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감성혁명

감성혁명

8 years ago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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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의 힘

영화 ・ 1998

평균 3.5

영화를 보기 전과 관람이 끝난 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궁금증, 왜 영화의 제목이 <강원도의 힘>일까? 아예 영화의 영어 제목까지도 . 홍상수의 영화에서 제목이 갖는 비중이 매우 큼을 상기한다면 궁금증은 배가된다. 다음 궁금증은, 지숙이 묻어준 금붕어와 상권이 세숫대야에 넣은 금붕어의 의미, 둘이 우연히 마주친 한 여인의 죽음의 의미, 두번째 강원도행에서 돌아오는 버스 안 지숙의 오열의 의미. 홍상수의 영화에서 함부로 낭비되는 씬은 없기에... 1, 2부에서의 서사의 진행이 뒤죽박죽 섞여있고 편집이 거칠고 불친절하기에 의미 파악이 어렵다. 인물들에 대한 클로즈업은 한 번도 없고 롱숏도 없다. 오로지 적당한 거리를 둔 미디엄숏으로만 인물들에 개입하지 않고 관조할 뿐. 이 모든 의문들을 파악하기 위한 열쇠는 영화의 끝에서야 드러나는 지숙의 낙태이다. 지숙은 대체 왜 강원도에 간 걸까? 그것은 낙태와 자살 사이의 고민 때문이었다. 혼자서 찾은 낙산사에서 기와에 적은, 2부에서 상권에게 발견되는, '어머니 건강하세요.'라는 문구는, 따라서 지숙의 유서로 읽어야 한다. 이 고민은 분명 살아있는 금붕어를 산 채로 묻어주는 지숙의 행위로 표출된다. 몇 걸음만 걸어가도 계곡이 있을 텐데 친구들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굳이 근처 땅에 묻으면서 지숙은 되묻는다. '그럼 밟혀죽게 놓아 둬?' 금붕어를 매장하며 낙태의 각오를 다진 셈. 지숙이 마주친, 눈이 예쁘다는 여자의 죽음은, 그것이 자살이든 실족사이든 살인이든 지숙의 사실상의 죽음을 대신한다. 혼자서가 아니라 친구들을 데리고 온 이유도 자살 결심을 친구들이 막아주었으면 하는, 은근한 바람에서 비롯됐을 것. 다만 그 바람은 뜻하지 않게 친구들이 아니라 경찰관과의 하룻밤으로 이루어지고 다음 날 아침 경찰관에게 하는, '아저씨가 너무 고마워요'라는 대사는 얼마든지 이해가 간다. 그 남자의 직업이 경찰관이었던 것 역시 의도적. 경찰관이 막은 건 범죄나 사고가 아니라 지숙의 죽음이었던 셈. 지숙은 첫번째 강원도행이 있은 후 낙태시술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목욕탕 체중계에 보여지는 42kg의 몸무게는, 지숙의 몸무게가 아니라 지숙에 의해 죽임을 당한 태아의 존재를 보여주기 위한 의도로 추정된다. 하지만, 자신의 집 현관문 옆 상권이 남긴 문구는 다시 자살에 대한 충동을 불러일으켰을 것이고, (긴 호흡의 기다림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고) 죽음의 그림자에 두려움을 느낀 지숙은 혼자서 경찰관을 만나러 강원도로 간다. 약속에 늦은 경찰관에게 지나칠 정도로 화를 낸 것은 지숙의 두려움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준다. '내가 얼마나 불안했는지 알아요?' 그러나 결코 상권을 대체할 수 없는 경찰관에게 자신의 육체와 영혼을 허락할 수는 없었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마침내 오열한다. 그 오열은 자신이 죽인 태아에 대한 죄책감과 애도, 끝나버린 사랑에 대한 절망, 그리고 무엇보다 죽음의 그림자에서 벗어난 안도가 함께 뒤섞인 오열이었을 것임을... 교수 임용에 성공한 후 만취된 상태로 자신을 불러내 다시 자신의 육체를 탐하려는 상권에게 지숙은 말한다. '나 수술 받았어요. 애 떼는 수술. 자기 애 아니니까 괜찮아요. 실수였어. 난 맨날 실수만 해. 나도 좀 살아야 되겠어요.' 이제 지숙은 다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상권 없이... 그렇다면, 강원도의 힘은, 한 인간을 죽음의 공포에서 다독이고 보듬어 다시 삶으로 돌려보낸 힘이라 보아야 하겠고, 영화 속 강원도라는 공간은 일탈의 공간이 아니라 (일탈은 어차피 서울에서부터 존재했다.) 결단과 구원의 공간으로 보여진다. 반면, 그 강원도에서 아무런 삶의 힘도, 각성도 구원도 얻어내지 못한 상권은, 세숫대야에 넣어 둔 두 마리 금붕어들 중 한 마리가 왜 없어졌는지를 영원히 알 수 없는 채로 비루하고도 위선적인 삶의 굴레 속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살아갈 것이다. 세숫대야 속에 홀로 남겨진 금붕어는, 살아있어도 산 게 아닌, 상권 자신의 모습과 다르지 않음을... . http://naver.me/xUmJCDG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