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퇴행을 갈구하는 인물들, 이를 허락하지 않는 시간. . (스포일러) 2001년, 2006년, 그리고 2018년. <강호아녀>는 이 세 가지 시간대를 주축으로 삼아 진행되는 영화다. 그런 영화가 메인플롯에서 동떨어진 시간대를 급작스레 제시하는 순간이 있다. 바로 영화가 차오의 옥중생활을 잠시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녀에게 면회를 온 한 여성의 말을 고려하고 차오와 빈의 서로 다른 수감기간을 셈해봤을 때 그 시점은 대략 2002년에서 2003년경이었던 것으로 추산된다. 주목하고 싶은 건 그 시간대에 발생한 사건이다. 그 시간대는 바로 빈이 출옥했을 무렵의 시간대다. 빈은 다시금 사회로 내던져졌고 여전히 차오는 감옥에 유폐되어 있는 처지다. 여기서부터 둘의 시간은 다른 감각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이 순간부터 차오의 내면에 모종의 불안이 싹을 튼다. . 차오가 다른 교도소로 이감되는 장면에서 그녀는 차를 타고 2002년(편의상 표기)의 시점에서 자신이 총을 발포했던 2001년의 자리를 지나간다. 고작 1년 남짓한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도 그 순간 차오의 시선에서 2002년의 강호는 너무도 이질적인 공간이 돼버렸다.(화려한 네온사인의 톤에서 극도로 건조하게 색체를 전환시킨 영화의 미술이 이를 부러 강조한다.) 여전히 그녀는 2001년대의 시간대에 묶여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강호아녀>는 한 치의 타협 없는 시간의 속도와, 이를 따라가기에 급급한 인물의 곤혹을 병치하며 중국사회의 격변과 이에 대한 인물들의 당혹을 묘파한다. . 영화의 초반부(구체적으론 2001년대의 시간대)는 보는 이에 따라선 유치하다고도 말할 수 있을 만큼 진부함이 역력한데, 이는 철저하게 의도된 영화의 작법이었을 것이다. 영화의 시작부, 1.33:1의 정사각형 화면비 속에서 지극히 90년대 홍콩느와르스러운 인물들이 그에 걸맞는 방식으로 생동하고 있다. 2001년의 시간대의 인물들은 지금의 시점에서 보기엔 다소 철이 지난 듯 보이는 의리와 형제애 따위를 운운하며 늘상 무언가에 고취되어 있는 것만 같아 보인다. 지아장커는 초반부의 곳곳에 90년대 홍콩느와르 영화를 연상케 하는 장치들을 눈에 띄게 설치해둠으로서(가령 초반부에 흘러나오는 여러 ost나 실제로 인서트된 당시의 홍콩영화.) 이 초반부의 상투성이 다분히 의도적인 것임을 드러낸다. . 그러다 어느 순간, 관객이 눈치 챌만한 틈이 딱히 보이지 않았음에도 영화의 화면비가 1.85:1의 비율로 어느새 확장되어 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이 화면비의 전환에 대한 요지는, 영화가 이에 대해 별다른 주목할 만한 포인트를 보여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극히 영화적인 태도로 만사태평하게 삶을 영위했을 인물들에게 별다른 예고 없이 세상이 기하급수적으로 증폭되며 혼란이 들이닥친다. 아마도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극도로 장르적인 색체만이 가득했던 이 영화에 갖가지 사회적 함의가 담긴 설정들이 배치되기 시작한 것이.(차오의 아버지가 다니는 공장에서 임금문제에 직면한다는 설정은 물론, 빈과 차오가 춤을 추는 대목에서 울려 퍼지는 노래(YMCA)와 비교적 직접적으로 대두되는 볼룸댄스역시 중국사회에 서방의 문화가 서서히 반입되고 있음을 암시하는 사회적 장치로 기능한다.) 이처럼 극중 인물들은 물론, 영화 밖의 관객조차도 명확하게 인지할 수 없을 정도로 이 세계는 급작스레 몸덩이가 불어나며 격변하고 있는 것이다. . 그렇게 어딘가 모르게 균열의 조짐이 감지되던 이 강호의 세계는 머지않아 붕괴되고 만다. 2001년대의 시간대가 끝나갈 무렵, 빈은 의문의 상대에게 린치를 당한다. 정황상 그들의 정체가 비교적 분명해졌음에도 불구하고 후에 범인을 잡아들인 뒤 빈은 그들을 너그럽게 보내준다. 하지만 그 자비로운 태도가 무색하게 빈은 또다시 그들에게 무자비한 일격을 당한다. 그리고 그를 지키기 위해 차오는 허공에 총을 발포하며 이를 빌미로 경찰에 체포된다. 터무니없을 정도의 호탕함과 너그러움, 사내들의 눈물겨운 의리 등, 영화가 의도적으로 차용한 이러한 홍콩느와르적 태도는 더 이상 이 세계 내에서 통용되지 못하며 되레 사회적 제도 앞에서 좌절하고 만다. 따라서 이제 이 강호의 세계는 그간의 방식으론 존립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 중요한 것은 바로 차오가 이러한 두드러지는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급변한 사회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하고 아직도 2001년의 시간에 취해 사는 그녀는 여전히 강호의 태도로 삶을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리라 믿는다. 하지만 곧이어 그녀가 직면하게 되는 일련의 사건들은 5년이라는 세월이 초래한 이 세계의 판이한 변화를 드러낸다. 차오는 출소한 뒤 믿었던 연인에게 배신을 당하는 것은 물론, 자신의 귀중품을 훔친 가해자가 추후 폭력의 피해자가 되어있는 터무니없는 부조리를 목격한다. 그리고 본인 역시 이 부박한 사회의 룰을 곧장 습득한 뒤 생존을 위해 가해자의 자리를 자처한다. 차오는 생판 처음 보는 상대에게 거의 갈취에 가까운 태도로 현금을 뜯어내며 자신을 성적으로 착취하려는 대상에게 도리어 도둑질로 응수하는 대담함을 보인다. 그녀가 한 남성의 오토바이를 훔쳐 달아날 때 외화면에서 북소리가 쿵쿵 울려온다. 앞선 2001년대의 시간대에서 차오가 빈을 돕기 위해 총을 꺼내기 직전의 시점에서도 울려왔던 이 북소리는 마치 새로운 세계로의 입장을 강요받는 인물들의 내적 혼란을 청각화하는 맥락으로 사용되고 있는 듯하다. 감옥에서 출소한 2001년의 차오는 변화된 세계의 부조리함을 곧이곧대로 체득하며 그제야 2006년의 시간을 향해 부랴부랴 뛰어가고 있다. . 2006년, 차오는 마침내 빈과 재회한다. 그런데 여기엔 굉장히 이질적인 모멘트가 있다. 그 순간 영화의 편집은 응당 존재해야만 하는 하나의 숏을 부러 지워낸다. 영화는 5년 만에 상봉한 빈과 차오의 재회의 순간을 관객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눈물겨운 재회의 순간을 마친 뒤 선착장으로 함께 걸어오는 빈과 차오를 마주할 뿐이다. 차오의 입장에서 지극히도 감격스럽기 그지없었을 이 극적인 순간을 덜어낸 영화의 선택은 더 이상 빈이 차오에게 있어 자신의 삶을 극적으로 구원해줄 유일무이한 존재로 매김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4년, 빈이 차오보다 먼저 출소해 매서울 정도로 급하게 변모한 이 사회에 홀로 적응해야 했던 기간이다. 차오의 입장에선 삭제되었다 하여도 무방한 이 4년의 기간이 이들의 관계를 완전히 분절시켜놓았다. 차오는 여전히 2006년의 자리에서 2001년의 강호를 갈망하지만 이미 빈은 지극히도 2006년의 시대상에 어울리는 사람으로 거듭난 지 오래다. . 차오가 빈에게 이별을 선고받는 여관방에서의 씬은 굉장히 긴 롱테이크로 촬영되었다. 이 순간의 롱테이크는 실시간으로 급변하는 인물들의 정서를 생생하게 살려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사용의 당위가 충분했겠지만, 무엇보다도 이는 빈과 차오 서로간의 시간적 맥락을 철저히 의식한 연출이라고 읽힌다. 분명 빈과 차오 사이에는 변동된 사회에 대한 어떠한 재적응의 시차가 존재한다. 하지만 편집이 일체 개입되지 않은 그 롱테이크 숏에서만큼은 빈과 차오의 시간은 동일하게 흐른다. 어쩌면 이 롱테이크엔 강호의 시간대로 회귀하여 다시금 빈과 동일한 시간을 감각하고 싶은 차오의 간절한 소망이 깃들어 있지는 않았을까? 빈이 매정하게도 그 부탁을 거절하자 길고도 길었던 숏이 뚝 끊어지고 마치 프레임 밖으로 팅겨져 나가기라도 한 듯 그 다음 숏에서 쓸쓸히 밤거리를 걸어가는 차오의 모습이 보인다. . 이어서 차오의 실연은 한 번 더 반복된다. 그리고 비슷한 함의를 지닌 롱테이크 역시 한 번 더 되풀이된다. 차오가 기차 안에서 낯선 남성의 구애를 받고 마침내 서로 간의 내밀한 대화가 시작될 때, 이때 역시 영화는 롱테이크의 촬영으로 이들을 한 호흡에 담아낸다. 짐작컨대 이 순간에서역시 앞서 언급한 맥락과 유사한 차오의 염원이 투영되었으리다. 하지만 차오가 남성에게 자신의 복역사실을 털어놓자 잔인하게도 영화는 또다시 숏을 단절시키며 차오를 프레임 밖으로 밀어낸다. 열차가 지나가고 차오는 이를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며 그녀의 새로운 만남에 대한 시퀀스가 종결된다. 극중 차오가 겪는 이 두 번의 실연은 급변하는 사회적 현실과 떼어놓고 판단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사회의 무정함을 힐난해야할지 아니면 차오 개인의 모자람을 비판해야하는지, 우리는 도무지 쉽게 단언할 수가 없다. . 빈과 결별한 직후, 차오는 어느 가수의 콘서트에 찾아가 그의 노래를 읊조리듯 따라 부르며 이별의 벅찬 슬픔을 애써 억누른다. 이 장면의 촬영 비하인드는 시간과 인물을 다루는 영화의 핵심과 꽤나 맥이 닿아있다. 사실 그 씬에서 노래를 열창하고 있는 가수를 찍은 영상은 실제로 지아장커감독이 2006년도의 시점에 촬영한 라이브영상이다. 하지만 이를 듣고 있는 2006년의 시간대 속 차오의 모습은 영화가 차오라는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 자오타오를 영화의 촬영시기인 2018년도에 찍은 픽션의 영상이다. 해당 장면에서의 영화는 노래를 부르는 이와 듣는 이를 교차하는 숏-리버스 숏의 관계에 픽션의 특성을 이용한 일종의 시차를 부과한다. 그런 뒤 영화는 그 시차가 발생한 두 숏을 접합시킴으로서 현재의 자리에서 과거로의 회귀를 지독히도 갈망하는 인물의 쓰라린 마음을 형식적으로 조형해내며 그녀를 위무하고 있는 것이다. . 이어지는 장면에서역시 이 시간적 맥락이 강조되는 설정이 등장한다. 2006년대의 시간이 끝나갈 무렵, 영화는 앞서 기차 안에서 승객들의 실없는 대화에서만 가볍게 언급됐던 UFO를 정말로 출현시킨다. 지아장커의 전작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아마도 그 순간 2006년도에 개봉한 그의 대표작 <스틸라이프>속 UFO를 떠올렸을 것이며 나아가 이 영화 속 2006년도의 UFO를 그의 2006년도 영화인 <스틸라이프>속에서 날아온 일종의 초텍스트적인 상징물로 이해했을 법도 하다.(<강호아녀>로 그의 영화를 처음 접하는 나 또한 <스틸라이프>에서 뜬금없이 UFO가 등장한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이 영화를 보았다.) 개인적으로 이 UFO가 상징하는 바를 명명백백히 밝혀낼 자신이 없기도 하다만, 그에 앞서 이것이 어떠한 의미를 함축한 상징물인지를 속단해버리는 것은 이 영화의 텍스트를 읽는데 있어 그다지 이롭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전히 강호의 마음가짐을 가진 순진한 인물이 격변한 세월의 흐름에 호되게 당하기만 하던 와중에 압도적으로 초월적인 존재와 조우했을 때 느낄만한 초현실적인 감각, 이 의문스런 장면을 마주할 때 관객으로서 필요한 자세는 이 감각을 헤아려 보는 것 정도가 아닐까. 여기엔 그 초월적 존재에 기대어 다시금 시간여행을 하고픈 차오의 소망이 있었던 것일까? 영화는 곧이어 2018년의 시간대로 점프한다. . 영화의 후반부를 이루는 2018년, 그녀의 바람이 이루어지기라도 한 듯 정말 그 시간대의 차오는 강호로 돌아가 이전과 같은 생활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빈이 찾아온다. . 11년 만에 다시 모습을 보인 2018년의 빈은 제 발로 걷지도 못할 만큼 망가질 대로 망가져있다. 2001년대의 시간에서 다리를 직접적으로 가격당하고도 끄떡없었던 그의 다리의 급작스런 마비는, 곧 그 쏜살같은 시간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인물의 내적 상흔이 육체적 망가짐으로 육화된 것에 다름 아닐지도 모르겠다. 이 막막한 순간에 빈은 유일한 피난처로 차오의 품을 택한다. 하지만 차오의 곁에서 빈은 성하게 삶을 이어나갈 수 없다. 차오는 번번이 그를 2001년의 강호 속에서 살게 하려하는데 이는 빈으로 하여금 자신이 더 이상 예전 같지 못함을 뼈저리게 자각하도록 유도하기 때문이다. 자의로 움직일 수조차 없는 빈에게 예전의 부하들이 다하는 충성스러운 태도에서 우리는 빈의 건재함이 아닌 그의 쇠약함과 애처로움을 본다. 다시금 차오와 함께 강호의 리더로서 살아가는 것, 그건 2018년의 빈에겐 병들어 죽기 직전의 상태에서 벌이는 시대착오적 영웅놀이에 불과한 것이다. 서로가 느끼는 시간의 흐름에 대한 상이한 감각, 극중 여러 차례 반복되는 빈과 차오의 만남과 헤어짐의 순간들엔 언제나 이것이 그 기저에 깔려있는 것이다. . 빈과 차오의 이 기구한 운명을 갈무리하며 인물의 질곡을 연출하는 영화의 엔딩은 좀체 무시할 수가 없을 정도로 강렬하다. 영화의 마지막, 빈이 떠날 것이라는 음성 메시지 하나 만을 남긴 채 차오의 곁을 홀연히 달아난다. 불안을 숨기지 못하는 차오는 곧장 문밖으로 달려 나가 멍하니 밖을 응시한다. 그리고 오랫동안 들리지 않았던 그 북소리가 다시금 귓전을 때린다. 몇 번의 쿵쿵 소리가 이어지고 이들의 장구한 일대기는 그렇게 끝이 난다. 영화의 엔딩에서 가장 주목되는 요소는 바로 영화의 마지막 숏이 CCTV화면의 한 장면으로 장식되었다는 점이다. . 난데없이 등장한 이 CCTV, 짐작컨대 이건 언젠간 빈이 자신을 떠날지도 모름을 의식해야만 하는 스스로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차오가 사전에 설치해둔 기기일 것이다. 속사정이 어찌되었든 이제 이 공간은 상호간의 불신에 토대한 채 간신히 자리하고 있다. 이처럼 불순한 의도가 담겨있는 건 물론, 심지어 그 불안이 실제로 실현되고야마는 그 자리에서 강호는 여전히 강호의 방식으로 존립할 수 있는가? 영화의 첫 장면, 시끌벅적한 버스 안에서 영화는 아이의 눈과 차오의 얼굴을 교차하며 시작했다. 강호를 바라보는 차오의 시선이 아이의 때 묻지 않은 시선과 상통함을 은유하며 시작했던 영화의 마지막에 남는 건 무엇인가. 영화의 마지막 숏, 우리는 스스로가 설치한 CCTV에 찍히고 있는 차오를 본다. 감시, 그리고 감청. 현 사회의 해악을 자기도 모르게 체득한 인물이 자기가 놓은 수렁에 빠져버린 채 좀처럼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 이것이 <강호아녀>의 최후에 목격되고 있다. 다시금 울려오는 이 북소리는 차오를 과연 어떤 세계로 인도하고 있는 걸까.
좋아요 21댓글 0


    • 데이터 출처
    • 서비스 이용약관
    • 개인정보 처리방침
    • 회사 안내
    • © 2024 by WATCHA, Inc.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