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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렇게나 휘갈겨 쓴 일기 같기도 하고 속 깊은 철학책 같기도 하다. 아이돌 '덕질'의 일면을 이런 문장들로 묘사했다는 것이 신선하게 느껴지다가도, 에이 너무 갔다ㅡ 싶어진다. 일상을 비일상적으로 고찰하는 모순이 이 책의 작은 단점(종종 몰입을 방해한다)이자 강력한 매력. 특이한 소재로 주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보편적 사랑의 감정과 결부시키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데 "팬의 사랑"에 대한 글이라고 딱 선을 그은 작가의 강단도 마음에 든다. - 사람들은 소중한 것일수록 기록을 통해 남기려고 하죠. 그러나 어떤 기록도 순간의 모방일 수밖에 없다면 도대체 사랑은 어떤 방식으로 남겨져야 합니까? (23쪽) - 인양된 조각상에서 따개비를 긁어내듯, 언어를 긁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실존도, 또 그 앞에서 압도되는 나의 감정도 해치지 않을 다른 질서의 언어가 필요했다. (39쪽) - 사람들에겐 제각각 특징이 있지만 그곳에 모인 이들은 모두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연기하고 있었다. 그들이 모여 있을 때면 눈에 보이지 않는 꽃가루가, 분홍색 연기가 피어났다. 나는 천덕꾸러기 곡예사가 분장 아래 숨기고 있는 것처럼 그녀들의 눈에 고인 기묘한 희망을 보았다. (68쪽) - 그 시절 내가 자주 인용한 것은 롤랑 바르트의 문장이었다. 퇴근길, 추운 저녁. 기약 없는 기다림을 할 때면 나는 농담처럼 이 말을 만옥에게 던지곤 했다. '나는 사랑하고 있는 걸까? - 그래,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때 기다리고 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사랑하지 않게 된 지금,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알 수 없다. (71쪽) - 밤이 깊었고 얼마 뒤면 진짜 눈이 내릴 터였다. 그러나 흩날리는 가짜 눈을 맞으며 나는 아름다운 것엔 언제나 속아도 좋다고 생각했다. 차갑지 않고 아름답다면 그게 더 나은 건지도 모르겠다. (128쪽) - 너는 일생을 사랑하는 걸 취미로 삼은 사람이었다. 본 영화도 읽은 책도 들은 음악도 많지 않았지만 사랑만은 지치지 않고 꾸준히 했다. 어느 날 고통에 못 이긴 듯 네가 이렇게 중얼거렸다. 더이상 사랑하고 싶지 않아. 병이야. 그러나 내가 너의 병이 된 적은 없었다. 너의 병이 나만은 비껴갔다. 나는 이것이 두고두고 서운했다. (1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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