이를 알게 될 때 빛은 제 몸을 비틀어 직선의 몸을 갖게 되었다 직선으로 깨지게 되었다 파편으로 빛을 경험하는 일처럼 도달한다는 것이 산산조각 나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나는 뛰어간다 나는 넘어간다 사람이 사람을 향해 복을 빌어주는 일을 배워서 너의 시간을 축복해야지 네가 어딘가에 도달할 때까지 너의 흰 재의 시간 마른 장미의 시간을 — 사랑의 발명 - 이영광 ⠀ ⠀ 살다가 살아보다가 더는 못 살 것 같으면 아무도 없는 산비탈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누워 곡기를 끊겠다고 너는 말했지 나라도 곁에 없으면 당장 일어나 산으로 떠날 것처럼 두 손에 심장을 꺼내 쥔 사람처럼 취해 말했지 나는 너무 놀라 번개같이, 번개같이 사랑을 발명해야만 했네 — ‘좋은 하루 되세요’라는 인삿말을 들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좋은 하루가 되라는 말은, 좋은 하루가 당신에게 찾아왔으면 좋겠다는 뜻에 가까울까, 아니면 좋은 하루를 당신이 만들어갔으면 좋겠다는 뜻에 가까울까. 「사랑의 발명」에서 이영광 시인은 사랑을 ‘발명해야만 했다’고 썼다. ‘사랑하세요’라고 말한다면 그건 사랑이 당신에게 찾아오길 바랄게요, 일까 사랑을 발명하세요, 일까. 어디에 가까울까. 사랑은 헤어짐에 대항하는 투쟁이라는 말을 읽은 적이 있었다. 사랑 자리에 삶을, 헤어짐 자리에 죽음을 넣어도 성립되는 말일 것이다. 앞에 있는 사람과 헤어지지 않기 위해 연인들은 새로운 사랑의 방식을 발명해야만 하는 순간을 맞닥뜨린다. 죽어야 하는 이유를 찾은 사람이 아니라, 죽지 않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 사람이 정말로 죽게 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삶은 처해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랑을 몰랐으나, 내가 없으면 죽을 것만 같은 사람을 위해, 곧 그 사람이 죽지 않아야 할 이유가 되어주기 위해 사랑을 발명해야만 했던 시 속의 화자처럼, 사람은 상황에 처해가며 생존에 필요한 깊이를 발명해간다. ‘솟아오르는 일과 / 가라앉는 일의 깊이를 알게 될 때’다. ‘나는 전부라는 거짓말을 믿지 않는다’라고 시인은 썼다. 어떤 사람도, 어떤 사랑도, 어떤 기쁨과 슬픔도 내가 살아야 할 이유의 전부가 되어줄 수 없다. ‘펼쳐진 페이지위 한 글자를 / 손가락으로 짚’으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믿는’ 사람의 페이지는 넘어가지 않는다(「모자이크」). 반면 ‘실체없는 것을 눈앞에 두고 / 무서워하’는 사람, ’도달한다는 것이 / 산산조각 나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이 있다. 그는 뛰어가고, 넘어가면서 새로운 페이지에 도달하게 될 사람이다. 거기엔 아무런 힌트도 없다. 힌트도 없이 산산조각 나리라는 걸 알면서도 살아가야 한다. 『힌트 없음』은 필연적인 무서움을 앞에 두고도 그때까지의 시간을 ‘축복’하겠다 말하는 용기의 시집이다. 지리멸렬하게 부서지면서도 미래를 발명해야만 했던 생존자의 기록 같다. 그 미래에는 어느새 먼저 가 있는 시가 있다(「미래의 시」). 그 시들을 만나기 위해 얼음을 깨는 펭귄이 이곳에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