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민성

안토니아스 라인
평균 4.0
가계나 일생 전반을 보여주며 삶과 인생 어쩌고 에 대한 연출자의 생각을 드러내는 영화는 많았다. 그러나 이 영화가 특별한 이유는 너무나 익숙한 서사인 남성-부계 중심의 서사를 탈피했을 뿐만 아니라, 예술와 의례, 철학과 종교, 전쟁과 혁명에 대한 탁월한 은유가 담겨있는데도 어디 하나 더부룩함 없이 빼어나게 담백하다는 데 있다.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은 전형적 남성-영화의 전형적 서사구조를 반전한다. 주인공(들)이 여성들이고, 남성 가부장을 통하지 않고도 여성으로서의 (젠더와 대립되는 의미의) ‘여성으로서의 자존’을 드러내며 그저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줬을 뿐인데도 이 영화는 ‘페미니즘 영화’가 된다. 주인공(들)이 남성들이고 남성으로서의 자존을 드러내는 영화가 무수히 많았고, 그 영화들이 ‘가부장주의 영화’ 혹은 ‘남성영화’ 라는 타이틀을 굳이 달지 않고도 마치 모든 인간을 대변하는 듯 한 흥행과 명성을 얻었음을 생각해보면 이는 이 영화에 붙은 ‘페미니즘 영화’라는 호명은 오히려 그간의 영화, 예술계가 얼마나 남성 중심적이었는지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 영화는 분명 여성영화의 범주에 들어가지만, 그간의 대부분의 영화들이 ‘남성-가부장 영화’였음을 반증하는 ‘탈-가부장 영화’의 가장 모범적 사례라고 정의하는 것이 이 영화에 어울리는 가장 적합한 호명이라고 생각한다. 남성영화들, 가부장영화들이 아무런 의심 없이 그저 ‘영화’ 혹은 ‘작품’이라고 불리는 시대에서야 이 영화는 ‘페미니즘 영화’겠지만 글쎄. 이 영화가 ‘아직은 페미니즘 영화’라서 이들이 평등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런 평등한 세계관은 모든 영화가, 그리고 사회가 당연히 전제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볼 때 이건 그냥 ‘영화’다. 그래야만 한다. 그렇다면 그간 남성-영화에서 ‘여성’이란 어떤 존재였는지를 이야기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수많은 ‘남성-서사’ 영화에서 여성은 (남성의) 뮤즈가 되고 (남성의) 구원이 된다. 이런 영화야 세상에 널리고 널렸지만, 한국영화의 대재앙이라고 할 수 있는 김기덕(그리고 국내외의 수많은 김기덕들)의 영화를 생각해보자, 강간당하는 여성을 클로즈업하면서 (남성을 위한) 모성을 이야기하고 또 역시 강간당하는 여체를 줌인하면서 (오직 남성의) 고통과 (오직 남성을 위한) 구원을 말한다. 또 반대로 (남성의) 번뇌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스크린 속에서 한바탕 난장이 끝나고 나면, (남성)평단의 호평 속에 다시 한 번 난장판이 벌어진다. 평론가들과 심사위원들은 인간의 구원이니 모성이니 하는 단어들을 잔뜩 쏟아내지만, 사실 이건 그들이 여성을 동등한 사람으로 보고 있지 않고 오로지 영화적 수단으로만 보아왔다는 자기고백이다. 이런 야만에 좋은 평을 주고 귀한 상을 주는 그 들 또한 여성혐오의 공범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본 <안토니아스 라인>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김기덕류의 자칭 ‘아티스트’들의 고환에 꼬챙이를 박아 넣는 듯 한 쾌감을 주었다. 스스로를 완전한 이성애자 남성으로 정의하는 내게, 젠더구분의 소멸, 즉 ‘여성성’이나 ‘남성성’이라는 단어에서 작은 따옴표 ‘’ 가 제거되는 상황은 이른바 남성성의 경우든 이른바 여성성의 경우든 익숙하지 않다. 특히 영화에서 간혹 보이는 자연과 여성성에 대한 은유적 결합 같은 에코 페미니즘적 은유는 이해는 할 수 있어도 받아들이긴 어려운 것이다. 따옴표에서 벗어난, 젠더로 설명 할 수 없는 이른바 자연적 여성성이라는게 존재한다면, 도대체 ‘자연적 남성성’은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 (실제 남성의 생물학적 본질과는 무관한 개념인) ‘남성성’의 이름을 가진 가부장적 폭력이 여전히 사회의 중심에서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데, 젠더 개념을 통해 겨우 가둬놓은 ‘남성성’을 다시 따옴표 밖에 풀어두는 건 글쎄, 너무 위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런가 안토니아의 일가가 보여주는 대안적 삶의 모습을 ‘여성적’ 혹은 ‘모성적’ 가능성으로 해석하고 싶지는 않다. 여성이 되었든 남성이 되었든 장애가 있든 성적지향이 어떻건 간에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렇게 당당히 평등하고 행복하게 자존(自存)하며, 자존들이 만들어낸 다양성과 가능성 위에서 공존 하는 것이다. 바로 안토니아 가족들처럼.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은 크룩핑거였다. “이 세상은 고뇌하는 영혼과 악마로 가득찬 세상” 이라고 말하는 크룩핑거는 전쟁이 만들어낸 참상을 직접 목격한 지식인이다. 그는 절망에 매몰되어 더 이상 어떤 새로운 가능성도 만들어 내지 못한다. 이와 대비되는 인물은 안토니아의 손녀, 테레사이다. 테레사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상상력을 잃어버린 구체제적 지식에 저항하는 새로운 지식을 의미한다. 교수를 쏘아붙이고 강의실을 박차고 나가는 테레사는 어쩌면 구체제에 맞선 68혁명과 그 이후의 새롭게 선언된 (강의실 바깥의)일상세계에서의 담론적 가능성들을 의미하는게 아니었을까. 마초 농부 댄의 일가는 구체제와 가부장적 폭력을 상징한다. 댄과 그의 가족은 크룩핑거와 마찬가지로 구체제를 표상하지만, 크룩핑거의 관념적이고 자폐적인 세계와 다르게, 댄의 세계는 일상세계 그 자체이다. 이런 댄의 세계에서 안토니아의 대안적 세계로 넘어오는 피억압자 디디와 미친 입술은 이런 일상세계의 아래로부터의 변화 가능성을 의미한다. 마침내 댄의 세계는 붕괴한다. 동생이 형을 죽이고 동생은 기르던 소에게 죽는다. 댄의 세계를 붕괴시키는 건 댄의 세계가 가지고 있는 스스로의 모순, 폭력성 그 자체이다. 영화의 주요 메시지 중 하나인 삶과 죽음에 대한 긍정적 은유는 이해는 할 수 있으나 동의 하긴 어렵다. 삼포세대의 인생관은 안토니아나 레타보다는 크룩핑거에 더 가까운 것이리라. 삼포세대의 인생관에서 자유롭다고 할 수 없는 내겐 산다는 것, 혹은 태어나고 낳게 한다는 것이 아름답게 그려지는 것을 마냥 긍정할 순 없다. 임신이나 죽음을 긍정하는 거야 뭐 개인의 취향이라고 생각하지만, 출산을 긍정하는 건 전혀 다른 일이다. 이 폭력적 세상에 ‘낳아짐을 당한’ 아기는 대체 무슨 죄가 있어서 인생 내내 고통 받아야 하는가. 이런 내 미감대로라면, 오로지 이 관점에서만 죽음은 축복일 수 있으며 크룩핑거가 해냈듯 자살이야 말로 ‘생의 의지’라는 자연-DNA의 야만에 맞서는 인간 이성의 증명이자 승리이다. 그러나 크룩핑거 만큼의 용기도 없고 수준 높은 이성도 없는 평범한 우리에겐, 거저 주어진 이 삶을 살아간다는 것, 더 나아가 온전히 스스로 당당히 존재하는 것, 자존(自存)한다는 것은. 더 나은 세상과 더 나은 삶의 양식에 대한 변화의 가능성을 찾아가는 행위이어야 한다. 이는 자존을 완성하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은 이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는 것, 그 가능성을 믿고 삶에 당당히 맞서는 것이 그 시작이라 말한다. 그리하여, 살아간다는 것, 번성한다는 것은 예술이 되고 그 예술은 의례가 되며 구습을 대체한다. 또한 진리를 증명하는 일이기도 하며, 생 속에서 구원을 찾는 일이다. 자존은 저항이 되고 또한 공존이 되며, 타인을 변화시키고 마침내 세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 혁명에 이르게 된다. 어차피 살아갈 거라면, 마땅히 그들처럼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