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양기연

양기연

7 years ago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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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잎들

영화 ・ 2018

평균 3.5

죽음의 반복 끝에 건져낸 그 별 것 아닌 풀잎들. (스포일러) . 홍상수의 영화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언젠가부터 홍상수에게 흑백이란 곧 죽음의 정조와 맞닿아 있음을 익히 알고 있으리라. <오! 수정>은 서로 다른 두 가지의 기억이 서로의 존재를 걸고 갈등하는 형국의 영화였다. <하하하>에서 죽어있는 시간은 곧 흑백의 스틸사진으로 제시되었다. <북촌방향>에서 유준상은 흑백의 미궁을 헤매다 카메라 프레임 내 또 하나의 카메라 프레임이라는 이중의 감옥 안에 박제되어 상징적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 후>에서 권해효 역시 마찬가지로, 김민희가 프레임 바깥으로 벗어남과 동시에 프레임 내로 들어온 중국집 배달부의 동선을 따라 카메라 프레임 내의 집 내부라는 이중의 감옥 안에 박제되어 상징적 죽음에 이르렀다. . 그런데 홍상수가 다섯 번째로 흑백 화면을 끌어들인 <풀잎들>에서 홍상수가 죽음을 다루는 방식은 유달리 독하다. . 안재홍과 공민정은 죽은 친구에 대해 대화하던 와중에 공민정은 거의 울부짖다시피 고성으로 안재홍을 원망한다. 롱테이크 숏으로 그들의 대화를 쫓던 카메라가 다음 숏에서 김민희를 바라볼 때, 바로 이전 숏의 대화 소리가 잠시간 이어지다 멎는다. 같은 대화가 두 개의 숏에 맞물려 있기에 관객은 으레 두 숏이 같은 공간 내에서 하나의 씬에 속해 있는 숏들이라 여기게 된다. . 그러나 한참 김민희를 바라보던 카메라가 좌측으로 패닝하여 기주봉의 자살에 대해 이야기하는 기주봉과 서영화에게로 넘어가면 관객은 의아해질 수밖에 없다. 안재홍과 공민정이 그토록 고성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그리고 김민희는 그 대화를 듣고 자신의 감상을 나레이션으로 풀어내기까지 하는데, 왜 같은 장소에서 기주봉과 서영화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안재홍과 공민정의 대화 소리는 조금도 들리지 않는가? . 비슷한 상황은 김민희가 동생 커플을 만나 자리를 옮긴 뒤에 또 한 번 벌어진다. 김민희와 동생 커플의 대화 숏이 롱테이크로 이어지다 컷이 되면 식당 아주머니의 모습을 담은 다음 숏이 이어지는데, 이때 잠시간 이전 숏의 웃음소리가 이어지다 멎는다. 아주머니의 동선을 따라 패닝이 이어지고 이유영의 옛 연인의 죽음에 대해 대화 중인 이유영과 어떤 남자가 프레임 내로 들어온다. 상차림으로 보건대 김민희와 동생 커플, 이유영과 남자는 분명 같은 식당에 있는 듯 보인다. 그런데 김민희와 동생 커플의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 왜 같은 공간이라면 당연히 들려야 마땅한 소리가 숏의 이음매에서 잠깐 존재하다 이내 사라지고 마는 것일까? 이전의 숏의 존재를 긍정하기 위해선 다음 숏에서 이전 숏의 대화 소리가 여전히 들려야 마땅하고, 이전 숏의 소리가 일순간 제거되어 버린 다음 숏의 존재를 긍정하려면 이전 숏의 인물들은 소리가 사라진 그 순간 대뜸 침묵해 버리거나 아예 그 공간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즉, 이 영화는 이전 숏들의 존재를 부정해야만 자신의 존재를 긍정할 수 있는 숏들, 다시 말해 이전 숏의 죽음을 담보 삼아 존재할 수 있는 숏들의 연속이다. (외화면의 삽입 음악처럼 들리던 곡이 사실은 카페에서 틀어두었던 음악으로 밝혀지는 점이나, 방금 전 정진영과 김민희가 김민희의 남자친구에 대해 이야기하던 시점에 김민희를 부르는 남자가 등장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그를 김민희의 남자친구라 유추하게 하지만 이내 동생으로 밝혀지는 점도, 이전의 정보를 부정하는 정보의 연속이라는 데서 비슷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 안재홍이 처음 카페에 들어섰을 때 카페 바깥에 앉아있던 정진영은, 안재홍이 다시 카페 바깥으로 나섰을 땐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더니, 김새벽이 카페에 올 즈음엔 다시 그 자리에 앉아 있다. 이처럼 안재홍과 공민정은 카메라가 김민희 혹은 서영화와 기주봉을 비추는 동안엔 그 공간에 존재하지 않지만, 다시 카메라가 그들을 프레이밍한 숏을 시작하면 다시 그 자리에 존재할 수 있다(대신 이 순간엔 서영화와 기주봉의 존재가 그 공간에서 지워져야만 한다.). 그러나 다시 다른 숏이 시작되면 그들은 다시 한 번 존재가 부정되어야 한다. 이 숏들의 연쇄 속에서 각 인물들은 마치 죽음을 반복하는 듯 보인다. . 이를 염두에 두고 이유영과 다른 남자를 보여준 숏을 다시 떠올려 보자. 이 숏은 홍상수의 필모를 통틀어 보아도 매우 이례적인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줌과 팬은 홍상수의 영화에 자주 등장하던 장치이지만, 한 숏의 인물 중 특정의 인물에게만 포커스를 주어 다른 인물이 흐릿하게 보이도록 하였다가 이내 그 다른 인물에게 다시 포커스를 맞추어 방금 전 포커스를 맞추었던 인물이 흐릿해지길 반복하는 촬영은 이전 그의 영화에 흔치 않았던 방식이다. 같은 소리로 서로 맞물린 두 개의 숏이 서로의 죽음을 담보로 해야만 존재할 수 있으며 그 연쇄 속에서 죽음을 반복한 점을 떠올려 보면, 어쩌면 이러한 포커싱은 한 숏 내에서 각 인물에게 번갈아 죽음이 반복되는 이미지를 덧씌우려는 시도는 아니었을까? . 이 숏의 마무리는 마치 이러한 추측에 대한 방증처럼 보인다. 남자의 모습을 계속 뒷모습으로만 보여줄 때 그는 그 자리에 존재하지만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런데 카메라가 패닝할 때 카메라는 마치 일부러인 양 그의 그림자만 존재하고 이유영의 그림자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프레이밍을 보여준다. 그리고 다시 카메라가 패닝하여 돌아오면 이유영은 포커스에서 벗어나 있고 남자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옆 얼굴을 보여준다. 그들 간의 존재가 역전된 것이다. 그러나 이내 다음 숏으로 넘어가면 그 둘의 존재는 한꺼번에 지워진다. . 거의 매 씬마다 배우의 존재(정진영은 작가를 꿈꾸는 배우이고, 기주봉은 자살을 시도한 배우이고, 동생의 여자친구는 배우 생활을 잠깐 하다가 승무원이 된 인물이다.)를 하나씩 끼워넣는 것도 이 연장선 상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숏이 바뀔 때마다 죽음을 반복하는 이 모든 인물들처럼, 배우들이 연기하는 캐릭터는 그 영화가 끝나는 순간 존재가 지워지는 숙명을 안고 태어나지 않았던가. 게다가 영화는 마치 그 모든 캐릭터들이 곧 죽을 것을 예견하기라도 하고 있는 듯, 이유영이 연기한 순영과 동생 커플 정도를 제외하곤 극중 캐릭터의 이름을 엔딩 크레딧에서만 표기할 뿐 절대 극중에서 언급하지 않는다. . 홍상수가 이 영화 안에서 이토록 죽음을 반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 중반부에 김새벽이 끊임없이 계단을 오르내리는 숏이 등장한다. 계단을 내려갔다가 이내 다시 계단을 올라올 때, 이는 방금 전 계단을 내려간 행위를 부정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그렇게 올라온 계단을 바로 다시 내려가면, 이는 다시 방금 전 계단을 올라온 행위를 부정하는 행위이다. 김새벽은 이 행동을 계속해서, 그것도 점점 더 빠르게 반복한다. 마치 홍상수가 숏의 연쇄 속에서 계속 각 숏의 죽음을 반복한 것처럼 말이다. 김새벽이 계단을 오르내리길 반복하는 동안 그녀가 계단을 오르는 행위와 계단을 내려가는 행위는 계속해서 부정된다. 다시 말해, 그녀의 각 행위들은 계속해서 죽음을 반복한다. 그렇지만 그 와중에도 그녀의 몸에선 땀이 나고 숨은 가빠진다. 그녀의 행위 자체는 죽음을 반복하고 의미가 없어질지 몰라도 그녀의 신체는 그 무의미해 보이던 반복의 흔적을 축적하며 기억하고 있는 셈이다. 마찬가지로 각 숏이 죽음을 반복하는 동안 얼핏 그 숏은 총체적으로 의미가 없어지는 듯 보이지만, 그 와중에도 영화가 그 모든 죽음들을 제 몸 안에 축적하며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 마침 이 영화에는 그 모든 죽음의 흔적들을 기록하고 있는 인물이 있다. 바로 김민희가 연기하는 '아름'이다. . 김민희가 연기하는 캐릭터 '아름'은 마침 홍상수의 전작 <그 후>에서 김민희가 맡았던 캐릭터와 이름이 같아. <그 후>에서 아름은 권해효의 캐릭터가 이중의 프레임에 갇혀 상징적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프레임 바깥으로 탈주했던 인물이다. <풀잎들>에서도 아름은 유일하게 프레임의 존재를 뛰어넘을 수 있는 인물이다. 그녀만이 유일하게 보이스오버 나레이션이라는 외화면의 음성으로 말할 수 있다. 그녀만이 유일하게 모든 숏에서의 상황을 동시에 바라보며 자신의 감상을 기록할 수 있다. 영화 중반부 마치 내화면의 음악처럼 제시되던 통기타 선율의 김아림의 노래는, 아름의 동선을 따라 전혀 별개의 공간으로까지 이어지며 외화면의 음악으로 변모한다. 또한 '카페에서 틀어둔 음악'이라고 분명히 언급되었던 클래식 음악도 영화 후반부에 아림이 카페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는 순간 덩달아 카페라는 공간을 뛰어넘어 외화면의 음악이 된다. 결국 그녀의 존재 자체가 전지적 작가에 가깝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 그 모든 죽음의 반복 끝에 아름은 카페로 돌아온다. 영화 초반부에 안재홍이 카페를 떠날 때 아름의 보이스오버 나레이션은 '그가 과연 새 출발을 할 수 있을까?'라고 자문하나, 안재홍은 그 질문을 비웃기라도 하듯 다시 카페로 돌아와 있다. 그러나 죽은 친구의 존재를 잊고 안재홍과 공민정이 사랑을 이야기할 때, 아름의 나레이션은 '결국 다 죽을 거면서, 죽은 친구가 옆에 있어도 자기 죽을 건 생각 안 하는 것들'이라 경멸하는 듯 하면서도 '예쁘고 단정하다'며 그들이 '부럽다'고 말한다. 끝없이 계단을 오르내리며 죽음을 반복하던 김새벽도 카페로 돌아와 있다. 그녀가 정진영과 골목을 구경하러 갈 때, 아름의 나레이션은 '결국 사람은 감정이고, 감정은 쉽고 힘있고 귀하고 싸구려고 그립다'고 말한다. . 아름이 카페 밖으로 나왔을 때 그녀의 시야에 동생 커플이 보인다. 동생 커플은 서로를 잘은 모르지만 가장 중요한 건 안다며 그것만 믿고 나아가는 것이라 말했던, 흡사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2부나,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 후반부의 마음가짐을 가졌던 커플이다. 그런데 그들은 이제 옛 조선 시대의 복장을 입고서 서로를 카메라로 찍어주고 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죽은 시간의 옷을 입고 서로를 카메라의 프레임 안에 박제하고 있다. <하하하>와 <북촌방향> 때의 홍상수를 떠올려 보자면, 이는 분명 긍정적인 징조라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르게 그들은 환히 웃고 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던 아름은 다시 카페 안으로 들어가 술자리에 낀다. . 카페의 그 술자리에서의 대화를 듣다 보면 기묘한 대사가 하나 나온다. 정진영이 기주봉에게 요새도 술 많이 드시냐고 묻자 기주봉은 대답 중에 '자살한 다음에는'('자살한 다음에는'이었는지 '자살하고나선'이었는지 명확히 기억나진 않는다.)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자살시도를 한 다음'이 아니라 '자살한 다음'이란 표현이 이상하게도 강렬하게 들렸다. 자살이 시도에 그치고 다시 생환하였다면 이를 '자살시도를 했다'고 말하지 않고 '자살했다'고는 보통 표현하지 않을 것임에도, 그는 굳이 그 표현을 사용해 스스로를 이미 죽어버린 사람인 양 말한다. 그리고 다른 이들은 이 표현을 조금도 문제삼지 않는다. 어쩌면 그들 모두는 죽음을 끌어안고 술자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전지적 작가나 다름없는 아름은 그들이 처음 그녀에게 합석을 권했을 때 한사코 거부한다. 그러나 카페 밖에서 동생 커플이 조선시대 복장으로 카메라로 서로를 찍어주면서도 환히 웃는 모습에 무언가 감화라도 된 것처럼 다시 들어와 그 죽음의 술자리에 낀 것이다. . 홍상수는 한 때 일상을 여러 실험을 반복하며 이질적인 다른 무언가로 변형하여 낯설게 보고자 하였으나, <자유의 언덕> 이후로는 그 실험들을 덜어내며 최대한 순수한 길을 찾고자 노력하는 듯했다. 최대한 순수하게, 최대한 솔직하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나아가야 한다는 욕구가 그의 작품엔 늘상 들끓고 있었다. 그러나 혹시나 이 길이 틀린 길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항상 작품 안에 드리워 있었고, <클레어의 카메라>에서는 유달리 주저하는 듯 보였다. 그러더니 <그 후>에서 대뜸 그는 <자유의 언덕>에서 했던 갈무리를 다시 반복했다. 나는 그것이 일종의 퇴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풀잎들>을 보고나니 그것은 그간 가지 않았던 다른 길로 향하기 위한 밑그림이 아니었다 싶다. . 죽음을 반복한 뒤에 오히려 죽음을 옆에 두고서도 이를 잠시나마 잊거나 으레 있는 일로 치부하고 당장의 감정들에 심취한 이들, 그리고 그 죽음의 징조들을 온몸에 걸치고서도 그 프레임에 자신을 내맡기고도 웃을 수 있는 이들, 끝없는 자기부정 뒤에 오히려 모든 것을 망각하고 자신이 처음부터 가장 부정하고 싶었던 어느 지점에서 갓 얻어내는 어떤 순수한 감정들. 그들을 계속해서 외부에서 관음하며 평가하던 아름, 아니 홍상수는 그 죽음과 자기부정의 반복 끝에 스스로 그 한가운데 뛰어들어 모든 것을 망각하고 다시금 자신을 살아숨쉬게 하는 감정 하나에 심취하기로 맘 먹은 것인지 모른다. . 아름이 그 죽음의 술자리에 합석하는 순간, 영화는 영화 속의 공간들을 흑백 스틸컷으로 연달아 보여준다. 그러나 <하하하>와 <북촌방향>에서와 달리 그 흑백 스틸의 영역이, 그 죽음의 영역이 마냥 부정적으로만 보이지는 않는다. 엔딩 크레딧이 다 오른 뒤 여전히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들의 생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극중 인물들이 마치 죽으라고 저주라도 퍼붓는 양 그 풀잎들에 대고 그토록 담배 연기를 뿜어댔어도 그 '별 거 아닌 것들'은 '자기 죽을 것도 모르고' 오늘도 그렇게 살아 흔들린다. 어쩌면 그 풀잎들은 그래서 그렇게 귀하고 예쁜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