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기억을 추억으로 완성시켜주는 것은 내게 새겨진 감각들이기에, 사라져가는 추억들을 떠올리는 것 자체가 하나의 낭만으로 변해버리기 전에, 아로새긴 감각들로 그 시절을 되새겨본다. 무뎌지지만 않는다면, 감각으로 새겨진 것들은 불현듯 떠오르기 마련이다. 너를 다시 보았을 때, 나는 너를 사랑했었다고 깨닫는 게 아니라 그렇게 느껴지던 것처럼.” 낭만이라는 단어를 굳이 따지자면 내게는 과거보다는 미래에 더 어울리는 듯하다. 낭만은 이상적인 현실에서 잠시 동안은 멀어져 꿈을 꾼다는 나만의 정의로 다가오기에 지나간 날을 돌아본다는 것을 낭만이라고 표현하지는 않겠다. 지난날을 떠올리는 것은 오히려 내게는 감상적이다. 그렇게 아프고 부끄럽고 슬프고 억울했던 날들이 이제 와서는 되게 하찮아 보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지난날들의 기억들이 쓸쓸하고 슬픔이 묻어나는데 그토록 생생했던 그날들의 장면들이 점차 흐려지는 게 싫어서인 듯. 점점 잊혀가는 그 느낌이 굉장히 싫다. 그때의 기억들이 흐려지고 나도 누군가를 잊어가는 중이라는 사실이 상기될 때면, 이제는 얼마 남아있는 것 같지도 않은 기억들이 소중해진다. 어렴풋이 생각나는 사람들과 장소들, 내 모습들을 잊고 싶지 않아 발버둥 칠 때마다 지칠 때면 감상적이라는 말보다는 낭만적이라는 말을 더 듣고 싶었던 내가 왜 더 과거에 집착을 하는가 골똘히 생각해야만 했다.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나의 낭만은 때때로는 공상적이다. 그러나 나의 과거는 감각적이다. 문득 맡게 되는 향수가 어린 나를 찾아주기도 하고, 노래를 들으며 내일의 낭만을 그려보지는 않더라도, 어린 날에 품었던 마음을 상기시키게 만든다. 지금의 사진을 보며 내일의 나를 상상하지는 않지만, 예전의 사진을 보며 오늘의 나와 맞대어보기도 한다. 사실은 그날들이 너무도 좋았기 때문에 떠올리는 게 아니라, 너무도 어리숙했기에 엉성했던 내 모습이 아쉬움에 생각난다. 물론 그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왜 그때는 이러지 못했을까. 정말 그게 최선이었을까. 그것보다 조금 더 잘 말할 수 있지 않았을까. 뒤늦은 후회를 할 때마다, 자꾸만 마음을 건드린다. 그래도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이 쓸쓸하기도 하고, 다시 돌아갈 수도 없다는 사실이 애상적으로 만든다. 쓸쓸하고, 그리우면서 순수함들이 후회만 가득했던 날의 기억을 이제 와서야 풋풋한 추억으로 바뀌게 만들었다. 되돌릴 수도 바뀌는 것도 안된다는 걸 너무도 잘 알기에, 그저 생생한 감상에 젖는 거라도 좋으련만, 점점 흐려져가는 것이 몇 남아있지도 않을 추억을 더 값지게 만들 뿐이다. 어쩌면, 사라져가는 추억들을 떠올리는 것 자체가 언젠가는 하나의 낭만으로 변해버릴지도 모르겠다. 불면 방울방울 떠다니다가 금세 터져버리는 것. 추억을 떠올린다는 건 비눗방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잡고 싶어도 못 잡는 둥둥 떠다니는 감각적인 추억을 다시 내 마음에 담아두기 위해서는 감각이 필요하다. 추억이 나에게 감각적이라면, 감각으로 추억을 상기 시켜 줄 지도 모른다. 그날을 담아두었던 사진이 있다면, 시각으로 그날을 떠올릴 수 있겠지. 창 너머 들어오는 햇살이 내 살로 닿을 때마다, 조용했던 교실에서 낮잠 자던 그때로 돌아갈 수도 있겠지. 종소리가 들리면, 허겁지겁 뛰어가던 내가 떠올려지듯이. 어느새 누군가의 손이 그리워지거나, 갑자기 들려오던 누군가의 웃음소리도 듣고 싶어졌다면. 기억은 우리가 잊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잊히게 되지만, 감각으로 아로새긴 그것들은 절대 잊을 수 없다. 무뎌지지만 않는다면. 그 소중함을 잃지만 않는다면. 나는 그때의 노래를 들으면서, 어쩌다 그날의 촉감을 떠올리면서, 불현듯 그날의 향수를 맡으면서 이제야 깨달았다. 그저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추억이 되진 않는다고. 기억을 추억으로 완성시켜주는 것은 그 순간 내게 새겨진 감각들에 있다고. 나는 무뎌지지 않았다는 걸 상기시켜주는 수많은 감각들. 그 감각들을 새겨준 사람들은 이제 추억 속으로 떠나갔지만, 이제 내가 해야 되는 건, 앞으로 다가오는 순간마다 느껴지는 이 감각들을 오랫동안 간직할 것. 어렸었던 날들을 그저 떠올릴 때는 몰랐었지만, 다시 너를 만나게 되는 날이 온다면, 나는 너를 사랑했었다고 깨닫는 게 아니라 그렇게 느끼게 되겠지. 너를 비롯해 우리의 가슴속에 묻어놨던 그날들의 윤곽이 서서히 잊힌다면, 우리는 다시 한번 그날의 바다가 들렸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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