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iemoon

안녕이라 그랬어
평균 3.9
2025년 08월 09일에 봄
<홈 파티> 예측 범위를 벗어나겠다는 존엄의 선언. 숨기기 위한 노력이 무색하게 들통나는 가난 앞에서 이연은 더는 마냥 아연한 표정만 짓지 않는다. 저들이 철 모르던 시절 치기와 사치로만 간직하는 예술이 이연에게는 더 많은 것을 가르쳤으므로. 숨기기 위한 연기가 아닌 받아치기 위한 기술을, 무안 주려는 시도와 무례에 굴하지 않고 반사해내는 얼굴을 일러주었으므로. 세상에 그렇게 나쁜 사람도 착한 사람도 없다는 품 너른 인식 속에서도 어떤 순간의 악의와 호의를 구분 지을 줄 아는 인간. 그 인간이 아는 것을 넘어 지지 않아서, 지지 않는 그의 태도가 ‘우아’를 고집하는 이들보다 우아해서 너무 좋다. <숲속 작은 집> 고맙지도 않으면서 고마움을 흉내내는 제 모습에 기꺼이 속아 넘어가는 인간. 고마우면 고마운 거지 내가 고맙다고 했는데 너는? 마치 받을 게 있다는 듯 상대의 반응을 집요히 쫓는다.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줬던 인사를 냉큼 회수해오고. 은주는 돈이 얽힌 사연에 눈이 밝고, 돈이 좌우하는 환경에 역함을 느끼지만 안다고 자유로운 건 아니다. 돈으로 해결되는 일이 있다는 감각, 결국 관건은 돈이라는 사실에서 은주 자신조차 멀지 않기 때문이다. 돈이 다가 아니길 비는 한편 돈으로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길은 굳이 피하고 싶지 않은 마음. 지불한 돈에 걸맞은 보상을 바라는 마음. 은주는 제 지저분한 마음을 쳐다보기가 싫다. 분명 제게는 선량한 조각도 남아 있으므로. 그렇다고 은주의 행동만 기만이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지호는 감히 ‘기만’이라는 단어를 스스로 언급함으로써 자신이 저지르는 것은 ‘기만’이 아닌 것처럼 포장한다. 물론 은주와 지호의 기만은 서로 다르다. 은주는 스스로를 기만하고 지호는 타인을 기만한다. 예컨대 지호의 귀족적 천진함, 무심한 순진함 말이다. ‘진짜로 알아서 하든가, 고마워라도 하든가’라고 말하는 지호는 모르지 않다. 그는 그저 알면서 모르는 척할 뿐이다. 그것을 모르는 것이 진정 귀족적이므로. 요컨대 지호는 자신이 알아야 할 것과 알지 않아도 될 것을 진작 판별했다는 것이다. 지호의 기만은 그렇게 타인을 향한 노골적인 천대로 이어진다. <좋은 이웃> 아주 미세한 차이일지라도 그것이라도 붙잡아 내 밑으로 사다리 획 하나를 더 그어야만 안심이 되는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 타임머신 정도는 있어야 넘볼 만한 커다란 차이에는 별 감흥이 없어 보이는 이들에게 가장 치명적인 건 목격 가능한 차이다. 같은 아파트 내 다른 사정, 비슷한 처지에서의 형편 변화. 여전히 좋은 이웃, 그러니까 좋은 사람이 되겠다는 마음이 한 켠에 자리하는 가운데 좋은 사람이 되는 것쯤 별로 중요치 않다는 목소리가 몸집을 키우고, 주희는 돈이 부족한 것, 부족한 돈 때문에 삶이 팍팍해지는 것 외에 스스로가 변하는 것을 가장 견디기 어렵다. 시우의 엄마도, 시우도, 호준도 모든 게 다 ‘돈’ 때문이라고,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 생각하며 간단히 해치우려고 하지만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음을, 핵심은 돈에 있지 않음을 주희는 잘 알고 있다. 어쩌면 주희는 그리하여 남들과 조금 다른 이유로 ‘돈’이 무섭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이물감> 미식을 즐기기 위한 섭취와 생존을 위한 섭취의 속도 차. 향유하는 삶과 쏟아지듯 들이닥치는 삶의 속도 차. 두 가지가 서로에 대한 은유로 작동하는 단편. 나이 듦도, 관계의 망가짐도 알아챌 새 없이 밀려든다. 돌이켜보려 해도 모든 건 이미 지나가 버린 뒤다. 애써 다시 들춰보려 해도 그 하나만 건져올릴 수 없다. 이제껏 쌓인 줄도 몰랐던 분노, 억울함, 모욕감이 함께 딸려 올라오고, 쓰린 마음 뒤로 수치심까지 따라온다.흥미로운 점은, 미식이든 회식이든 어떤 이유로든 식사 자리가 길어지면 그만큼 ‘말’이 끼어들 틈도 많아진다는 것이다. 회식 자리에서 기태는 섣불리 세대론 논쟁에 끼어들었다가 신입과 얼굴을 붉히고, 고급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는 옆자리에 앉은 여성과 차셰프의 대화를 엿듣다가 어쩐지 모욕당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오랜만에 찾아온 긴 식사 시간인데, 꼭 탈이 나고 말썽이 생긴다. 그것도 꼭, 사람으로 인해. 이마저도 삶에 대한 은유처럼 느껴져 곱씹을수록 조금 역한 기분이 들었다. 이 질겅질겅한 삶을 내가 씹어 삼키고 있는 것만 같아서. 틈 하나 없이 완벽하게 짜인 구조가 돋보인다. 앞의 세 편과 비교했을 때, 완성도가 가장 높은 단편. <레몬케이크> 알면서도 당한다. 기어이 그 설문지를 읽겠구나, 읽고 울겠구나 했는데 읽는 건 주인공이고 우는 건 나다. '인생은 즐거운 것이다'에 아니오를, '지금 내가 살아 있어서 기쁘다'에 예라고 답하는 마음을 알 것도 같아서, 아니 사실은 가늠조차 할 수 없게 모르겠어서, 대체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걸까 아득해져서. 인생이 즐겁지 않아도 기쁠 수 있다는, 기뻐하는 건 내 몫이라는 태도 앞에서 조금은 겸허해졌다가 그런 사람이 왜 자꾸 쪼그라들기만 하는지, 목소리는 왜 자꾸 작아지는지, 등은 왜 자꾸 굽고 어깨는 왜 자꾸 처지는지, 억울한 물음이 차올라 서글퍼진다. 엄마의 현재는 곧 나의 미래이기도 하므로 기진은 엄마 몫까지 삶을 야속해하기로 한다. 어쩌면 샴페인을 따기에 딱 적절한 '좋은 날' 같은 건 세상에 없다고 기진은 실감한다. <안녕이라 그랬어> <괜찮아, 사랑이야>라는 드라마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사랑이 언제나 행복과 기쁨과 설렘과 용기만을 줄 것이라고 생각해?" “고통과 원망과 아픔과 슬픔과 절망과 불행도 주겠지. 그리고 그것들을 이겨낼 힘도 더불어 주겠지. 그 정도는 돼야 사랑이지” <안녕이라 그랬어>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사랑을 이야기한다. 사랑이 우리를 아프게 할지라도 그것으로 우리는 반드시 무언가를 배운다고. 사랑이 우리를 가르친다고. 그러니 그 사랑을 내게 데려온 사람에게는 안녕을 빌어줄 수밖에 없다고. 잘 가라는 인사를 나눌 수는 없을지언정 사는 동안 평안하라고, 잘 지내라고 혼자 기도할 수는 있다고. 나를 이런 사람으로 키워주어 고맙다고 남몰래 말을 건넬 수밖에. <빗방울처럼> 터지지 못해 고여 곪고 부패한 마음. 가장 먼저 툭 떨어지는 마음은 당장의 고통이고, 비워내고 난 다음에는 다른 마음이 온다. 조금 더 살겠다는, 삶에 대한 애착 같은 것. 누군가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안부 한 줄만 물어도 다시 살아나는 힘이 있음을 실감한다. 작가 주변에 소설과 같은 경험을 한 이가 있지 않았을까, 그가 조금 더 살길 바라는 마음으로 쓰지 않았을까 감히 가늠해본다. 이렇게 꽉 닫아서 살라고, 살 수 있다고, 살고 싶어질 거라고 단언하는 데에는 이야기를 이야기로써 다루는 것에 그치지 않고 누군가에게 응원을 전하고 싶은 작가의 마음이 담겨 있는 것 같아서. * 소설의 완성도나 세련됨의 정도로만 치면 <홈 파티> <이물감>이 압도적이나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좋은 이웃> <레몬케이크> <숲속 작은 집>이 가장 좋았다. 이야기를 넘어 내 삶으로 파고들어온 작품이기 때문. 김애란의 이번 단편집에는 돈과 관련된 모순된 마음이 빼곡히 적혀 있다. 신형철의 말대로 “상향 대결 이후의 자괴감 혹은 하향 대조 이후의 수치심”이 숨김없이 그대로. “우리에게 예술가가 필요한 이유는 어떤 공동체도 자신의 마음을 전부 알지는 못하기 때문이다”(R.G. 콜링우드)라는 말을 김애란의 소설을 통해 그저 진리처럼 받아들이게 된다. 내 마음이지만 어렴풋하게만 알고 있던 마음을 들여다본다. 초라하고 추해서 외면하고 싶었던 그 마음들을. 내게는 아직 ‘막는 나’가 남아 있을까? 아직은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