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낡은 서랍 속의 바다
8 months ago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평균 3.9
한국어 번역본을 읽으면 두꺼운 안개 속을 걷는 기분이다. 문장은 딱딱하고, 낯선 지명과 조직은 숨을 막히게 하며, 철학적 사유는 번역과 단어의 벽에 자꾸 부딪힌다. 그럼에도 그 안에서 하나의 큰 철학적 사유를 만나게 된다. “나는 명령을 따랐을 뿐입니다.” 아이히만과 그 상징성 너머에, 수없이 반복된 무사유의 얼굴들을 마주하게 된다. 악은 괴물이 아니라 복종하는 평범한 얼굴이라는 사실을. 사유할 능력이 없다는 것은 그 자체가 도덕적 행위를 수행할 수 없는 한계임을. 그리고 우리가 모두 무사유의 얼굴을 갖게 되는 순간, 세상은 깨어날 수 없는 악몽이 된다는 것을. 번역이 아쉬워도, 그 진실은 우역우역 돌아 마음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 물어본다. 지금 사유하고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