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할 것이 그리 많지 않은 영화이나 그냥 아쉬운 마음에 몇 자 적어본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지난 10년간 가장 유니크한 공포 영화라는 봉준호 감독의 찬사는 사실 그다지 와닿지가 않았다. 영화를 보면서, 영화를 보고 나서 지난 10년간 이보다 유니크하고 완성도 높은 공포 영화가 스무 개는 족히 떠올랐던 것 같다. 물론 유재선 감독이 봉준호 감독의 연출부 출신인 점도 있고, 봉준호 감독의 후배 사랑과 영화계 사랑이 워낙 지대해서 이런 립서비스를 많이 해주시는 건 알고 있다만, 이 영화를 끊임없이 봉준호와 연결지으며 마케팅을 하는 걸 계속 보고 있자니 약간 짜증이 난다. <잠>은 패기 넘치는 신인 감독의 영화가 아니라 영화를 좋아하는 모범생이 만든 영화 같다. 그렇다고 색깔이 없는 영화라는 건 아니다. 일단 완성도의 측면에서 상업영화임을 감안하더라도 샷과 리듬이 굉장히 깔끔했고, 오브제의 활용이나 대사의 활용에서도 독특하고 재미있는 요소들이 여럿 있었다. 음악의 활용 또한 (헥산 클록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는 사운드였으나) 준수했고, 선택과 집중을 꽤나 잘해낸 영화다. 이는 과거 <콜>로 데뷔한 이충현 감독에게서도 많이 느껴지는 부분들이었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영화가 지나치게 안전한 길만 택한다는 점이다. 초반에는 신선한 소재로 몰입감을 자아내었으나, 이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기대 이하로 심심했다. 정유미가 연기한 “수진”이 지키고자 하는 건 결국 ‘가족’이라는 한 단어로 귀결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소비된 강아지와 갓난아기는 뭐랄까, 자극을 주며 공포감을 자아내기에는 없느니만 못한 것이었다. 큰 논란이 있었으나 절대 안전한 길을 택하지 않고 과감하게 몰아붙였던 <랑종>이 더욱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또한 극이 전개되면서 점차 비중이 커지는 오컬트적 요소에 대해서는 왜 수진이 이러한 오컬트적 망상에 빠져드는지 영화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았다. 이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면 그래서 그런 오컬트적 망상이 사실이었는가, 무엇이 진실이었는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부부의 심리다. 영화는 지극히 1인칭스러운 시점으로 시종일관 전개된다. 수진의 시점으로 전개된 1장과 2장, 그리고 현수의 시점으로 전개된 3장. 영화에서 “진실”이라고 느껴지는 것들은 사실 모두 이 부부의 관점일 뿐이다. 그렇기에 더욱 이들의 심리 묘사에 힘을 쏟았어야 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지나치게 장르영화의 안전한 길을 택한 탓에 모든 것이 흐지부지하게 느껴진다. <잠>은 분명 근 수년 간 한국 공포 영화가 답습했던 클리셰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무속 신앙 혹은 오컬트적 요소가 들어가지 않으면 미스터리를 자아낼 수 없고, 그 저변에는 항상 사회 문제에 대한 함의가 깔려 있으며, 꼭 가족이 타겟이 되어 위협과 공포를 느낀다. <잠>은 이러한 클리셰들을 여타 괴작 공포 영화들보다 훨씬 유려한 연출력과 집중력으로 나름 극복해낸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보면서는 기시감과 허탈함은 여전했다.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하는 후반부는 솔직하게 말하면 <침입자>나 <목격자>, <클로젯> 등등의 영화의 후반부에서 느꼈던 감정과 대동소이했다.
요새는 더더욱 무엇이 좋은 영화인가에 대해서 선뜻 답을 내리지 못하겠다. 난 이게 OTT 시장의 활성화와 꽤나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영화의 최전성기였던 2019년과 대침체기였던 그 이후를 겪고 나니 이미 사람들이 급을 나눠왔던 TV시리즈와 영화의 경계는 많이 허물어진 상태였다. 난 그래도 극장에서 보는 영화만이 주는 고급스러운 톤 앤 매너와 응집력은 대체할 수 없다며 어떻게든 영화계를 응원해왔지만, 요즘 극장에 걸리는 영화들을 보다 보면 사실 OTT 시리즈들과 때깔도 큰 차이가 없으며 응집력의 경우 오히려 OTT 시리즈보다 지루하거나 알맹이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기에 나 또한 영화를 바라보는 눈이 점점 깐깐해지고 있다. 요즘은 영화를 볼 때 “이게 왜 장편 극영화여야 하는가”를 가장 많이 질문한다. 예전 같았으면 굳이 하지 않았을 질문이다. 그런 점에서 <잠>은 왜 장편 극영화여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의 답을 충족시키지 못했다고 느꼈다. 오히려 중단편에 더 어울리는 느낌이며, 장편 영화가 지녔으면 하는 힘을 느끼지 못했다. 딱히 구조적이거나 문학적으로 느껴지지 않음에도 영화를 타란티노마냥 장 단위로 나눠놓은 것도 되려 촌스럽다고 느꼈고, 이선균과 정유미가 빼어난 연기를 보여줬음에도 정작 이들을 담는 카메라에는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주연들이 이런데 짧게짧게 소비되는 조연들은 오죽할까. 이 모든 게 부부의 망상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주변 인물들은 동요하지 않는다. 층간 소음이나 부부 관계나 몽유병이라는 소재나 애초에 진지하게 다룰 생각이 없는 듯한 인상이다.
이 영화의 평들을 읽을 때 “신인감독”이라는 말이 많이 보인다. 십분 이해는 된다. 일단 영화감독으로 데뷔하는 것 자체가 말도 안되는 천운인데 첫 데뷔작이 이렇게 준수한 완성도라면 분명 빼어난 성과를 얻어낸 셈이다. 하지만 업계의 상황 같은 거 차치하고, 오롯이 영화를 사랑하는 팬 입장에서는 끊임없이 아쉽다. 왜 우리가 신인감독이라는 이유로 베네핏을 주어야 하는가? 타란티노의 <저수지의 개들>에 대해서 ”신인감독치고“라는 말이 나왔었나, 셔젤의 <위플래쉬>에 대해서 ”신인감독치고“라는 말이 나왔었나. 물론 그런 수식어들이 등장했지만 그렇다고 그게 메인이 되는 영화들은 아니었다. 결국 이 영화들이 위대한 데뷔작이었던 이유는 신인감독임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안전하고 지루한 방향으로 가져가지 않고 끝까지 위험한 모험을 해내며 영화만의 가치를 지켜냈기 때문이다. 당장 이런 기념비적인 걸작들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나라의 근 몇 년간 데뷔작 중에서도 몇 가지를 언급할 수 있다. 김의석 감독의 <죄 많은 소녀>, 홍의정 감독의 <소리도 없이>, 김세인 감독의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박세영 감독의 <다섯 번째 흉추> 등등...물론 <잠>이 중저예산 급의 상업영화라는 점은 인지하고 있지만 말했듯이 순전히 영화를 사랑하는 팬 입장에서 이야기한다. 최근 젊은 나이에 데뷔한 감독들의 영화를 보면 항상 스타일과 완성도는 빼어나지만 집요함과 과감함이 결여되어 있다. 나홍진 감독의 데뷔작이었던 <추격자>가 얼마나 집요하고 과감한 작품이었는지를 생각해보면 여전히 아쉽다. (덧붙여서 왓챠의 코멘트를 읽다 보니 이 영화에서 봉준호와 기요시, 심지어는 아리 애스터를 읽어내는 사람들이 있던데 제발 나에게 설명을 좀 해주면 좋겠다. 난 이 영화에서 위 세 명의 감독들이 공통적으로 지니는 독창적인 시선과 집요한 탐구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잠>은 나에게 어느 쪽으로든 감독의 색깔이 담긴 영화가 아니었고, 그렇다고 영화 자체만 보더라도 그다지 매력이 느껴지지 않는 영화였다. 안전한 입봉을 위한 안전한 시나리오이자 안전한 영화로 느껴졌다.
*사족인데 박평식 평론가가 이 영화에 7점을 주었다는 게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 이래서 평론가의 별점 시스템이 문제다. 분명 평론가들도 그 수많은 영화를 10개의 별점 카테고리로 구분하는 걸 좋아하지 않을 거고, 같은 별점인 영화들이 동급의 영화라는 것도 아닐텐데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을 때가 많다. 이게 정말 다크나이트,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바스터즈, 곡성, 데어 윌 비 블러드, 조디악, 올드보이와 같은 점수를 받은 영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