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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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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years ago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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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한낮의 연애

책 ・ 2016

평균 3.6

표제작 「너무 한낮의 연애」를 읽고 씁니다 어디선가 들었던 이야기. 집시들은 결혼 서약을 할 때 이런 말을 한다고 한다. “당신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 당신을 떠나겠습니다.” 이 얘기의 진위여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 서약에 매료됐던 이라면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 사랑하지 않는 순간 상대를 떠난다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지를. “오늘도 어떻다고?” “사랑하죠 오늘도.” 그리고 또한 알고 있을 것이다. 사랑함과 사랑하지 않음의 차이는 그렇게 칼로 무 베듯 잘리는 게 아니라는 걸. 그런데 양희는 16년 전 맥도날드에서 필용에 대한 사랑을 매일매일 새로고침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양희는 그 사랑이 없어졌다고 말했다. 너무나 권태로운 한낮의 말투로. 우리 삶에 이런 관계가 가당키나 할까.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그걸 묵묵히 들어주기만 하는 상대. 그러면서 내게 사랑을, 그리고 그것의 그저 그러함을 고백하는 상대. 사실 <너무 한낮의 연애> 속엔 우리가 ‘관계’라 칭할 만한 것이 등장하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핵심은 액션과 리액션이다. 하지만 이 소설에선 그 리액션이 부재한다. 필용과 양희의 관계, 양희가 쓰고 있던 대본 속의 관계, 필용과 매표소 직원과의 관계, 필용과 회사 시설물들 사이의 관계… 리액션이 사라진 관계 속에서 남겨진 대상은 어딘가 부자연스러우면서도 차라리 편해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소설은 이 특징을 극대화 시켜 조금 이상하면서도 이상적인 방식으로 가장 자연스러울지 모르는 관계를 표현하기도 한다. 그건 양희의 연극 <나무는 ㅋㅋㅋ하고 웃지 않는다> 속에 나타나있다. ‘나무는 ㅋㅋㅋ하고 웃지 않는다’. ㅋㅋㅋ는 리액션의 대명사다. 얼굴을 숨긴 채 상대와 연락을 주고받으며 의례적으로 붙이는 ㅋㅋㅋ. 사람들은 알고 있다. ㅋㅋㅋ를 붙일 때마다 실제로 ㅋㅋㅋ하고 웃는 사람은 없다는 걸. 그래서 연극 속에서 양희는 나무가 되고자 했다. ㅋㅋㅋ하고 웃지 않고, 그 앞에선 ‘부끄럽질 않고, 비웃질 않는’ 나무. 그녀는 관객 한 명을 앉혀두고 어떤 말도 건네지 않으며 나무처럼 고요히 앉았다. 그런 리액션의 부재 앞에서 관객이 느낀 최초의 반응은 어색함이다. 하지만 이내 관객은 그것이 외려 리액션 그 자체임을 체감하게 된다. 그러면서 그들은 편안하지 않았을까. 그 자리에 뿌리내린 채 가만히 나를 받아주고 기다려주는 존재에 대해서.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 그들은 비로소 양희를 같이 응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건 액션과 리액션이 하나가 되는 순간이다. 연극은 그렇게 ‘관계’라는 단어를 새롭게 정의내린다. ‘처음에는 견디다가 나중에는 받아들이다가 응시하게 되는’ 연극은 그렇게 이루어진다. 그런데 필용은 끝내 양희를 응시하지 못했다. 양희 앞에서 고개를 떨군 필용이 느낀 부끄러움은 어디에서 기원하는 것일까. 소설은 양희가 자기와의 시간을 견뎠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필용의 부끄러움으로 그것을 설명한다. 그렇다면 ‘너무 한낮의 연애’란 필용의 입장일 뿐 아니라 양희의 입장일 수도 있는 것이다. 양희가 정말 사랑과 사랑하지 않음을 정확히 구분해낸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이 소설에서 마침내 들춰보게 된 감정은 양희의 것이다. 진짜 관계는 될 수 없었던, ‘언제나 시선을 비스듬히 비껴서’ 필용을 바라봐야 했던 그녀의 불완전한 연애. 배우가 될 수 없다 말했으면서 거의 구도자로서 배우가 된 연극 속에서나, 진정한 관계를 꿈꿔볼 수 있었을 그녀의 내면. 양희는 집시의 사랑을 하진 못했을 것이다. 그것을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 ⠀ ⠀ 그러니까 필용, 양희는 너를 구해줄 수가 없다. 그녀 역시 나무가 아닌 인간이기에. 각자가 서로의 기억을 품고 한낮의 햇살에 눅눅해져가는 것이 우리의 최선이다. ⠀ ⠀ 양희와의 재회를 종결짓고 거리에 나온 필용을 생각해봤다. 너무 한낮의 시간만이 지독하게 곁을 지키는. 그때 생각이 들었다. 너무 한낮의 시간의 대칭점엔 ‘너무’ 한밤의 시간도 있을까. 하지만 그건 있을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됐다. 밤은 은밀하게, 외설스럽게 생장을 도모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너무 한낮의 시간을 견딘 이에게만 저도 모르게 주어지고는 쏜살같이 지나가버리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용은 갑작스레 떠올리게 된 것이다. 지나가버렸지만 그 자리에 가만히 붙박여 있는 무언가에 대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닌 ‘사라짐’의 상태로 여전히 남아 있는 그것. 필용은 그것과 마주쳤다. 그리고 그것이 자기 궤적의 일부였음을 알아챘다. ‘궤적’이라는 단어. 그건 지나간 자국을 뜻한다. 곧 궤적은 수정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남겨진 궤적을 되짚어갈 수 있을 뿐. 그런 의미에서 「너무 한낮의 연애」는 이미 내게 존재했던, 그러나 감춰졌던 궤적의 일부를 맞닥뜨리는 소설이다. 궤적은 어떤 한 점에 관한 이야기가 될 수는 없다. 그것은 선이자 방향이기에, 지금의 나로 존재하는 내가, 바로 그런 의미로 부정할 수 없는 과거에 대한 이야기다. 또한 그렇게 현재에 다다른 나에 대한 이야기다. 기억은 그렇게 잔혹하고도 의연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 반대편에서 기억의 분신으로 존재하는 나의 리액션은, ‘감당할 수조차 없이 환한’ 빛을 보듯 일그러지기도 하겠으나. 결국은 마주보고 서야 한다는 진실. 그리하여 정오를 넘어가는 청춘의 시간은 끈질기게도 감당해내야만 하는 것이 되고야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