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1) 까뮈가 자살을 불필요한 것으로 단정한 까닭은 결국 사는 건 재밌으니까,라는 간단한 이유에서다. 재밌으니까,라고 퉁쳐버리면 행복과 고통에 대한 처절한 성실함의 빛이 바래는 것도 같지만, 결국 그 성실함도 살아가는 일의 통렬한 즐거움, 자유가 선사하는 무지막지한 해방감으로 힘을 얻게 된다는 그의 서술에 따르면 마냥 거친 요약도 아니다. 특히 사랑에 대해 열정적으로 설명하는 부분에서 까뮈가 살아가는 일을 얼마나 재밌게 이해하고 있는지가 통쾌할 정도로 명확히 드러난다. 다만 까뮈가 인식하는 사랑에 대해서는 좀 비판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어쨌거나, 죽지 말고 살아라. 왜? 까뮈에 따르면, 재밌으니까. (2) 까뮈는 행복은 물론 고통과 절망까지 직시하고 낱낱이 경험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건 '그림자가 있어야 빛이 있다'는 식의, 다시 말해 결국 진실로 추구할 만한 것은 빛이며 빛을 식별하기 위해선 그림자도 필요하니 일종의 보조수단인 그림자도 부정해선 안 된다는 식의 사고방식이 아니다. 고통에도 성실하라는 것은 행복의 진정한 가치를 제대로 음미할 수 있게 되기 위해 고통과 절망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게 아니다. 고통과 절망에도 불성실해서는 안되는 까닭은, 행복이든 고통이든 아름다움이든 절망이든 그 모든 것을 제대로 의식해야 진정으로 부조리를 포착하고 부조리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원리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해방이 핵심이다. 해방을 위해서는 행복도 알아야 하고 고통도 알아야 한다. 해방이라는 목적 아래에선 행복도 고통도 동등하다. 행복이 더 달콤하고 고통이 더 씁쓸한 것이긴 하지만, 그래서 행복에 끊임없이 경도되는 게 당연지사지만, 그걸 경계하는 게 부조리를 직시하는 삶이다. 삶의 행동에서든 의식에서든 어떤 형태로든 행복에 경도되는 것을 기피하고 고통을 회피하는 태도를 저버리고, 둘을 완전히 똑같은 것으로 다뤄야 하는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금세 부조리의 늪에 잠기고 만다. (3) 까뮈의 '부조리'는 이중적인 의미로 쓰인다. 그것도 전혀 상반된 두 가치를 담아서. 가령 까뮈는 '부조리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강조하는데, 이는 까뮈가 <이방인>이나 <페스트>와 같은 초기 저작을 통해 맹렬히 비판했던 것이 세계의 부조리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상당히 모순적인 표현이다. 부조리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니, 세계의 모순에 반항하지 않고 순응하며 사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걸까? 이 모순은 까뮈가 부조리의 용례를 이중적으로 사용했다는 걸 이해해야 해소된다. 요컨대 까뮈의 부조리는 이런 것이다: --- "부조리" (한자)不條理. (영)absurdity. (프)absurdité. 명사. 1. 인간의 자유와 가능성을 제한, 억압, 파괴하며 얼토당토않은 죽음과 고통을 야기하는 세계의 모든 관습이나 문화. 예) 과장님이 내리는 지시는 정말 하나같이 부조리하기 짝이 없으니 그것도 대단한 능력이야. 2. 부조리한 현실 세계에 적응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부조리를 깨닫고 거기에 반항하는 인간을 표현하는 방식, 또는 그런 인간에 대해 느끼는 바. 예) 부조리한 인간은 멋있는 인간이다. --- 세계의 부조리를 깨닫고 반항하는 인간이 봤을 때는 그런 부조리에 순응하고 살아가는 인간들이 부조리한 것이며, 부조리에 순응하고 살아가는 인간들이 봤을 때는 부조리에 반항하는 인간이 부조리다. 요컨대 부조리1은 까뮈가 비판하는 그 부조리, 부조리2는 까뮈가 추구하는 반항의 태도다. 부조리의 원래 표현인 absurd가 그저 '부조리하다'는 뜻 외에도 '이상하다' '바보같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걸 상기한다면 서로 완전히 상반된 인간이 서로를 absurd하다고 보는 건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실상 반의를 동시에 포괄하는 부조리라는 단어는 다행히도 문맥을 통해 어느 때 1의 의미로 사용되며 어느 때 2로 사용되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4) 까뮈는 '영원'과 '역사'를 대립시켜 영원을 부조리한 것으로, 역사를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표현한다. 마찬가지로 희망과 체념을 대립시켜 희망을 부조리한 것, 체념을 추구할 만한 것으로 표현한다. 이런 식의 대립어는 무수히 등장한다. 수능 언어영역(아, 이제는 국어영역) 지문에서 비슷한 의미를 담은 단어들(가령 함박눈, 따뜻함, 애정, 포근함)에 동그라미를 치고 거기에 상반되는 의미를 담은 단어들(가령 진눈깨비, 서러움, 시련, 외로움)에 세모를 쳤던 것처럼, 각각의 대립어들은 서로 같은 영토로 귀속될 수 있다. 영원과 역사는 각각 끊임없이 다른 단어로 표현되는 것이다. 생각나는 대로 나열해보자면, [영원=부조리=속임수=희망=내일=안정=관습=복종=억압=침묵=노예=부조리한 죽음에의 공범=…]이고, [역사=반항=이방인=체념=자유=해방=최선을 다해 오늘을 경험하는 것=내일이 없는 것처럼 사는 것=자살하지 않는 것=전체 아니면 無의 태도=남김없이 소진하는 일=…]이다. 겉으로만 보면 영원한 삶에 대한 집착과 순간에 대한 애정을 대립시켜 전자를 부조리, 후자를 반항으로 치환하는 것도 같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 문제는 '영원'이다. 까뮈가 사용하는 영원은 의미 그대로의 영원, 영속성 같은 걸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가 행복하다고 생각해야만 하는 시지프에 대해 생각해보면 까뮈가 표현한 '영원'이란 단어의 모순은 명확해진다. 시지프는 '영원히' 돌을 산으로 밀어올리는 짓을 반복해야 한다. 그리고 까뮈는 '영원히' 그런 짓을 하는 시지프를 찬양하는데, 그 이유는 시지프가 그 겉으로 보면 무가치한 일을 기꺼이 '영원히' 수행하기 때문이다. '영원'이 부조리의 속성이 아니라 반항의 속성도 되는 것이다. '영원'은 두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 하나는 까뮈가 영원이라는 단어를 종교(특히 크리스트교)적 의미에서 사용했다는 점이다. 까뮈가 비판했던 것은 "착하게 살면 죽어도 천국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식의 종교적 '영원'이었다. 이 어설픈 '영원'이라는 '속임수'에 '희망'을 품고 그저 '내일'도 '안정'적으로 살기를 바라며 기성의 '관습'에 '복종'하고 '억압'에 '침묵'하는 '노예'가 되어 '부조리한 죽음에의 공범'이 되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 총체적인 부조리, 이게 까뮈가 혐오했던 것이다. 이에 까뮈는 '영원한 반항'을 제시하며, 이때의 영원은 종교적 의미의 영원과 다른 의미다. 이를 좀 더 명확히 구분하기 위해선 영원의 의미를 규정하는 두 번째 측면을 살펴봐야 하는데, 종교적 영원은 '순간을 압도하는 이상으로서의 영원'이고, 까뮈가 추구하는 영원은 '매 순간이 쌓여 구성하는 영원'이다. 그래서 이를 '역사'라고 표현한 것이다. 종교적 영원은 어떤 커다란 덩어리, 그 내부에 아무런 다채로움이나 치열함도 없는 단조로운 영원이다. 이런 영원을 차용하면 오늘도 그저 어제만 같이 살게 되므로 관성에 젖어든다. 그러나 역사는 그저 하나의 덩어리가 아니라 치열하고 처절하기 그지없는 모든 개별적이고 특수한 순간들이 끊임없이, 영원히 축적되며 형성하는 것이다. 이런 영원을 받아들이면 모든 순간이 특수해지며, 남김없이 경험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까뮈는 말 그대로의 영원을 배척하진 않았다. 종교적 차원에서 "널 영원히 사랑해"라고 말하면 그건 신이 인간에게 주는 것처럼 어제나 오늘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 무채색의 사랑을, 다시 말해 속 빈 사랑을 주겠다는 것이고, 역사적 차원에서 "널 영원히 사랑해"라고 말하면 그건 하루하루 각기 다른 삶을 사는 가운데 매 순간 당신을 처음 만나듯 온 정열을 쏟아 그런 식으로 평생을 당신을 사랑하겠다는 것이다. 물론 까뮈는 모노가미 혹은 결혼제도를 경멸했지만, 영원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영원히 사랑한다는 말은 까뮈의 관점에서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므로 "내일이란 없다"와 "최대한 많이 살아야 한다"라는, 겉에서 보면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는 선언적 명제는 둘 다 반항하는 삶의 태도인 것이다. 최대한 많이 살아야 한다는 건 얼핏 '부조리한 영원'에의 추구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내일이 없는 것만 같은 삶, 부조리를 인식하고, 최선을 다해 오늘의 행복과 오늘의 고통을 남김없이 경험하고, 그런 삶의 방식을 내일도, 모레도, 죽을 때까지 유지하며 최대한 많이 살아야 한다는 게 까뮈의 반항론이다. 영원이라는 단어가 품은 모순은 해결됐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내일이란 없다"라는 명제다. 내일이 없는 삶을 살면, 진짜로 내일은 필요가 없다. 오늘이 다 가고 24시 땡 하는 순간 죽어도 무방하다. 말장난이 아니라, 의미 자체가 그렇다. 까뮈는 자동차 사고로 죽는 일만큼 무가치한 일은 없다고 말했는데(그런 까뮈는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는 게 부조리다), 내일 없이 오늘에만, 지금 이 순간에만 열중해 살아간다면 어느 날 갑자기 자동차 사고로 죽어도 문제가 될 게 없다. 내일 없이 사는 오늘을 다 살고 나면, 몇 발 양보해 내일 없이 사는 하루를 일주일이나 한 달이나 일년이나 십년 정도 살고 나면, 더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는 거다. 설령 그게 통렬하게 재미있는 일이라고 해도, 진짜로 내일이 없다는 식으로 사유한다면 그 재미를 내일 느낄 필요는 없다. 내일이 무가치한 것이라면 오늘의 반항은 오늘만 유의미해지고, 내일의 부조리와 내일의 반항도 무가치해진다. 오늘은 부조리를 인식하며 절절하게 반항하더라도 어차피 내일은 논의할 필요조차 없었으므로 자고 일어나 곧장 부조리에 순응해버린다면, 나는 "적어도 어제 하루는 반항하는 멋진 인간이었다"고 자위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결과적으로 부조리에 노예같이 순응하는 인간인 것뿐이다. 오히려 부조리가 뭔지 알고 반항까지 해봤으면서 부조리에 순응해버린 더 비참한 인간이 된다. 이제 이 단락이 어떤 이야기를 할지 패턴이 훤히 드러나는데, 그렇지 않다. 까뮈는 내일을 거부하지 않았다. 부조리는 언제나 부조리하고 반항은 언제나 유의미하다.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내일도 그렇고 500년 전에도 그렇고 1000년 뒤에도 그렇다. "내일이란 없다"는 선언을 할 수 있는 까닭은, 자동차 사고로 급작스럽게 죽지 않는 한 내일도 부조리를 인식하고 반항하며 살아갈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요컨대 내일에 대한 믿음과 희망이 있는 것이다. 뻔한 패턴 대로 이때의 희망도 종교적 희망이 아니다. 반항하기 위해 내일은 반드시 필요하다. 가능한 한 많이 살기 위해서도 내일은 필수다. 미래에 대한 무관심, 희망에 대한 경시는 미래나 희망을 통해 안위를 찾는 행동을 거부하는 거지, 미래나 희망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식의 허무주의가 아니다. 오늘 남김없이 살겠다는 다짐과 내일도, 미래에도 그러리라는 당연성, 다르게 표현하면 희망이 있는 것이다. 영원히 오늘을 사는 것, 이게 카뮈의 지향이며, 이 지향 안에서 "내일이란 없다"와 "내일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공존가능하다. 부조리도 그렇고 영원도 그렇고 내일도 그렇고 희망도 그렇고, 이쯤 되면 까뮈는 언어의 마법사 같은 게 아니라 약간 좀, 자기 사유를 독자에게 정확히 전달하려 하기 보단 문장을 더 멋있게 적고 싶어서 단어의 애매모호한 부분을 굳이 끄집어내어 아주 최선을 다해서 사방팔방에 활용한 궤변가 기질이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문제는 무수히 발견된다. 마지막으로 또 하나 소개하자면, 까뮈는 온갖 예시를 들어가며 삶에 집착하지 말고, 생각하지 말고, 초월하려 하지 말고, 이성적이려 하지 말고, 그저 육체의 삶을 영위하고 말하는데, 육체의 삶을 영위하며 자동차 사고를 조심하면서 최대한 많이 사는 것도 결국 따지고 보면 삶에 집착하는 거고, 이 300쪽이 넘는 책도 온통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 독자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드는데, 왜 굳이 삶에 집착하지 말고 생각하지 말라는 말을 한 건지 의아하다. 어쨌거나 어떤 단어와 표현이 종교적 의미에서 쓰일 때와 그렇지 않을 때로 구분된단 걸 쉽게 알 수 있으니, 중요한 건 의미와 본질이지 표현과 현상이 아니라는 관념론적 변명도 해볼 수 있겠다. (5) 까뮈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는지 모르겠지만, 약간 속 편한 소리처럼 들리는 구석이 중간중간 눈에 띈다. 21세기를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자살에 대해 쉽게 말해선 안된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런데도 까뮈는 쉽게 자살을 입에 올린다. 그것도 온갖 철학과 사상과 사유체계를 동원해가면서, 머릿속으로만. 그러나 자살 시도를 해보지 않은 나조차도 자살을 마주한 사람에게는 어떤 철학이나 사상이나 사유체계가 아니라 육체가 겪어내는 삶 그 자체에서 느껴지는 고통과 절망밖에 없다는 건 안다. 가령 까뮈가 일주일동안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고 빛도 못 보고 말도 못 하는 순간을 보냈는데 그때도 니체나 후설이나 도스토예프스키를 말하며 자살을 논할 수 있을까? 야만의 시대를 살았던 인간으로서 그 정도는 참작해야 진짜 실존주의 작가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그러나 시지프 신화를 20대 후반에 적었다는 걸 감안해야 할 것이다. 음, 뭐라뭐라 비판했지만 그 나이에 이런 책을 썼단 게 대단하단 건 부정할 수 없다. (6) 마지막으로 사랑에 대해서. 까뮈는 사랑과 연애를 찬양하지만 그 방식은 다소간 폭력적이었다. 우선 아름다운 여성은 늘상 욕망의 대상이라거나 여성은 정복하는 거라는 표현(사고방식)은 오늘날의 관점으로 대차게 깔 수 있지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시대적 한계로, 당대엔 충분히 아름다운 표현이었으며 오늘날의 관점으로 무작정 재단할 수 없단 걸 감안할 수 있다. 문제는 그 시대에조차 충분히 경계할 수 있었던 것, 즉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일에 대해 까뮈가 무관심했다는 점이다. 까뮈는 탕아 돈 조반니를 예로 들면서 '사랑을 쫓아 유랑하기'를 아주 멋진 것으로 묘사했다. 행복도 고통도, 희망도 절망도, 사랑도 증오도 같은 정도로 대해야 한다고 말한 사람이니 만큼 이런 태도는 당연한 결과인 것도 같다. 문제는 사랑을 쫓아 유랑하는 태도가 '정확히 사랑하기'를 배제했다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사랑하지 않는데 연애하기'(아마 '사랑하지 않는데 섹스하기'도 포함될 것 같다)를 포함해버렸다는 것이다. 정확히 사랑하는 일이란 한 사람을 최선을 다해 이해하고 그에게 걸맞은 사랑을 제공하는 일이며, 이는 사랑을 하는 모든 순간에 서로가 어떤 사랑을 주고받고 있는지 알아야 가능하다. 다시 말해 정확한 사랑은 어떤 합의와 약속을 전제로 끊임없이 서로를 탐구하는 일이다. 까뮈는 이 지점을, 상대가 무엇을 필요로하는지 탐구하고 그것을 제공하며 그런 사랑을 주고받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합의와 약속이 필요하다는 지점을 경시했다. 서로가 아니라 오직 스스로를 위해 사랑했다. 그 결과는 필연적으로 일방의 고통을 낳는다. 부조리 인식이든 반항이든 그것을 혼자 꾸릴 수 있고 혼자 유지할 수 있는 독립적 삶 속에서는 어떤 형태로든 가능하지만, 그것이 타인에게 고통을 준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누가 까뮈를 고문하면서 "반항을 멈추지 않으면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겠어"따위의 공갈을 하는 경우는 제외하자.) <이방인>에서도 알 수 있고 <페스트>에서도 알 수 있듯 까뮈는 사람들이 어처구니 없는 일로 고통을 받는 일을 피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몸도 마음도 상하지 않고 무사하게 살 수 있는 세상, 반항의 최종 목적지다. 물론 그곳에 닿을 가능성은 0에 수렴하지만, 거기에 닿을 가능성이 0이든 1이든 100이든 그곳으로 향한다는 사실 자체가 유의미한 거라는 게 이 책의 핵심 주제다. 그리고 사랑은 혼자 하는 게 아니라 둘(이상)이 하는 관계 행위다. 관계는 우연으로 맺어질지라도 약속으로 유지된다. 그 약속이 무의미하거나 무가치하거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거나 믿음을 배신할 경우 일방 혹은 쌍방은 필연적으로 고통을 겪는다. 국가(혹은 지도자)와 국민의 상호작용도 관계 행위라는 점에 착안해 보면, 까뮈가 전체주의를 지독하게도 싫어했던 건 전체주의가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그가 국가의 전체주의화에 동의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국가가 전체주의로 돌진하니 까뮈가 부조리하다고 분노하며 반항을 외쳤던 것이다. 까뮈가 부조리하지 않은 국가를 원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관계를 약속한 둘은 어떤 형태로든 서로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기 마련이다. 인간에 대한 사랑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 국가나 집단에 대한 사랑보다 크고, 따라서 그게 어긋났을 때 겪는 고통도 더 크다. 사랑을 시작할 때엔 본인이 어떤 사랑을 할 거라고, 가령 돈 조반니 같이 화르르 불태우고 다음으로 넘어가는 사랑을 할 거라면 그런 사랑을 할 거라고 미리 말해야 하며,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 자와 연애하기 위해 거짓말을 해선 안 된다. 합의한 사항은 성실히 이행해야 하고, 그러지 못할 것 같으면 관계 파기를 선언해야 한다. 내 욕심 때문에 상처를 줘선 안되기 때문이다. 까뮈가 원하는 자유로운 사랑은 충분히 멋지고 그 자체로는 문제가 없다. 문제는 까뮈가 자기가 추구하는 사랑의 형태를 사랑하는 상대에게 제대로 설명하지도, 그걸 바탕으로 제대로 합의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상대를 오직 나를 위한 소비품쯤으로 만들어버렸다. 제대로 된 관계가 아니다. 혁명정부를 운영하다가 민선 대통령이 당선되면 물러나겠다더니 본인이 대통령이 되고 싶어서 한국식 민주주의 운운하며 유신체제를 선포한 누구처럼. 그런 자에게 복종한 자들은 까뮈가 그토록 싫어했던 부조리에 순응한 자들이었고 그걸 이끈 게 부조리의 원흉들이었는데, 그런 점에서 보면 돈 조반니를 예시로 들며 자신의 욕망에 충실해야 한다고 말한 반면 그 시대에도 지금과 다르지 않았을 관계에서의 합의와 예의에 무관심한 까뮈는 적어도 사랑과 욕망의 영역에서는 부조리의 원흉이었던 셈이다. 실제로 까뮈는 결혼제도에 반대하면서 피아니스트이자 수학자였던 프랑신느와 사랑하기 위해 결혼을 해버렸고, 그 결과는 세속적 의미에서의 까뮈의 외도, 그리고 외도라는 합의 미이행으로 인한 프랑신느의 고통이었다. 프랑신느는 임신까지 하고 있어서 꼼짝없이 싱글맘이 되어야 했다. 까뮈의 거짓 약속을 믿은 후과였다. 본인 스스로 어떤 사랑을 추구하는지 알았으며 결혼을 거짓 약속이자 부조리의 극치라고 단언했던 까뮈는 결혼을 해서는 안 됐다. 프랑신느와의 결혼은 까뮈가 부조리에 복종한 굴욕적인 순간이었다. 자기반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7) 그럼에도 멋있는 사유가 아주 많아서 좋았다. 종종 멋진 문장을 리뷰 끝에 붙이곤 하지만 이 책엔 멋진 문장이 너무 많고 고르기도 힘들어서 안 하기로 했다. 덧붙이자면, '시지프'의 정확한 한국어 표기는 '시지프스'도 아니고 '시사이포스'도 아니고 '시시포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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