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하잎솨

하잎솨

6 years ago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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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

시리즈 ・ 2009

평균 4.0

나에게 드라마 선덕여왕이 내인생 최초이자 최고 페미니즘 드라마로 꼽히는 이유가, 투톱 캐릭터가 모두 여성이고, 주변인물의 영향과 조력을 여성에게도 골고루 받으며, 특정한 여성성에 갇히지 않고(심지어 여성상을 벗어던지며), 가진 능력을 정확히 파악하고 어려움에 정면으로 맞서 극복한다. 거기다 막강한 권력까지. 한국에서 이만한 캐릭터가 또 나온 적이 있던가? 어린 시절 신라를 탈출하고 오랜 타지생활 동안 덕만은 전형적인 여자아이, 공주님으로 길러지지 않는다. 과학처럼 실생활에 유용한 책을 가까이하며 외국어에도 능통하고 견문이나 지식, 생활력도 남들에 뒤지지 않는다. 남장을 하고 김유신의 군대에 들어가고 나서도 끝까지 혹독한 훈련을 받고 공을 세운다. 이렇게 똑똑하고 다부진 덕만의 행보는 덕만이 왕위에 오르기 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두 번의 질문을 하며 더욱 빛난다. 첫번째로, 미실에게 시달리며 궁 생활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 천명공주는 죽기 전 덕만에게 자신의 ‘머리빗’과 유언을 남긴다. 피튀기는 신라의 왕족으로 힘들게 살지 말고, 김유신과 멀리 떠나 사랑받는 여자로 평생 행복하게 살길 권한다. 그때까지 아들 춘추를 보지도 못하고 미실에게 시달릴대로 시달린 천명의 입장에서 분명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드라마 전개 상)하나뿐인 친동생이 공주가 된다면 어떤 일을 겪을지 눈에 선한 언니의 걱정인 것이다. 그러나 천명이 죽고나서, 덕만은 머리빗을 가차없이 두동강 내버린다. 그리고 물에 던진다. 천명을 잊겠다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는 여자가 아닌 공주로서 내 운명을 받아들이길 선택했다는 것이다. 두번째로, 덕만이 공주가 되고 나서 왕위를 이을 성골이라곤 여자인 덕만 뿐, 남자가 없자 모두가 진골 남자가 왕이되는 것을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덕만은 유일한 성골인 자신이 왕위를 잇겠다고 스스로 선택한다. 여자가 왕이 된다는 건 그누구도 생각해보지 못한 선택지였다. 심지어 미실마저도 왕후가 되어 권력을 잡을 생각만 했지, 직접 왕이 되어 권력의 주체가 될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젊고 지혜로운 덕만은 미실을 궁지로 몰아넣어 최초의 여왕이 된다. 흰 깃발과 흰 옷을 입고 미실세력은 항복한다. 오랫동안 꺼내지지 않은 흰 천들은 정갈하게 접힌 자국이 그대로 보인다. 연륜과 젊음의 권력다툼에서, 젊음이 이기고 신라 왕실의 세대교체가 이뤄지게 된다. 덕만과 대립구도를 이룬 미실은 몰락했지만 추하지 않았다. 군사가 부족해도 국경을 먼저 생각했고 자신을 지지한 자들이 미실이 몰락했다는 이유로 피해입지 않도록 보살폈다. 좀 잔혹할지라도, 애초에 성골 남자로 태어났더라면 잔인할 필요 없이 좋은 왕이 되었을거다. 계급과 성별의 벽을 넘지 못하고 죽었지만 “내가 성골로 태어났더라면” 다르지 않았을까를 원망스러워하는 미실은 아무도 미워하지 못했다. “이제 네가 필요 없다”며 아들을 버리는 미실은 전형적 모성상에 반대된다. 그러나 냉혈한보단 판단력이 뛰어난 지도자고, 권력을 탐했지만 눈이 멀지는 않았다. 중간중간 보여주는 인간적인 모습은 죽기살기로 꿈을 이루려 노력하는 미실을 인간 대 인간으로서 존경스럽게 보이도록 했다. 그리고 고현정 배우는 연말에 연기대상을 탔다. 재작년에 다시 정주행하고 나서 한동안 여운이 가시지 않았었다. 2009년 그 때는 몰랐지만 이제와 보니 인물부터 서사까지 너무 매력 가득하고 구멍없이 촘촘한 사극이다. 비슷한 시기에 인기를 끈 사극들-대조영, 주몽 등등- 사이에서 유일한 여성 주인공으로 가장 납득 가능하고 재미있었다. 픽션과 논픽션을 떠나, 선덕여왕은 내 존경인물 1순위가 되었다. 내 삶에도 미실과 덕만같은 경쟁자가 있다면. 미실이 있기에 선덕여왕이 있었고 덕만이 있기에 미실이 있었다. 대중들에게 어필할 러브라인도 볼만하다. 덕만은 왕이 되기 위해 결혼을 하지 않기로 결심하는데, 그렇다면 평생 덕만의 곁을 지키겠다는 첫사랑 김유신, 대체불가 캐릭터인 비담의 처절한 짝사랑 서사를 만들었다. 현실 유신은 절레절레지만 비담은 그 역할로 끊임없이 사랑받는다. 지금 나왔으면 또 그남들이 페미가 아니냐며 난리를 떨었을 이야기.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하며, 군대를 이끌고 사랑이 아닌 권력을 위해 싸우는 주체적인 여성들의 이야기. 브라가 가슴을 안 받쳐주고 치마를 입을 권리를 운운하는 2020년의 한국 드라마는 제대로 퇴보한 것이다. 우리 시대 흐름을 읽자. 지금 여성들은 긴 머리, 화장, 옥죄이는 옷에 문제를 제기하며 여성차별의 근본적 해결에 대해 얘기하고, 야망을 가지고 나로서 존재할 가치에 고민하고 있다. 그 옛날의 덕만이 머리빗을 두동강내고, (곧 개봉할) 뮬란이 머리카락을 자르고, 인생은 실전이야 브라자 따윌 걱정할 만큼 평화롭지 않다. 선덕여왕같은 드라마가 다시 나왔으면 좋겠다. 아, 그땐 남배우들 성폭력 전과 확인좀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