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동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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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years ago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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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종말이 오더라도 너무 큰 기대는 말라

영화 ・ 2023

평균 3.3

라두 주데는 상영 전 인사영상에서 이 영화가 '노동착취'를 다룬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주인공 안젤라는 하루 종일 일한다. 피곤한 모습으로 잠에서 깨어난 안젤라는 챕터A 내내 운전하며 곳곳을 돌아다닌다. 영상 프로덕션의 어시스턴트인 그의 업무는 새로 맡게 된 산업재해 예방 영상에 출연할 산재 피해자들을 인터뷰하는 것이다. 흑백 16mm 필름 화면으로 촬영된 안젤라의 노동은 당장 클럽에 가도 어색하지 않을 그의 옷차림으로 상쇄되는 면이 있지만, 무수한 시간을 투입해야 하는 일이다. 졸음운전을 할 것 같다는 안젤라의 말에 상사는 독한 커피나 레드불을 마시라고 할 뿐이다. 그 사이 안젤라는 아버지의 무덤과 관련된 법적 분쟁을 겪어야 하고, 10분이라도 애인을 만나야 하기도 한다. 노동을 견디게 해주는 것은 그가 필터를 통해 '보비처'라는 이름의 남성이 되어 과장되고 폭력적인 언사를 쏟아붓는 틱톡 영상을 찍는 것이다. 그의 주변 사람들은 그가 그런 영상을 찍고 있음을 알고 있기도 하다. 안젤라 스스로 "과장을 통핸 비판"이라 말하는, 보비처라는 페르소나를 통해 벌어지는 발언들은 앤드류 테이트로 대표되는 대안우파부터 푸틴까지 무수한 현재적 문제들을 건드린다. 한편으로 영화는 1981년 제작된 루마니아 로맨스 영화 의 장면들을 안젤라의 하루와 겹쳐 놓는다. 해당 영화의 주인공 이름 또한 안젤라라는 여성이며, 택시운전사로 일하던 중 만난 헝가리인 남성과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1981년의 루마니아와 2022년의 루마니아는 이 영화 속에서 뒤섞인다. EU 최빈국이라는 불명예 속에서 외국 기업에 착취당하는 안젤라를 비롯한 2022년 루마니아의 사람들과 달리, 에 담긴 1981년의 루마니아 사람들은 (미묘한 불안감을 안고 살아가지만) 평온해보인다. 1989년의 혁명으로 차우셰스쿠가 축출되었지만 루마니아의 경제는 폭락했다. 영화 후반부, 1차선 고속도로에서 매년 수백명이 죽으며 사고가 난 자리에 십자가를 세워둔다는 안젤라의 말 직후에 잠시 등장하는 무수한 십자가의 이미지는 지금의 루마니아를 보여주는 이미지들이다. 물론 이 영화가 무겁고 진지한 영화는 아니다. 전작 <배드 럭 뱅잉>이 팬데믹 시기의 루마니아를 풍자했던 것처럼, <지구 종말이 오더라도 너무 큰 기대는 말라> 또한 무수한 아이러니와 블랙코미디, 풍자를 빼곡히 담아낸다. 흑백 필름 이미지부터 1981년도의 영화, 틱톡 필터가 입혀진 화면과 줌 화상회의 화면까지, 라두 주데는 다양한 매체를 오가며 루마니아의 현재를 산만하게 펼쳐낸다. 산만함이야말로 이 영화의 핵심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속에 놓인 사람은 물론 보는 사람까지 정신없게 만드는 산만함은 '제정신으로' 지금을 살아내는 게 불가능함을 시사한다. 챕터B에 해당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안젤라를 통해 섭외된 산재 피해자가 출연한 홍보영상의 촬영장이다. 30여 분의 롱테이크로 촬영된 이 장면은 영화가 앞선 2시간 가량 쌓아온 "과장을 통한 비판"의 모음집이다. 피해자의 엄마를 연기하는 배우 라즐로 미스케(László Miske)는 에서 안젤라를 연기했던 배우인데, <지구 종말이 오더라도 너무 큰 기대는 말라>에서는 자신이 연기했던 배역의 미래를 연기하는 것처럼 출연한다. 그것은 1981년 영화에 담긴 루마니아가 어떻게 지금에 이르게 되었는가에 관한, 광대 같은 연출자 라두 주데가 건네는 비극적인 농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