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영화와 연대하며 어머니들을 위로하다. 스트리밍 포맷의 형식끝에서 역설되는 것은 극장의 절대적인 필요. . . ( 본 영화를 포함해 칠드런오브맨,그래비티의 스포일러도 포함돼 있습니다.) 쿠아론 감독의 전작 ‘그래비티’에서 주인공 라이언 스톤(샌드라 블록)이 지구에 착륙한 뒤 물에서 지상으로 걸어 나올 때 새로운 탄생, 즉 생명의 이미지를 감지한 관객은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실제로 라이언 스톤이 우주에서 지구로 귀환하는 과정을 담은 시퀀스 전체를, 우주선=정자, 물=양수 로 치환하여 생명의 탄생이란 모티브로 읽어낸 외부의 해석들도 숱하다. 감독의 더 이전 작품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칠드런 오브 맨’. 이건 빼도 박도 못하게 제목에서부터 생명의 레퍼런스를 박제 해놓은 영화다. 실제 영화의 내용은 어떠한가. ‘칠드런 오브 맨’은 인간이 임신의 기능을 상실한 디스토피아적인 시대에 임신을 하게 된 한 여성과 그녀를 보필하는 남자를 필두로 진행되며 생명의 숭고함을 예찬하는 영화였다. 이처럼 생명이란 모티브는 쿠아론감독에겐 유독 남다르게 다가오는 것처럼 보인다.(그렇다고 두 영화가 모두 생명에 관해서만 말하는 영화라는 건 아니다.) 허나 이전 두 편의 영화에서 쿠아론이 생명과 삶의 문제를 깊게 파고들면서 직접적으로 건드리지 않은 영역이 있다. 그건 바로 모성이라는 영역이다. 모든 인간의 생명은 필연적으로 어머니의 잉태로부터 존재하고 시작한다. 세상에 나온 뒤로는 또 어떠한가. 그들의 삶을 길러내는 이 또한 어머니라는 존재다. 따라서 생명과 삶이란 본인 필생의 테마에 대한 영화를 찍으면서 생명의 근간이 되는 어머니라는 존재를 다루는 건 어쩌면 쿠아론감독 본인에게는 당연한 일이 엇을지도 모르겠다. 추측컨대 위의 내용이 ‘로마’의 착상이 된 것 같다. (사실 생명의 존재가능은 어머니로부터 시작되고 후의 삶을 기르는 이도 어머니라는 명제는 어머니 대신 아버지라는 존재를 대입해도 성립한다. 더 나아가 그게 더 적합한 명제라고 생각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어쨌든 쿠아론은 전자가 더 옳다고 생각하나 보다. (나 또한 그러하다.) ‘로마’는 70년대 멕시코의 시대를 담아낸 지극히 공적인 영화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로마’는 쿠아론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진행된다는 점을 미루어 봤을 시 지극히 사적인 특색 또한 띄고 있다. 따라서 쿠아론이 주장하는 영화의 기본전제에 반기를 들고 싶다면, 그건 개인의 마음이다. 언제나 그렇듯 영화엔 정답이 없고 영화의 전제는 쿠아론의 주장일 뿐이니까.) . . ‘로마’에서 시작부터 끝까지 가장 돋보이는 것 중 하나는 바로 촬영이다. 감독의 앞선 두 작품 ‘칠드런 오브 맨’과 ‘그래비티’를 모두 본 관객이라면 필히 초반부터 ‘로마’의 촬영이 앞선 두 작품의 촬영을 강하게 연상시킨다는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항간에 듣기론 ‘로마’의 촬영 역시 이전 두 작품의 촬영감독인 엠마누엘 루베스키와 함께 하려했으나 스케줄상 문제로 합류가 불발된 것이라 한다. 아니나 다를까, ‘로마’의 촬영을 직접 담당한 쿠아론감독은 루베스키 특유의 촬영방식인 긴 롱테이크씬을 기반으로 영화를 촬영하였다. 두 감독간의 촬영에 다른 점이 있다면 마치 춤을 추는 듯 현란하기 그지없던 루베스키의 촬영과 달리 쿠아론의 촬영은 좌에서 우, 혹은 그 반대를 오가는 패닝과 트래킹만을 이용한 간결한 촬영이랄까? 아무튼, 그렇게 초반부터 집안일을 하는 클레오의 모습을 따라 이어지는 기나긴 테이크는 가정 내부와 가정의 구성원들, 그중에서도 클레오를 집중적으로 조망하며 일상의 풍경을 세밀하고 소박하게 그려나간다. . 위에서 잠시 언급한 ‘로마’가 쿠아론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영화라는 말을 빌려서 다시 말하면, ‘로마’는 기본적으로 굉장히 사적인 영화일 수밖에 없을 듯싶다. 허나 이처럼 지극히 사적인 텍스트에 쿠아론감독이 본인만의 방식으로 보편성을 부여하는 방식은 새롭다. . . 극중 하녀로 나오는 클레오는 감독의 어릴 적 하녀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라 한다. 이점을 감안하면, 클레오의 밑에서 커가는 4남매중 남자아이 하나가 쿠아론감독 본인을 모티브로 한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하지만 본인의 자전적 기억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되 감독이 극중 주인공으로 채택한 이는 어릴 적 본인집의 하녀였던 클레오다. 영화의 마지막, 클레오의 모티브가 된 실제인물의 이름으로 보이는 리보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리보를 위하여” 라는 자막을 통해 우리는 ‘로마’가 클레오로 대변되는 모든 어머니들에 대한 예찬인 동시에 리보에 대한 쿠아론의 사적인 감사인사 라는 점 또한 추측할 수 있다. . . ‘로마’는 클레오를 비롯한 세상에 모든 어머니들에 대한 찬미를 담은 영화지만, 영화는 시작부터 클레오의 낮은 사회적 지위를 강조한다. 주차장의 변을 치우는 영화의 첫 장면부터가 그렇다. 아이들을 먹이고 재우며 집안의 모든 전등을 관리하는 실세처럼 보이는 클레오를 따라가는 긴 테이크가 끝나면 계단을 오르내리는 클레오의 모습을 비춰주며 클레오의 낮은 계급을 상기시키는 쇼트 또한 마찬가지의 맥락으로 보인다. 낮음을 뜻하는 ‘하’와 여성을 뜻하는 ‘녀’를 합친 하녀가 그녀의 직업인 것부터가 클레오의 낮은 당대의 사회적, 젠더적 위치를 내포한다. 그렇게 영화는, 물이 고여 있는 주차장 바닥 타일의 프레임 속에 하늘을 간접적으로 비추면서 클레오를 한 없이 낮추며 시작한다. . . 허나 이러한 낮은 사회적 위치에도 불구하고 전반부의 클레오는 본인의 현실에 비관하지 않는다. 동물의 변을 치우며 4남매와 집주인의 식사와 집안 청소까지 담당해야 하는 고된 업무를 수행해야 하지만 노동요를 불러대며 업무의 고됨을 스스로 달래고, 노동 후엔 마음 맞는 친구와 시답잖은 예기를 하며 웃고 떠들어 하루의 피로를 해소할 수 있는 소소한 행복에, 그녀는 나름 만족하며 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랑하는 애인이 있다는 건 그녀에게 행복의 덤이다. . 하지만 스스로의 강인함과 용맹함을 뽐내며 클레오에게 믿음을 맹세하던 페르민이 자신의 아이를 거부하며 본인의 비겁함을 내보일 때, 비로소 그녀는 비참해진다. 사회적인 상태만 궁색하던 그녀가 마침내 감정적 상태마저 비참해졌을 때, 영화는 상처받은 어머니를 어떻게 어루만져 달래 줄 것인가. . 이러한 질문에 영화는 영화라는 답을 택한다. 극중 클레오가 아이들과 함께 영화를 보는 장면에서 고전 우주영화 ‘마루니드’의 한 장면이 인서트 된다. 만약 ‘그래비티’를 본 관객이라면 해당 장면에서 ‘그래비티’를 떠올리지 않기란 어려울 것이다. 무중력의 우주를 유영하는 인물에게 조지클루니를 닮은 인물이 멀리서 접근하는 장면을 보고 어찌 그래비티를 생각치 않을 수 있을까. 물론 쿠아론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그래비티’가 ‘마루니드’에 영향을 받은 건 맞지만, ‘로마’에서 ‘그래비티’를 연상시키려고 해당 장면을 삽입한 건 아니었다.” 라고 말했다. 하지만 쿠아론은 동시에 해당 장면을 통해 영화와 클레오 사이의 외로움이란 정서를 연결 지으려 했다는 말을 덧 붙였다. 덧붙인 말을 계속 곱씹어 보면 내게 영화 속 ‘마루니드’의 한 장면은 여전히 ‘그래비티’를 강하게 연상시킨다. 극중 등장하는 '마루니드'를 '그래비티'라 가정하고 한 번 따져보자. 우선 두 주인공의 상태. '그래비티'의 라이언과 '로마'의 클레오는 감정적, 정서적으로 비참하고 외롭다. 그리고 두 여성은 모두 아버지가 부재한 딸아이의 어머니다. (라이언의 딸은 이미 태어나 세상을 떠낫고 클레오의 딸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지만 후에 나자말자 세상을 떠날 운명에 놓여있다. 이건 그냥 우연의 설정인 것인가.) 앞서 명확히 극중극의 형태로 삽입되었던 또 한편의 고전영화 '파리대탈출'과 달리 '그래비티'가(실제론 마루니드지만 그래비티라 가정하고) 독자적인 쇼트로 영화 내에 인서트 되는 순간, 라이언과 클레오의 정서적 공감대는 지상에서 우주로, 영화에서 또 다른 영화로 연대된다. 그렇게 ‘로마’는 극중 하나의 사건을 통해 클레오를 직접적으로 위로하기 보단 가상 속 미래에 있는 또 다른 어머니와의 유대감으로 클레오를 간접적으로 위무하길 택한다. 그리고 그렇게 형성된 정서적 공감대는 스크린 너머로도 확장된다. 감독의 직접적인 부인에도 불구하고 내게 '마루니드'가 '그래비티'로 보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리고 나는 시대적 배경이 가능만 했다면, 극중 삽입된 영화가 '마루니드'가 아닌, '그래비티'였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물론 억측일지도 모르겠지만. . . . 중반부에 '마루니드'의 인서트 쇼트가 '그래비티'를 강하게 연상시키는 하나의 장치가 됐다면, 영화의 후반부에는 클레오가 할머니와 시위진압현장을 뚫고 산부인과에 가서 출산을 하는 시퀀스가 감독의 또 다른 작품인 '칠드런 오브 맨'을 연상시키게 하는 장치로서 기능한다. . 두 영화의 후반부 시퀀스는 한명은 아이를 임신한 상태고 다른 한명은 무사히 출산하도록 임신한 여성을 보필하는 위치에 있다는 점에서 유사한 설정을 공유하고 있다. 또한 그들이 출산을 위해 해쳐 나가야하는 길에 폭압적인 시위현장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 도 같은 설정이다. 시퀀스 내에 비슷한 쇼트도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나에겐 꽤나 중요한 맥락으로 보인다. '칠드런 오브 맨'에서, 죽은 아들을 안고 거리에서 울부짖는 어머니를 비춰주는 쇼트는 '로마'에서 죽은 남편을 안은 채 거리에서 울부짖는 어머니를 비춰주는 쇼트와 아주 흡사하다. 또 한 가지 비슷한 유형의 쇼트들. '칠드런 오브 맨' 에서 마침내 출산을 한 주인공이 자신의 딸아이를 껴안고 울며 누워있는 쇼트와 '로마'에서 클레오가 출산한 뒤 죽은 딸아이를 안으며 울고 있는 모습을 비춰주는 쇼트는 유사하다. . 그렇게 '칠드런 오브 맨'에서 2번, '로마'에서 2번. 영화는 누군가를 껴안고 울부짖는 어머니의 형상을 카메라에 담아낸다. 그리고 카메라에 담긴 어머니들의 형상은 슬픔과 비탄을 의미하는 피에타의 형상을 연상시킨다.(실제로 피에타는 '칠드런오브맨'의 주요 레퍼런스중 하나 이기도 했다.) 앞서 언급한 영화 마루니드의 쇼트가 감독의 전작 그래비티를 연상케 했다면, 이번엔 영화 내의 피에타형상의 쇼트가 그 이전 작인 '칠드런 오브 맨'을 떠오르게 한다. 그리고 '마루니드'를 통해 '그래비티'의 라이언과 클레오의 감정적 유대감을 연결 지었던 것처럼 영화는 공통된 피에타의 형상으로 아들을 잃은 어머니, 남편을 잃은 어머니, 딸을 잃은 어머니와 망가진 세계 속에서 딸을 키워 내야하는 어머니의 슬픔과 비탄을 연대한다. 그렇게, 영화는 또 다시 영화와 연대하며 어머니들을 위무한다. . . 할머니와 클레오가 산부인과에 도착했을 때, 누가 누군지 알아보기 힘들게 조명처리를 한 탓에 산부인과의 입구를 비추는 쇼트에서 우리는 할머니와 클레오의 모습을 정확히 식별할 수 없다. 영화는 그저 곧 어머니가 될, 이미 어머니의 직무를 수행하는 여성들을 클레오와 함께 잡아줄 뿐이다. . 마침내 클레오가 출산할 때, 아버지의 책무를 저버린 집주인 남편은 수술실에 입장하지 못한다. 마치 성역과도 같은 그곳에서, 클레오는 들것에 실려 수술실로 이동한다. 헌데 이때 카메라는 들것에 실려 나가는 클레오를 따라 가지 않고 옆으로 패닝한 뒤, 출산의 고통에 힘겨워 하는 다른 어머니들을 담아낸다. 그렇게 영화의 촬영은, 모두를 낳고 길러낸 어머니들에 대한 예의를 지킴과 동시에 영화가 단순히 클레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모두의 어머니들에 대한 이야기임을 방증하고 있는 것이다. . 영화의 말미에서, 클레오는 거센 파도를 온몸으로 이겨낸 뒤 남의 아이들을 구해낸다. 그러고 나서 아이들과 아이들의 어머니와 부둥켜안은 채 실은 아이를 가지기 싫었다고 울며 고백한다. 허나 앞서 클레오가 순산에 실패했을 때 흘린 눈물은 분명 아이를 원치 않은 사람의 눈물이 아니었다. 분명 클레오는 의사들이 태아에게 심폐소생술을 할 때 그 누구보다 아이가 살기를 간절히 바랬을 것이다. 본인의 목숨까지 걸며 바다에 뛰어들어 남의 아이의 목숨을 구해낼 때 클레오는 비로소 모성이란 이해할 수 없는 불가항력을 체감한다. . . 이처럼 로마는 클레오를 통해 단순히 어머니만을 응시하는 영화인가? 그렇지 만은 않다. 클레오가 집을 나설 때, 영화는 초반부터 카메라의 패닝을 통해 클레오의 모습과 선거유세를 하는 인물들의 모습을 하나의 쇼트안에 담아 은연중에 개인과 사회를 조금 씩 밀착시킨다. (이 모든 요소가 단절된 쇼트가 아닌, 하나의 쇼트 내에 담겨 있다는 사실은 분명 중요한 맥락이다. 동시에, ‘로마’의 롱테이크 촬영이 단순한 기교의 과시에 불과한 게 아니라는 증거다.) . 영화의 후반부, 마치 시간의 수평적 흐름을 시각화 하는 것처럼 보이는 하나의 트래킹 숏 안에 가구용품점에 온 클레오와 시위현장이 함께 담기는 순간, 개인과 사회는 뗄래야 뗄 수 없이 온전히 일체되고 카메라는 그 두 가지 요소를 한 곳에 담아내는 장이된다. 그리고 동시에, 영화는 보편성의 영역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간다. . 그렇게 개인과 연결된 사회란 어떤 곳인가. 그곳은 아이들과 어른들이 유희로서 가지고 놀던 총이 살상도구가 되고 육체의 용맹함을 원하던 이가 정치깡패가 되는 곳이며 죄 없는 이들이 거리에서 죽어나가는 비극과 아이러니로 가득 찬 곳이다. 그런 세상에서 어머니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영화는 라스트신으로 마지막 예를 다한다. .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영화의 첫 장면과 대비되어 있다. 청소물이 고여 있는 주차장 바닥의 타일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으며 날아가는 비행기를 물에 비치게 하며 간접적으로 하늘을 보여주던 영화는 끝에 이르러서는 계단을 올라가는 클레오의 모습을 아래에서 위로 올려 찍는다. 이때 카메라는 마치 클레오를 공경이라도 하는 마냥 계단을 오르는 클레오를 아래에서 올려본다. 그리고 클레오가 프레임에서 사라지면 더 이상 카메라가 하지 못하는 공경의 역할을 비행기가 대신 수행한다. 비행기가 하늘 가운데로 날아오며 관객들로 하여금 하늘을 직접적으로 올려다 보게 하는 순간, 그 순간 영화는 인물과 인물로 대변되는 무엇을 우러러보는 최고의 예절로서 기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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