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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 색> 시리즈 / 자유, 평등, 박애라는 허울만 남은 이념의 재고. (※ 긴글 및 스포주의) <세 가지 색> 시리즈에서 다루어지는 주제ㅡ자유, 평등, 박애라는 이념ㅡ는 어딘가 뒤틀려 보인다. <블루>는 실존적인 자유를 말한다. 해방된다는 것, 자유로워진다는 건 그저 도망치고 피하기보다는 분명 정면에서 맞설 때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나를 얽매던 상대의 부정함을 발견함으로써 그에 대한 죄의식을 씻어내는 게 참된 해방 내지 자유일까. <화이트>는 관계란 언제든지 바뀔 수 있음을 보여주며 평등을 말한다. 그러나 상대방을 밑바닥으로 떨어뜨리고, 자신이 그 위로 올라서며 관계를 역전시키는 모습에서 진정한 평등의 가치를 찾을 수 있을까. <레드>는 어떤 우연의 형태를 통해 결국 우리 모두는 서로 관계함을 말하며, 그런 관계 속에서의 치유를 찾는다. 그러나 수백 명이 죽는 페리 사고에서 익숙한 이들의 생존에 안도하는 것만으로 온전한 박애의 정신을 실현하는 걸까. <세 가지 색> 시리즈는 모두 인물의 실존적인 회복과 각각의 이념을 결부한다. 다만 이념을 강조했다기엔 어딘가 부족하고, 보기에 따라선 논쟁의 여지가 있을 정도로 의문이 든다. 물론 그렇다고 세 영화가 일련의 이념들을 오해했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개인적으론, 의도적으로 뒤틀고 불완전한 모습의 이념적 화두로 새로운 사윳거리를 던져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영화의 주제가 이념 자체다 보니, 이념들에 대해서 다시 한번 곱씹어보지 않을 수가 없다. 프랑스 혁명이 남긴 자유, 평등, 박애가 진정 인류 보편을 위한 것이었을까. 세 가지 이념이 조화롭게 병존할 수는 있을까. 애당초 실현 가능한 것이긴 할까. 프랑스 혁명은 영국과 달리 평등, 박애의 가치를 내세우며 민중까지 포섭했다. 그러나 혁명의 출발점이 부르주아였다는 점은 결코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민중을 포섭한 것도 진정 그들을 위해서였다기보다 그저 혁명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보니 세 이념이 조화를 이룰 리는 만무하고, 그 어느 것 하나도 사회에서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건지 모른다. 혁명을 이뤄낸 백인 부르주아 남성만이 특권을 누렸고, 나머지는 여전히 도태될 뿐이었다. 그렇게 혁명을 가능케 한 자유, 평등, 박애라는 정신은 허울에 불과한 채 정작 그 실현은 요원해지고 말았다. 이후 등장한 (프랑스) 사회주의의 테제가 혁명의 근본 이념을 실현하는 것이었다는 점은 앞선 현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역시 점차 변질되었고, 결과적으로 실패하며 무너졌다. 한편 키에슬로프스키의 폴란드 역시 그렇게 무너진 사회주의 국가 중 하나다. 그렇다면 현대의 모습은 어떠할까. 프랑스 혁명을 통해 주창된 자유, 평등, 박애가 지금에 이르러서는 사회에 자리를 잡았을까. 우리는 그러한 이념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있을까. 여전히 세 이념은 그 속은 텅빈 채 인류를 위한 보편적 가치라고만 공허하게 칭해질 뿐이다. <세 가지 색> 시리즈는 인물들의 실존적인 회복을 그려내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딘가 불완전한 모습을 띤 이념을 통해 관객에게 묻는다. 자유, 평등, 박애란 대체 무엇이며, 그것의 형태는 어떠하며, 정말 온전한 가치로서 실현 가능하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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