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최형우

최형우

3 years ago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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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책 ・ 2022

평균 3.9

2023년 09월 17일에 봄

자신을 부정하고 싶지 않아 쓸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 확실히 진실되고 깊이 있어졌다. 읽고 나면 감사하게 되는 글이 있다. 바로 이런 글이다. (2023.09.18.) <한밤에 두고 온 것> 4/5 그 사람의 진심, 외면하면 잊힐 줄 알았으나 더 큰 죄책감으로 남아 버렸다. 진심을 말하지 못한 죄책감을 덜기 위해 언제 올지 모를 내일에 진심을 말할 것을 약속한다. - 그녀는 한껏 격앙되었던 감정을 추스른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말은 꺼져 있는 줄도 몰랐던 내 안의 수많은 전구에 동시다발적으로 불을 밝혔다. "그런데요. 살다 보니 알겠어요. 그때 내가 그렇게 결혼한 건요, 가난 때문이 아니었어요. 나는 그냥 겁이 났던 거예요. 이러다 우리가 뭐라도 될까 봐, 나를 향한 순영이의 마음이 진실하다는 걸 아니까, 내가 그 마음을 누구보다도 절실히 원한다는 걸 아니까, 하지만 그런 건 잘못됐고 비참한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도망친 거예요. 그 애는 마지막까지 용기를 냈는데...... 나는 참 바보 같죠?" (38쪽)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4/5 진실되게 쓰기 위해 끝을 기약할 수 없는 수정의 연속,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야기를 '쓴다'는 것의 의미. 퀴어 작가들의 성숙과 성장에 관해 이야기한다. 수정되는 정체성도 다루고 있다. - "차라리 무성애자였으면 좋겠어. 아무 감정도 못 느꼈으면 좋겠고 누구도 사랑할 수 없으면 좋겠어." /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런 걸 써 놓고도 까맣게 몰랐는지, (중략) 다시 만난 주호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했을 때 주호는 대수롭지 않은 듯 웃어념겼다. 자기는 내가 말하기 전까지 그 책에 그런 문장이 있는 줄도 몰랐다고 했고, 사실 그런 편견은 이제 너무 뻔해 상처도 되지 않으니 더는 마음을 쓰지 말라고도 했다. (81-82쪽) - 나는 오래전부터 그날에 대해 써 보려고 한다. 뭔가를 써야 할 때마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날이 다가와 나를 건드렸을 뿐 아니라, 그날에 대해 쓰지 못하면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로부터 얼마만큼 멀어졌는지 나 자신에게조차 증명할 길이 없을 것만 같았으니까. 하지만 그날에 대해 쓸 때마다 나는 어김없이 내 한계를 확인하고는 지운다. 어느 날은 내가 너무 투박한 나머지 우리를 흐릿하게 뭉개 놨다는 판단에 지우고, 어느 날은 내가 너무 성급한 나머지 우리를 매끄럽게 정리해 버린 것 같다는 생각에 지우며, 또 어느 날은 내가 쓴 것들이 모두 궁색한 자기변명 같다는 느낌에 지운다. 그리고 그렇게 지우고 또 지우다 보면 어김없이 어떤 대사를 마주한다. 끝내 지우지 못하는, 아니 모조리 지워도 속절없이 다시 쓰게 되는 그 대사를. / 내가 써낸 그 모든 실패들 속에서도 인주 씨는 한결같이 나를 보며 말한다. / "쓰면 좋겠어요. 우리에 대해 쓰면 좋겠어요." (83-84쪽) <윤광호> 4.5/5 사회에 떠다니는 공기에 관한 작품. 답답하고 유독한 공기가 끝내 젊은 투쟁가를 무너뜨렸다. 하지만 고맙게도 그 공기의 독성을 걷어내려는 남은 사람들이 있다. 그 눈물겨운 보고서. - 광호 씨, 11년 전 우리의 내기를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당신이 이겼다는 소식을 뒤늦게 전합니다. 당신은 그냥 이긴 것도 아니고 아주 크게 이겼어요. 왜냐하면 당신 앞에서 절대로 이쪽 얘기는 쓰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던 제가 이제는 이쪽 얘기가 아닌 건 굳이 써야 할 이유가 없는 사람이 되었거든요. 어쩌다 이렇게 되어 버린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저는 당신이 이겼기에 다행인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당신이 당혹스러워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당신을 자주 떠올리면서요. 지금 당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게 어디든 그곳은 당신이 오래도록 염원했던 미래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당신의 버전으로 당신의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기를. / 그럼 그때까지 안녕. (123-124쪽) <11시부터 1시까지의 대구> 5/5 다시 보아도 놀라우리만치 생생한 현실의 풍경과 이면의 이야기. 묘하게 이어지는 동질적 관계!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거라는 말은 결국 읽는이에게 하는 말 같다. 상기된 기분으로 답정너 식 질문을 해오는 화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 나는 지금도 누군가를 겉모습만으로 혹은 분위기만으로 퀴어로 오해하고 단정하는 짓을 자주 했고 - 제발 한 사람이라도 더 있었으면 좋겠다! - 그건 아마도 이번 생이 끝날 때까지 그만두지 못할 터였다. 물론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았다고 해서 퀴어가 아니라는 법은 없고, 정체성이라는 게 세상의 분류처럼 그렇게 말끔하고 자명하지만은 않다는 것 역시 모르지 않았지만, 어쩐지 내 게이더는 원체험부터 형편없었다는 게 증명된 것 같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닐 수 있다면 아닌 게 낫지 않을까. 그럴 수 있다면, 그래도 된다면 한 사람이라도 덜 외롭고 덜 고통스러운 게 낫지 않을까. 이런 비관은 항상 마음속 어두운 곳에 웅크리고 있다 불쑥 기어 나와서는 내 삶을 좀먹었고, 내가 날마다 나를 용기와 자긍심으로 단련해도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다.(145쪽) <9월은 멀어진 사람을 위한 기도> 4/5 내 삶에 죽음이 던져지며 생겨난 파문은 언제 그칠지 모른다. 그 파문을 누군가만은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 나와는 크게 관계가 없는 제3자가 그 대상이라는 점에서 특히 공감이 간다. - 어째서 나는 '물'의 죽음을 무결한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가. 어째서 나는 불온해 보이는 것들을 모조리 지우려 하는 것이며 게이는 다 그렇게 사는 것도 아니고 다 그렇게 죽는 것도 아니라고 해명하고 싶어 하는가. 내가 자기 검열을 반복하며 끊임없이 의식하고 있는 시선의 주인은 도대체 누구이고, 그 시선으로부터 허락받기 위해 밀어내거나 끊어 내는 사람은 또 누구인가.(205쪽) <알 것 같은 밤과 대부분의 끝> 4/5 엄마에게 아웃팅한 아들의 이야기, 엄마와 사뭇 터놓고 얘기하는 관계가 나온다. 소설이 뒤로 갈수록 약간은 불친절하다. -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살고자 이 바닥에 나온 것이면서도 나를 좀처럼 긍정하지 못하는 내 모습에 수시로 서글퍼졌고, 내가 이 짓을 과연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막막해 자주 비관했다. 그리고 이런 게 게이 라이프라면 게이를, 아니 인생을 그만두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습관적으로 했다. 물론 그런 비장한 결론에 도달한 날에도 어김없이 지나가는 남자들에게 눈이 돌아갔지만.(226쪽) <어떤 소설은 이렇게 끝나기도 한다> 4.5/5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쓸 수밖에 없는 소설가도 엄마에게만은 자신의 정체성을 말하기가 어렵다. 그 절절함이 그대로 느껴진다. - 하지만 나는 내가 써놓은 유년 시절의 기억과 상처들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다 얌전히 종이를 찢었다. 엄마를 탓하고 싶고 책잡고 싶어 기를 쓰고 있는 내 모습이 너무 어리석고 유치해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성장을 위해 부모의 세계에 필연적으로 균열을 내야 하는 10대가 아니었고, 엄마도 더는 자신의 포용력이나 회복력을 시험받아야 하는 학부모가 아니었다. 그 시절로 돌아가기엔 엄마도 나도 너무 멀리 와 있었다.(264쪽) - 나는 K의 헛발질에 긴장이 풀리면서 피식 안도의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한 박자 늦게, 아니, 서너 박자쯤 늦게 깨달았다. K가 내 에세이집에 등장한 애인을 당연히 남자라 생각했다는 것을. "야!" 나는 순간적으로 가슴이 먹먹해져 K를 불렀다. 굳이 되묻지 않아도 K가 아주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을, 네가 누구를 사랑하든 우리는 달라질 게 없다고 말하고 싶어서 그동안 나를 만나려 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왜?" "야!" "아, 왜?" "야!" 나는 갑자기 터져 나올 것 같은 울음을 애써 삼키면서 말했다. "넌 진짜......" "진짜 뭐." "고마워."(284-285쪽, 이 소설집에서 가장 마음이 따뜻해지는 부분 중 하나) 평균 : 4.2857/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