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박희경

박희경

8 months ago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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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그

영화 ・ 2018

평균 3.5

핏내 스민 콘크리트를 냉담히 응시하는, S.크레이크 찰러의 지독하게 한기 서린 고담시티 영화 '드래그'(원제 : Dragged across concrete)는 현대판 고담시티가 어떤 곳인지를 톡톡히 잘 보여준다. 이곳엔 세상을 구원할 배트맨도, 특별한 악의를 품은 조커도 없다. 지옥을 그리는 방법엔 여러가지가 있겠다만, 찰러가 그리는 지옥은 현세와 한 치의 이질감이 없는 일상적인 풍경에 있다. 그는 단테의 지옥도처럼 온갖 불로 호들갑 떨지 않고도, 누구나 공감할 만한 현대의 지옥도를 유려하게 그려냈다. # 무엇이 고담시티를 만드는가 1) 존엄보다 생존 적절한 보상과 존경이 없으면 공권력은 타락하고, 존엄이 빈곤한 곳에선 기꺼이 타락을 반추한다. 영화는 출소하자마자 범죄를 계획하는 흑인 헨리(토리 키틀스)와, 세간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부패한 길을 선택하는 백인경찰 브렛(멜 깁슨)을 주축으로 시작된다. 헨리는 경범죄로 수감된 후 출소해 집으로 돌아오지만, 그를 반기는 현실은 참혹하다. 가족의 생계를 부양하기 위해 어머니는 매춘과 마약을 일삼고, 휠체어를 탄 어린 막내동생은 그런 어머니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방 안에 홀로 남겨져있다. 그들에겐 그러한 비참한 수단 외에는 이 현실을 타개할 마땅한 도리가 없다. 결국, 헨리는 그런 가족을 위해 범죄에 다시 가담한다. 존엄이 빈곤한 곳에서 타락한 선택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유이다. 경찰인 브렛은 직장에선 그 공로를 무시받고, 가정에선 가족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는 무력한 아버지이다. 20년이 넘게 경찰 직종에 몸 담고 정직하게 일해왔지만, 그 대가로 돌아온건 과잉진압이라는 명목하에 웃음거리로 박제된 초라한 신세다. 시민들의 안전을 수호하는게 직업이나, 정작 가족들의 안전도 보장하지 못하는게 그의 현실이다. 그런 현실 속에서 그는 일평생 수호하던 법을 뒤로하고, 일확천금을 노리는 부패경찰로 전락한다. 이 둘은 유치장으로 향하는 길이 아니라면, 양 끝단에서 서로 만날 일 없을 것 같은 자들이다. 영화는 그런 자들이 각자의 이유로 세상을 등지면서 교차하는 이야기이다. 사실 각자의 이유라고 구분 지을 것도 없을 것이다. 이 둘은 인종부터 직업, 환경 등 모든 것이 다르지만, 생존을 위협받는 현실만큼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존엄을 지키는 것보다 생존이 우선시 될 때, 인간성은 탈인간화되고 비극은 일상이 된다. 영화는 이러한 비극을 매우 담담하고 정적으로 묘사한다. 화려한 액션과 끝내주는 음악으로 관객들에게 극적인 감동을 선사하기보다, 현실과 유사할 정도로 정적이고 느린 호흡을 통해, 관객들조차도 이 모든 비극을 같은 호흡으로 체험하길 원한다. 반드시 깊게 감정이입해야만 체험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면, 이 영화는 정반대로 극한의 관조를 통해서만 체험할 수 있다. 2) 혐오가 굳어져버린 사회 브렛의 동료 앤서니는 약혼녀에게 줄 반지 구매를 망설이면서 이런 말을 던진다. "제 여자친구한테 어떤 미래를 줄 수 있을지 생각 중이었어요. 그 삶이 화려한 다이아몬드로 가득하진 않을 것 같아서요." 사랑하는 연인과 약혼을 망설일 정도로, 앤서니의 눈에 비친 미래는 비관적이다. 왜 아니겠는가. 열심히 일한 직장의 보수는 쥐꼬리만한데, 그렇다고 내 노고를 정당히 치사하지도 않는다. 갈수록 행사할 수 있는 권위는 약해지니, 미디어에선 경찰을 똥으로 안다. 설상가상으로, 내가 잡아 집어넣은 범죄자에 비해 범죄율은 나날이 급증한다. 세상은 더이상 정직함과 성실함을 미덕으로 여기지 않고, 그런 일상의 반복에서 우리가 쉽게 들 수 있는 무기는 '타인을 향한 혐오'다. 브렛의 딸의 하교길은 기껏해야 8블럭이다. 15분 남짓일 그 길 위에서, 아이는 사방을 경계하고 안전을 걱정한다. 마침내 이유 없이 아이에게 쏟아져버린 쥬스. 도와줄 이웃 하나 없는 8블럭짜리 길 위에선, 고작 쥬스 하나가 무엇으로 변화할지 모를 일이다. 영화는 인종차별 유머를 가감없이 일삼는다. 농담을 먹고 자라난 편견은, 연대를 막고 타인을 더더욱 타자화시킨다. 사실 농담의 강도가 제법 세서 영화는 많은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는데, 필자는 그 유머의 속뜻이 정반대에 있다고 믿는 쪽이다. 예를 들어 세간의 편견과 다르게, 백인경찰 브렛은 그 누구보다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살생에 거리낌이 없었다. 반면에, 흑인 헨리가 여태 저질러본 범죄라곤 도둑질 좀 하고 동생 괴롭히는 놈들을 혼낸 경범죄가 다였다. 그렇기에 나는 이 영화가 인종차별을 무기로 삼아, 역으로 인종차별의 덧없음을 지적하고 편견을 무산시키려 한다고 느꼈다. 막대한 부를 거머쥔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사실 사람들의 처지는 서로간에 크게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자유를 헌납하고, 원치 않는 일에 얽매여 살아간다. 일을 마치고 도착한 보금자리에서, 고단한 하루 끝에 들여다본 SNS는 화려한 별천지로 가득하다. 내 삶은 부족하구나. 미디어는 이러한 불행을 원동력 삼아 사람들을 끊임없이 갈라치고 현혹하고, 사람들은 공허한 비난을 방어기제 삼아 스스로를 보호한다. 이미 단단하게 굳어버린 콘크리트는 완전히 깨부수지 않고선 수선이 어렵다. 굳어버린 편견에 칼을 겨누는 자는 멍청이로 치부되는 사회에서, 우리는 서로를 찌르고, 서로를 웃어넘긴다. 3) 타인을 향한 무감한 시선 단단하게 굳은 콘크리트의 표면은 차갑고 거칠다. 고담시티를 완성하는 결정타는, 차갑고 거친 콘크리트 면에 굳어가는 핏자욱을 무감히 내려다보는 시선에 있다. 앤서니와 계획을 공모하던 도중, 집을 털려고 담을 넘는 두 강도들이 브렛의 시야에 잡힌다. 내 알 바 아니라는 듯, 그는 그 장면을 무심히 흘려보낸다. 타인의 비극에 무감해질 때 지옥화는 가속화된다. 이후 브렛과 동료 앤서니는 보글맨을 추적하다가, 은행에서 참혹한 일이 일어났음을 깨닫는다. 이를 막지 못했단 자괴감에 괴로워하는 앤서니를 뒤로하고, 브렛은 무감하게 중얼거린다. "이미 늦었어. 16분 안에 경찰이 출동할 확률은 50% 미만, 아니 25%도 채 안된다고." 브렛은 시종일관 확률 농담을 던지는데, 이런 삶의 비극조차 그 앞에선 단순한 확률의 문제로 치환된다. 선의는 숫자로 계산하는 것이 아니다. 이같은 선의에 대한 체념은 악의를 방조하고 기꺼이 공범이된다. 흉악범죄로 가득한 뉴스 속 세상을 무심히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일순간 선득하게 느껴지는건 이러한 이유때문이 아닐까. # 그럼에도 희망은 있는가 헨리는 당초에 약속한 만큼은 아니지만, 브렛의 가족에게 그의 몫을 가져다준다. 이는 쌩판 모르는 타인이 뇌까린 말일지라도, 진심일 것이라 믿은 선의에서 비롯된 행동이다. 헨리는 부정한 방법으로 남의 돈을 갈취했고, 기어이 사람까지 죽였다. 그렇다고 그가 진정 악인이었는가. 영화를 다 본 이들은 쉬이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그저 어머니께 효도 좀 하고, 어린 막내동생에게 창창한 앞길을 만들어주고 싶었던 평범한 한 가장에 불과했다. "내 꿈은 바깥 세상하곤 다른 세상을 만드는 거야. 내 다리가 멀쩡하다 해도 진짜 동물 사냥은 안 할 거야. 그건 부자 백인이나 하는 짓거리야." 다리가 불편한 막내 동생의 꿈은 게임디자인이다. 영화 초반, 동생과 샷건 사파리 게임을 하던 도중, 동생은 '현실 사파리'를 비난한다. 그에 헨리는 이렇게 응수한다. "이 형님은 진짜 사파리도 문제없어." 영화의 엔딩 무렵, 모든 걸 마무리한 그는 동생과 나란히 앉아 다시 사파리 게임을 켠다. "사자 좀 사냥해보자." 삐까뻔쩍해진 상아탑 안, 그가 하고 싶은건 진정 사파리 게임일까. 최하위가 최상위로 역전됐을 때, 샷건은 어딜 향해 겨냥될 것인가. 그가 이룩한 부를 자유의 깃발로 삼고 사파리에 갇힌 피식자들을 유토피아로 해방시킬지, 혹은 사파리 위에 군림한 그저 또 하나의 포식자로 전락할지에 대해 영화는 끝끝내 명쾌한 답을 보여주지 않는다. 핏내 가득한 고해 한가운데서 그가 치켜든 재물이 뿌듯하면서도 삿되게 느껴지는건, 낙관적인 희망을 품기엔 그 빛이 너무 약하고 탁하기 때문일 것이다. Shotgun Safari - The O'Jays Don’t close the drive in - Butch Tavar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