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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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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months ago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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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키코

책 ・ 2022

평균 3.3

p. 11 나는 너의 어느 쪽을 밀어도 만지고 싶은 미래 / 기억은 자기를 알아보는 누군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린대 / 하지만 천국에도 지옥에도 그런 에피소드는 없었지 (여름 키코) p. 18 얼마나 벌어야 너랑 살 수 있을까 / 파도 위의 서퍼들 /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물결 / 네가 내 마음에 들려고 노력을 많이 했나봐 / 입에서 짓무른 복숭아 냄새가 나거든 / 젊은 날의 조코비치처럼 / 태양 아래 조코비치처럼 (몽유병자들의 무르가) p. 27 낫 러브 떠나지 않는다 더위에 잠든 개 새벽까지 키스를 나눈 뒤 / 너를 작은 목화차 모임에서 다시 만난 일 외출 때마다 뿌린 퍼퓸 향 / 사시나무 입사귀들이 은빛으로 나부낀다 /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야? 망종이라는 말 들어봤어? / 너에 대한 거…… 누군가에게 주고 싶었던 게 마음이 아니라 그해 여름 미친듯이 퍼붓던 비를 맞으며 끝났는데 큰 창이 있는 방에서 벌어진 일들 소나기를 피해 들어간 사원 수영장 물속에서 / 갑자기 이 시간들을 모른 척할 수 없을 만큼 너는 한없이 다정해 / 보름 전 내 머리색은 더 짙었고 / 수영장 바닥 기포가 펑펑 터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 봐 흙탕물에 뭔가 움직여 돌아가는 길 노래는 듣지 말걸 수업에는 언제 올 거야 같은 반 친구에게서 메시지가 온다 좋아하는 말을 들어야 끝나나봐 너는 거짓말을 한 적이 없는데 나는 거의 끝나간다고 생각한다 고작 그것이 우리 시간이 보여준 영원이었는데 / 빈 물병을 다리 아래로 던진다 (July) p. 39 좋아하는 나라를 물으면 당신은 내가 있는 곳이 국적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나도 당신이 내 국적이었으면 좋겠지만 어떤 말실수로 이방인들은 전쟁 포로가 되니까 (검은 겨울) p. 44 생각은 늘 미래에 가서 이별을 떠올렸다 / 지옥은 늘 며칠 걸린다 / 며칠을 그렇게 보낸다 / 갑자기 맑은 날이 찾아와 / 그 심정이 언제 그랬냐는 듯 전부 가져가버리기도 하고 / 내 전부이던 너에게 / 지옥은 며칠뿐일 테니 그 며칠도 마주치게 하고 싶지 않아서 / 내가 대신 겪는 지옥이 있다 당신은 원래 천사였으면서 사랑이 어떤 건지도 모르네 / 지옥에 맞서줄 상대를 찾았던 건지도 모르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을 누군가의 입을 통해 듣는 순간처럼 /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 / 하나에 빠져 있던 마음 / 매번 속더라도 쥐어야 하는 꿈 / 등뒤로 구름이 흐르고 / 지옥까지 가기에 우리 악력은 너무 약했다 (발로) p. 57 너랑 할 때 몸이 상했었잖아 영혼에서 악취가 난다는 둥 더 젊을 때는 꿈이나 미래 좇는 일에 관심이 없었지 대신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끈적끈적한 갈색 나방의 공격을 받곤 했어 외출 시간이 길어지면 침대 구석에서 나방은 몸집을 늘리고 그것으로 살아가는 것은 계속 의식되었다 손등에 적는 올해까지 살자, 올해까지만 살자 정신에 조금이라도 해가 된다면 내 꿈은 얼마나 널 더럽혔는지 얼마나 내 꿈을 더럽혔는지 바지 속주머니를 털면 애초부터 작고 홀로였던 빈방들이 쏟아지곤 했어 너에게 닿으려 했던 내 몸은 항상 앙상했잖아 몸에 나무를 키우고 있었던 거야 겨울에서 봄으로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지 않으려던 나무는 무척 지쳐 있었지 이미 오래전에 떠난 네가 흘려주는 고름을 받아 마시며 어느 날 나무에 불이 붙기 시작했을 때 절벽에 매달린 내게 그토록 보고 싶었지만 그토록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였습니다 손톱에 낀 살점, 누구든 붙잡아주리란 심정 이대로 녹아 별이 되겠다는 날들이 나를 관통했습니다 손등에 적힌 글씨 따위 지워진 지 오래였고 너를 꺼내 나는 울고 있었습니다 불안으로 덧칠된 습작, 죽어간 시간에 매달린 열매들 훗날 떠올린 나락은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뮤리얼 벨처 양, 세 개의 습작) p. 59 언제나처럼 먹구름을 몰고 와 나아질 수 있으리란 말을 듬성듬성 꺼냈습니다 열정적인 속도로 지식을 채워가는 일 관심을 끊었습니다 / 그저 부족하나 학습에 초조해지는 것은 아마도 야망 / 언젠가 미쳐 날뛰는 말을 본 적이 있으며 저 또한 완성하고자 하는 의지가 생겨나버렸기 때문입니다 꼬리가 달린 짐승의 손에 이끌려 거리를 추억하는 일 서로에게 의지를 알려주었고 먼 훗날 어떻게 배신할 것인가…… 침묵하다 빠져나온 샌드위치 양상추를 씹었죠 초파리떼를 쫓고 무른 과일을 베어먹으며 선생님 또한 제가 만들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하셨으면 합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불행한 도구나 불행의 도구라고 부르셔도 좋습니다 완벽에 대한 것들이 인간을 어둡게 만들지 않던가요 / 의지를 잃어버린 인간들이 모여 글을 쓰고 운동이라는 것을 하고 모임을 갖고 허리 싸움을 지켜보며 (아웨나무에 부쳐) p. 69 흔들리지 않는 꿈 그것은 언제나 나를 흔들던 여름 /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길어지는 상처도 있다는 것을 알려준 (모국의 밤) p. 82 맛있는 저녁 냄새가 흘러나오는 대문 / 어떤 그림자가 기웃거린다 / 초여름, 꺼진 소파에 엎드려 / HBO 드라마를 보다 / 가족 누군가 좀비가 되어 방문을 열고 나와도 / 놀라울 리 없는 집을 잠시 나온 개 나는 이제 살길을 행복하게 갈구할 거야 / 역경이 오면 그땐 다시 떠돌이 개처럼 뜨거운 침을 흘리며 잠깐 경련하겠지만 / 그전까지 나는 모든 행복한 시간을 통틀어 / 그것을 전부 가지고 있는 여름이 되어 있을 테니 공원에서 터진 입안을 헹구고 / 어두웠다 천천히 빛으로 가득해지는 장면처럼 / 초여름, 얼굴이 상처투성이인 네가 평온하게 돌계단 아래에 기댔다 (천엽벚꽃) p. 88 여름뿐인 영화 / 해안을 따라 달리는 파란색 덤프트럭 / 갈고리 모양의 상처 / 태양이 지지 않는 백사장 / 달려오는 땀에 젖은 사내 / 얼굴이 땀으로 범벅이 된 청년의 미소 회색 티셔츠가 진회색이 될 때까지 뛰어온 청년은 다치지 않았냐고 묻는다 내가 너에게 보여준 것은 약간의 빛 보풀이 인 클로버 팔찌 숨이 쉬어지지 않는 날들 아니 너무 긴 회색의 어둠 어느 날 너는 손전등처럼 축축한 그 안을 구석구석 비췄는데 마음이 커져가도 끝나도 너에게 보여줄 수 없는 것들 나는 너에게 미안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일을 그만두고 내 나라로 돌아갈 자신이 없어 싱크대뿐인 부엌에 서서 말한다 / 네가 나의 나라니까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아 / 우리가 같은 방에 들어가면 그날부터 여름이야 / 사진을 남기자고 말한다 / 신에게 더는 되묻지 않는 질문들이 우기로 왔다 가고 / 내리쬐는 빛 아래 / 젖은 빨래 뭉치를 안고 찍은 그해 사진을 / 빨래가 타는 장면 / 불에 덴 내 손가락을 너는 입에 갖다댄다 / 누군가 문을 두들긴다 / 손님이 왔나봐 가만히 있어봐 너는 붉어진 손가락을 입에 물고 / 한 팔로 불을 끈다 / 빨래가 넘치고 누군가 문을 두들기고 문고리 잠금장치가 느슨해서 틈으로 내부가 보일 것 같다 내부가 흔들린다 우리가 키스하는 장면에서 (물에 비친 얼굴) p. 92 개는 이제 없는데 개가 물 먹는 소리가 난다 / 이십대가 기억나지 않는데 옆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이야기해야 한다 / 분수가 있는 광장, 달려가면 얼굴로 빛이 쏟아진다 / 몸으로 들어온 빛이 흰 나무로 뻗어나가는 동안 / 몸이 수천 개로 갈라지는 상상을 한다 (수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