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eorm
3.0

태양은 가득히
영화 ・ 1960
평균 3.9
범죄물이지만 미스테리 형식은 아니고 그렇다고 드라마도 아니다. 재미는 있지만 깊이감은 부족했다. 개인적으로는 리메이크작이 좀더 좋았다. # 관련 영화 Purple Noon (Plein soleil, 1960) 르네 클레망 The Talented Mr. Ripley (1999) 앤서니 밍겔라 # 관련 영화 Purple Noon (Plein soleil, 1960) 르네 클레망 The American Friend (1977) 빔 벤더스 The Talented Mr. Ripley (1999) 앤서니 밍겔라 Ripley's Game (Il Gioco di Ripley, 2002) 릴리아나 카바니 Ripley Underground (2005) 로저 스포티스우드 ============= 《태양은 가득히》는 프랑스에서 제작된 르네 클레망 감독의 1960년 범죄, 스릴러 영화다. 알랭 들롱 등이 주연으로 출연하였고 레이몬드 하킴 등이 제작에 참여하였다. 프랑스 영화 • 이탈리아 영화[국적이 매우 복잡한 영화인데, 배우와 감독 등 전반적인 제작진은 프랑스인이며 촬영 장소는 이탈리아다. 그리고 음악은 이탈리아의 작곡가인 니노 로타가 담당했다. 하지만 원작 작가인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는 미국인이며, 작중의 배경 설정도 미국이다]. 원작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1921~1995)의 추리 소설 재능 있는 리플리 씨(The Talented Mr. Ripley). 금지된 장난으로 유명한 르네 클레망(1913~1996) 연출, 알랭 들롱, 모리스 로네, 마리 라포레 주연의 작품이다. 관객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집중하게 만드는 치밀한 구성과 복선,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 매끄럽게 이루어진 감독의 연출, 마지막의 반전 등이 인상적인 영화이지만 그러한 것을 떠나서 사람들의 기억에 강렬하게 남은 것은 알랭 들롱. 강인한 것 같으면서도 부드럽고, 반항아적이면서도 묘하게 순수한 면모로 여성을 끌어당기는 외모의 톰 리플리는 알랭 들롱을 위해서 만들어진 캐릭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무명에 가까운 배우이던 들롱은 이 영화 하나로 세계적인 미남 배우로 이름을 알렸다. 그 외에도 이탈리아를 무대로 지중해의 아름다운 풍광과 니노 로타(1911~1979)[ 대부(영화) 음악으로도 유명한 영화음악가]의 매력적인 음악도 영화의 완성도를 더하고 있다. 한 시대를 풍미한 걸작으로 맷 데이먼, 귀네스 팰트로가 주연을 맡은 《리플리》(1999)가 이 영화와 비교되기도 했다. 리메이크의 한계를 이기지 못한 《리플리》는 잊혀져버렸다고 선입견이 박혀있지만, 리플리가 태양은 가득히만큼 성공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어도 이 영화의 리메이크는 아니다. 2005년 영화 오만과 편견이 1995년 BBC 드라마 오만과 편견의 리메이크가 아닌 것처럼, 리플리나 태양은 가득히나 같은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서로 다른 해석을 시도한 영화일 뿐이다. 먼저 만들어진 작품(그것도 수십년이 지난 상황에서도 회자될 정도로 명작)으로서 뒤에 제작된 영화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겠지만. '태양은 가득히'라는 국내명은 일본 개봉명인 '太陽がいっぱい'를 그대로 번역하여 사용한 것으로 사실 이 제목은 직역이다. 프랑스 원제는 'Plein Soleil' 인데 프랑스어로 Plein는 '가득 찬', Soleil는 '태양'이지만 잘아는 것처럼 태양은 달과 달리 일식때를 제외하면 형태의 변화없이 언제나 가득 찬 상태다. 일본 개봉명을 지을때 관용어를 각자의 단어가 가진 의미 그대로 번역해버린 것으로 의미에 맞게 번역하자면 작열하는 태양이나 "햇살이 가득한"이라고 해야 한다. 미국 개봉명은 'Purple Noon(보라빛 정오)'이다. 프랑스 어(語)로 (Plein soleil), 이탈리아 어(語)로 (Delitto in pieno sole). 일설에 의하면 누벨바그 감독들에게 노땅이라 까이고 있던 르네 클레망이 [르네 클레망은 누벨바그 감독들에게 구시대 프랑스 감독의 대표로 까였던 감독이다] '그렇다면 젊은 영화를 만들어주마'하면서 만들었다고 한다. * 꿈은 높지만 그것을 실현할 능력이 없어 자신의 신분과 정체를 속이는 거짓말을 하다가 결국 자신마저도 그 거짓말이 사실이라고 굳게 믿게 되는 망상장애에 시달리는 정신병을 리플리 증후군이라고 하는데 주인공인 '톰 리플리'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그러나 정작 소설과 영화 속 리플리는 자신이 쌓아올린 거짓을 통제하지 못하고 스스로도 믿어버리는 허언증 환자와는 거리가 먼, 냉철한 범죄자다. 즉 리플리는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다. 마지막에 범죄가 드러난 것도 예상치 못한 변수 때문이었고 그나마도 영화에서 각색한 결말일 뿐, 원작 소설에서는 걸리지도 않는다[위에 언급한 1999년에 개봉한 맷 데이먼의 리플리는 캐릭터 해석이 판이하게 달라져서 리플리 증후군 환자라고 할 만한 모습을 보인다]. 오히려 이렇게 본다면, 톰 리플리는 리플리 증후군 환자가 아니라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 쪽에 더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 MBC의 드라마 《미스 리플리》의 제목도 톰 리플리에서 따왔다. 주인공 장미리의 이야기가 톰 리플리와 비슷하기 때문인 듯. * 톰 리플리 역을 맡은 알랭 들롱의 성격이 톰 리플리와 매우 비슷하다는 주장도 있다. 들롱은 성격이 좋지 않고 여자관계도 복잡하기로 유명했는데, 들롱과 교제했던 여성들의 경험담을 보면 사실상 연인을 성공의 발판으로 이용해왔다. 그만큼 비정하고 남을 이용하는 성격이라는 것. * 가네시로 가즈키의 단편집 《영화처럼》의 소재로도 등장했다. * 박상우(소설가)의 단편 소설 "한 편의 흑백영화에 관하여 그는 말했다"에서도 소재로 등장한다. ----------------------- 가난하지만 영리하고 잘 생긴 청년 톰 리플리는 인생 역전을 꿈꾸던 상황에서 중・고등학교 동창인 필립 그린리프(모리스 로네)의 아버지를 만나 로마로 유학가서 빈둥거리기만 하는 아들 필립을 데려오면 5천 달러를 주겠다는 제안을 받고 로마로 간다. 하지만 로마에서 만난 필립은 톰을 하인처럼 부리고, 필립의 절친한 친구인 프레디 마일스(빌리 컨스) 또한 톰을 벌레 보듯 한다. 톰은 필립의 프랑스인 여자친구 마르쥬(마리 라포레)에게 첫눈에 반한다[필립 몰래 필립의 옷을 입고 거울 앞에서 필립 흉내를 내보면서도 마르쥬를 향한 연정을 중얼거릴 때에는 톰 리플리 자기 자신으로 돌아온다]. 톰과 필립, 그리고 필립의 애인 마르쥬는 몽지벨로로 가서 요트를 타고 항해를 즐기는데, 마르쥬는 톰을 너무 괴롭히지 말라며 필립을 만류하기도 하는 등 묘하게 톰과 잘 통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이런 상황을 고깝게 보던 필립은 톰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가 하면, 마르쥬에게도 소리를 지르거나 함부로 대하는 등 상당히 제멋대로 행동한다. 그는 톰을 구명보트로 밀어낸 뒤 구명보트에 매달고 달리고 중간에 요트와 연결된 밧줄이 끊어진 상황에서 바다 한가운데 표류한 톰은 강한 햇빛으로 등 전체에 온통 화상이 생기기까지 한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필립은 요트를 되돌려서 톰을 구하지만 이미 톰은 자존심에 크게 상처를 입고 그 동안 계획했던 복수를 실행한다. 톰은 계획적으로 필립의 옷주머니에 여자 귀걸이를 넣어 마르쥬와의 사이를 이간질하고, 필립과 크게 싸운 마르쥬는 몽지벨로 항구로 돌아와서 요트에서 내려버린다. 요트에 둘만 남게 된 톰과 필립. 톰은 아무렇지도 않게 필립에게 '널 당장 죽이고 내가 네 행세를 한다'는 말을 한다. 처음에는 필립은 톰이 장난치는 줄 알았지만 톰이 계획을 늘어놓자 필립은 점점 얼굴이 굳어진다. 필립은 일부러 톰을 떼어내기 위해 카드놀이를 제안하는데, 자신을 이기면 5천 달러를 주겠다는 조건이었고 일부러 져준다. 하지만 이미 톰은 필립에 대한 증오가 쌓인 상태였고, 숨겨뒀던 칼을 꺼내 필립을 찌른 뒤[아이러니하게도 필립의 유언은 '마르쥬!' 였다] 시체를 방수포에 꽁꽁 싸서 바다에 던져버린다. 톰은 필립의 신분증과 서명을 정교하게 위조한 뒤 수표를 발행하여 돈을 쓰고, 필립의 타자기로 편지를 써서 필립을 사칭하고 다닌다. 그러던 어느 날 필립의 이름으로 톰이 숙박하고 있던 호텔에 필립의 친구 프레디가 찾아와 톰이 필립을 사칭한 사실이 들통나자 톰은 프레디를 도자기로 머리를 내리쳐 살해한 다음 밤중에 프레디의 시체를 차에 싣고 인적이 드문 폐가 근처 버려진 우물에 버린다. 그런 다음 마치 필립인 척 로마에 있는 집으로 들어오는 듯 하다가 누군가에게 발견되자 달아난다든지 많은 흔적을 남겨 마치 필립이 프레디를 살해하고 겁에 질려 당황한 것처럼 꾸민다. 그리고 필립의 부모에게 필립에 대하여 모르겠다고 말하고 찾아온 형사들에게 같은 말을 하면서 은근히 필립의 도주를 도운 것처럼 연극을 하고 증거를 남긴다. 형사가 톰을 찾아와 범인 은닉 및 도주 협조로 잡아 가둘 수도 있다고 주의를 주며 필립은 어디에 있냐고 묻지만 모른다고 하면서도 필립의 부모와 마르쥬가 있는 자리에서 몰래 마르쥬에게 필립이 어디로 갔는지 안다고 말하기도 한다. 여형사가 근처에서 잠복하면서 이 말을 엿듣고 있었는데, 물론 톰은 이걸 알고 있었다. 마르쥬에게 지금 필립은 프레디를 우발적으로 죽여서 안절부절하고 있다는 것처럼 말하며 자신도 가끔 연락하고 그러지만 나도 못 믿겠다고 하고 거주지를 옮겨서 더 이상은 자세히 모른다고 태연하게 거짓말을 한다. 톰의 이러한 행동들을 통하여 필립이 프레디를 살해한 용의자로 몰리자 톰은 필립의 은행 계좌에서 돈을 다 찾은 다음 필립이 자신의 재산을 모두 마르쥬에게 양도한다는 가짜 유서를 쓰고 자살한 것으로 위장한다. 그리고 전에 준비해둔 대로 필립이 피던 담배 꽁초를 몰래 깨끗하게 모아둔 것을 재떨이로 가득 쌓아둔다든지, 필립의 가까운 친구인 오브라이언(프랭크 라티모어)이 찾아오자 필립인 것처럼 연기하면서 틀림없이 필립이 왔었다고 증언하게 한다든지 다양한 속임수를 활용하여 경찰이 믿게 한다. 결국 사건은 필립이 살인 후 자살했다는 걸로 마무리되고, 실의에 빠진 마르쥬와 연인 사이가 된다[필립의 배에서부터 은근히 마르쥬는 톰에게 잘 해주었고, 상냥하고 예쁜 마르쥬에게 톰 역시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톰은 필립의 마지막 흔적인 요트마저 팔아버리기 위해 보트회사에 매각을 부탁하며, 필립의 재산을 상속 받은 마르쥬와 함께 행복한 미래를 꿈꾼다. 하지만 그가 팔기 위해 내놓은 필립의 요트를 구매자들이 살펴보려고 육지로 인양하는 과정에서 밧줄로 꽁꽁 싸매어 바다에 버렸던 필립의 시체가 발견된다. 시체를 바다에 버리는 것은 성공했으나, 하필 그 밧줄이 스크루에 걸려 배와 함께 계속 따라 다녔던 것이다. 심하게 부패하여 엉망이 된 시체가 모래밭으로 끌어올려지고, 그것을 알아본 마르쥬의 절규가 울려퍼진다[위에서도 언급했듯, 이 배의 이름은 바로 그녀의 이름인 '마르쥬(Marge)'다. 필립이 그녀를 함부로 대한 것은 사실이나, 이는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 잘못됐을 뿐 그가 마르쥬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걸 알 수 있다. 특히 이 장면에서 카메라의 포커스가 배의 이름이 적힌 함수를 클로즈업 하면서 비극이 부각된다]. 톰을 체포하러 온 형사들은 가게 종업원에게 전화가 왔다는 핑계로 그를 부르라고 거짓말을 시키고, 바닷가의 따스한 햇살 아래서 최고급 술을 마시며 자신이 손에 넣은 부를 잠시나마 만끽하던 톰은 아무 것도 모른 채 미소를 지으며 여유롭게 전화를 받으러 걸어가는 것으로 영화가 끝난다. --------------------------- 1. 이 영화가 나왔던 1960년대엔 [태양은 가득히]는 '젊은 영화'였습니다. 같은 작가의 작품을 영화화한 [열차의 이방인](1951)과 이 영화를 비교해보면 그 '감각'의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소문에 따르면 누벨 바그의 공격에 열받은 르네 클레망 영감이 자신의 젊음을 과시하기 위해 만들었다더군요. 40년이 지난 지금도 영화가 그렇게 젊어보이지는 않습니다. 이 영화가 '젊다면' 아직도 요새 관객들을 만족시킬만한 완성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클레망 영감이 과시한 의식적인 젊음은 어느 사이엔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수십 년이 흐르는 동안 우린 그 모든 것들에 익숙해져 버렸던 거죠. 2. [리플리]에 대해 이야기할 때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원작 소설에 대해 언급했으므로 여기서 또 그 이야기를 되풀이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원작과의 차이점만 간단히 나열하기로 하죠. 원작은 리플리가 뉴욕에서 디키의 아버지를 만나는 것에서 시작하지만, 영화에선 리플리와 디키가 이미 친구가 된 뒤부터 시작합니다. 원작에서는 어정쩡하고 멋없는 인물이었던 마르쥬(마지는 이 영화에서는 프랑스 인입니다)는 마리 라포레가 훨씬 예쁜 인물로 연기하고 있고요. 원작과는 달리 리플리는 마르쥬에게 연정을 품고 있고 후반부에서는 정말로 그 사람의 사랑까지 얻습니다. 물론 가장 차이가 나는 부분은 결말이고요. [리플리]와 비교해보면, [태양은 가득히]가 원작에 훨씬 가깝습니다. 스토리의 공간적 흐름은 [리플리] 쪽이 더 비슷하지만, 사건을 다루는 냉정한 태도는 하이스미스의 어투에 더 가깝지요. 그건 아마 르네 클레망이 그만큼이나 개성이 없는 감독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일지도 모릅니다. 젊은 감각이 어쨌건, 그는 ‘오퇴르’(auteur·각본 집필과 연출을 동시에 하면서 자기 소신에 따라 영화를 만드는 감독)는 아니었던 거죠. 3. [태양은 가득히]가 당시 관객들을 열광시켰던 건 그 젊음의 느낌이었습니다. 60년대 초라면 젊은 문화가 싹트고 있을 때지요. 영화는 교묘하게 이들의 분위기와 유행에 영합하는 분위기를 띠고 있었습니다. 그건 거의 고전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는 하이스미스의 엄격한 원작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톰 리플리의 성격하고도 무관한 것이죠. 왜인지는 모르지만 늘 젊은 문화와 연결되는 강한 바다의 이미지는 이런 분위기를 강화시켰습니다. 그리고 여기엔 알랭 들롱이라는 배우가 있었지요. 사실 들롱은 이 영화에서 클레망보다 더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의 잘생긴 외모는 캐릭터의 나르시시즘과 금지된 열정을 그럴싸하게 정당화했을 뿐만 아니라 영화의 무도덕적인 스토리에 관객들을 손쉽게 끌어들였습니다. 나이든 영화광들이 이 영화에 감상적이 되는 것도 그 때문이죠. 이 영화는 그네들의 젊음의 징표였습니다. 4. 그러나 전 개인적으로 이 영화의 '60년대식 젊은이의 초상' 분위기에 그렇게 끌리는 편은 아닙니다. 제가 이 영화를 좋아한다면 그건 클레망이나 알랭 들롱 때문이 아닙니다. 영화에 많이 남아있는 하이스미스의 특성 때문이지요. 정교하게 그려지는 리플리의 범죄행각은 흥미진진합니다. 첫 번째 살인의 갑작스러운 리듬과 두 번째 살인으로 이어지는 서스펜스 역시 훌륭하고요. 이 영화의 무슈 리플레는 밍겔라의 미스터 리플리보다 훨씬 솜씨 좋은 범죄자여서 그의 범죄에는 훌륭한 예술품 특유의 미적 쾌감이 느껴집니다. 클레망이 하이스미스의 세계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의 프랑스식 감성은 하이스미스의 냉정한 앵글로 색슨식 정신과 자주 충돌하니까요. 그래도 이 영화를 근사한 서스펜스 영화로 만드는 데엔 문제가 없습니다. 바뀐 결말에 대해서도 불평은 없어요. 권선징악이건 아니건 강한 결말이 하나 있어야 하니까요. 영화의 결말이 주는 강한 연민과 충격 역시 가치 있는 것이고요. 5. 이 영화는 프랑스 영화지만 캐릭터들은 미국인입니다. 알랭 들롱이나 모리스 로네와 같은 캐릭터들은 미국인을 연기하고 있는 거죠. 미국인들만 나온다면 차라리 그냥 그러려니 생각하겠는데, 이탈리아가 무대니 사정은 복잡해집니다. 이탈리아인들이 등장할 때는 언어의 리얼리티가 지켜지지만 영화 속의 미국인들이 이야기할 때는 그런 게 가차없이 무너지니까요. 게다가 마르쥬는 프랑스인이니 정신이 없는 거죠. 차라리 프랑스인들로 바꾸었다면 더 낫지 않았을까 생각해봐요. 6. 60년대 영화에 대한 감상은 없습니다. 반대로 저희가 [태양은 가득히]에 미온적이라면 바로 그 시대의 느낌 때문이지요. 그러나 구식 영화광들의 감상적인 추억을 모두 지워내면 우리는 간결하고 냉정하며 무척 고전적인 서스펜스 영화와 마주치게 됩니다. 노인네들이 뭐라건 그게 이 영화의 진짜 가치일 겁니다. (00/02/12) D&P 기타등등 [태양은 가득히] 때만 해도 들롱은 꽤 괜찮았었는데, 그 뒤로 참 흉하게 늙어버렸죠. 이 영화에서도 가끔 그의 늙은 얼굴이 슬쩍 슬쩍 보여서 기분이 이상해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