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천수경

천수경

1 year ago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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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망

영화 ・ 2023

평균 3.4

많은 것에 대한 이해력이 남들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며 살다가 내가 특별히 열등한 영역이 있다는 것을 어느 날 깨달았다. 잘 알던 사람과 모르는 사이가 되는 데에, 그런 사건을 이해하는 데에 심하게 무능해서 남들보다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을. 어떤 사람과 남이 된 후에 삶이 낯설어져서. 멀미를 느껴서. 울면서 토하고 싶어서. 멀미란, 감각의 격차에서 오는 것이라던데 앎과 모름의 격차가 내 속을 울렁이게 만든 거였을까. 우리가 나눈 숱한 순간들을 내가 낱낱이 알고 있는데, 그것들을 전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을까. 낯선 학교에 전학 간 상태의 불쾌감처럼 나를 괴롭히던 그 감각은 잠잠해졌다가도 불시에 내부 출혈을 일으킨다. 문득 내 앞에 나타난 어떤 지식이 오래 전 우리 대화의 일부였기에. 그 대화의 결말처럼 느껴지는 순간들은 언제고 다시 찾아오기에. 이를테면 피곤한 어느 저녁, 정성일의 GV가 한 시간이 넘어가던 때에, 내가 왜 차마 나가지 못하고 있나, 내 충성심은 어디를 향한 것인가 의문이 들 무렵, 정성일이 사랑을 이야기했을 때. 그가 말하는 사랑의 이론이 네가 설파했던 것과 똑같다는 걸 깨달았을 때. 집어 든 백팩을 내려놓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 영화를 봤기 때문은 아니고, 그날은 이런저런 이유로 내가 썩 좋은 어른이지 않나 생각하면서 너에게 속으로 말을 걸었다. 대화를 나눈 지가 오래되어 우리가 이젠 생판 남이라서, 나도 모르게 존댓말이 흘러나오더라. 저는 꽤 괜찮은 어른이 되었습니다. 추운 날 빠르게 걸으면서, 내 하얀 입김을 담배 연기처럼 불어내면서. 저도 이런 사람이 될 줄 몰랐습니다. 중요한 보고를 올리듯. 되뇌었다. 보고 싶다는 느낌이 얼마나 시각을 훌쩍 넘어선 감각인지, 그러니까 내 눈동자가 갈망하는 소리나 촉감, 세상에서 사라진 마음 따위를 얼마나 전부 포함하는 것인지 생각했다. 그렇게 혼자 편지를 띄워 보낼 때는 삶이 나를 보호해준다고 느끼는데도. 곧이어 나 홀로 어딘가로 굴러떨어지는 느낌이 밀려온다. 어김없이. 그래서 이 영화의 마지막에 나는 또 혼자 추락하는 기분으로 텅 빈 버스의 내부를 바라보았다. 저녁의 대중교통 풍경 속에서 자유낙하를 하는 기분이 이번엔 너무 익숙해서 멀미가 났다. 처음 보는 화면을 내가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그 격차 때문에 속이 울렁거렸다. 엔딩크레딧이 끝나기 전에 황급히 극장을 나왔다. 용맹한 사람이 된 줄 알았는데, 그런 나날들이었는데. 한 편의 영화로 나는 다시금 모든 게 두려워졌다. 이 영화를 보고 그저 흡족한 채로 극장을 나설 수 있는 사람과는 아무런 대화도 나누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