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블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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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years ago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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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닝

영화 ・ 2018

평균 3.5

<밀양>, <시> 다음이 이것이라니 매우 실망스럽다. 작가적인 시선이 있었다던 이창동은 약자를 전지적으로 헤아릴 수 있다는 오만함이 더 고루해졌을뿐 자의식에 반성이 없다. 그가 가련하게 내려다보는 젊은 세대에 '여성'은 없다. 자유로운 여자애처럼 묘사했지만 결국 발냄세나는 한국의 개저씨 문학처럼 존재하지 않고 사라진다. 이창동이 여성의 비극에 유난히 집착하고 남성이 죄를 짓고 속죄할때도 여성을 제물처럼 소비하는 것을 다룰때 폭력적인 묘사를 해왔지만 8년 동안 변할 줄 알았다. 언제까지 자기 연민만으로 영화를 만들 것인지? 본인 영화의 단점과 비판받는 지점을 다 아는척 자신의 영화를 다 장악한척 하는데 알면 뭐하나. 바뀌어야 나아지는거지. 버닝의 원작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근작들도 아니고 80년대작인 '헛간을 태우다' 인것부터 망조의 조짐이 보였다. 문학을 시네마로 연출할때 더 나은 것을 보여주진 못할 망정, 현실을 민감하게 인식한 각색도 아니었다. 상황이나 대사 하나하나가 한물간 개저씨 문학인데, 이창동도 그렇고 한국남자감독들은 섹스신을 왜 그렇게 찍는지? 이젠 말하기도 귀찮을 정도로 그저 한심하고 멍청해보인다. 내가 뭐하러 이런 새끼들의 영화를 보고 시간을 할애하나 부질없어질 정도로. 젊은이들의 미스테리를 그렸다는데, 호러장르를 하고 싶으면 하면 되는데, '아트'를 한다고 자부하는 이창동은 차마 호러는 B급 같아서 싫고 도전정신도 없었고 장르의 껍데기만 빌려온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아무것도 아닌' 어떤 결과물이다. 꼰대 감독은 시종일관 '젊은이들' 운운하면서 그들 분노의 대상이나 원인이 모호해서 미스테리다 그러지만, 기본으로 여자를 죽이는 것은 잊지 않는다. 영화계에서 몇십년전에 끝낸 여자를 죽여가며 성장하는 소년 서사를 구질구질하게 재현해낸 것을 해외에서 칭찬받는다고 뿌듯해하고 있다. 참담하다. 좋은 촬영은 인물(특히 여성)을 철저히 대상화하기 위한 것이며 자국의 모든 것들을 제1세계를 의식해서 가공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백인남들 지들이 만들면 철퇴를 면하기 어려운 여성혐오적 서사를 야만의 제3세계 한국이란 나라의 얘기니까 맘껏 물화해서 찬사하는 것도 역겹다. 라스 폰 트리에의 신작을 혹평하면서도 버닝은 호평하는 가증스러움. 앞에선 여성운동을 지지하는 척 하면서 뒤로는 이딴 영화들을 적극적으로 밀어주는 졸렬함과 비열함. 한국영화와 국내의 평가 다양성과 여론 수준을 저급하게 여기는 것이다. 여성주의적인 시각으로 영화를 평하는 집단이 한국에도 있고 늘어나고 있는데, 그런 노력들을 모른척 하거나 없을 것이라고 치부해버리기 때문이다. 백인남들이 배설하고 싶은 욕망만을 눈치채고 오리엔탈리즘을 기반으로 철저히 무시당한다는 것은 모른채 하청받듯이 출품작을 만들어내는 충무로 영화계. 이토록 해외 평단(백인남성들이 대부분인)을 의식한 결과물인데 한국적이고 근원적이라는 이동진의 호평이 얼마나 아이러니한지. 어디 내놓아도 뒤지지 않을 유구한 여성혐오가 한국적이라고 생각했다면 맞는 해석일수도 있겠다. 한국의 남자들이 열등감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것을 자양분 삼아 염치없고 위험한 패악을 부리는 것을 현실이든 영화에서든 많이 보았다. 젊은 세대의 남자들일수록 패배의식을 내면화해 강자에겐 저항 대신 굴종하며 권력에 편입하려 애쓰고 상대적 약자에게 스스럼 없이 공격성을 표출해버리는 현실인데, 그 정서를 그대로 담은 것도 모자라 단죄의 자격까지 부여하는 영화를 한국의 근원이니 하면서 예술과 인식의 토대로 해석하고자 하는 수고에 의미가 있나? 이창동과 이동진...니들에게 젊은이, 청춘은 남자의 대명사인지? 무엇보다 청춘들의 고투와 분노를 두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함부로 안다고 할 수 있나? 가혹한 세상살이, 부와 권력에 대한 시선이 청년의 것을 빌릴뿐 피상적인 수준에 머무른다. 한 사람은 영화를 만든 장본인이고 한 사람은 영화를 본 평론가니까 알 것 아닌가, 젊은이, 청춘이 아니라 중년 남성 시각으로 한국남자들 자위해주는 영화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면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 비겁함들을 감히 헤아리기가 힘들다. 시기상 논란이 있을법한 지점에서 애매한 용어를 쓰고는 대단한 걸작을 발견한 듯이 빨간 뿔테 치켜올리며 호평하는 꼴이 한심스러워 그의 평론이 좋다고 생각했던 시간들이 후회스럽다. 감독이 몇몇 지점에서 전작과 다른 시도를 했더라도 반드시 발전이라 할수는 없고 오히려 문어체의 대사에 이미지만 추종해서 모호함의 강점보단 한계가 뚜렷한데, 새로운 영역으로 나아갔다는 평이라니. 감독이 젊은 세대의 이야기를 문학적 밀도보다 이미지를 차용하는 식으로 소비해버리고는 '미스테리에 대한 영화입니다' 같은 말을 남겼는데, 호평을 위한 과잉해석이다. 이동진이 서울 소재 대학 종교학과를 졸업해서 영화의 상징이나 메타포 위주의 해석을 좋아한다는 말을 공공연히 들을 수 있는데, 어디까지나 개인의 취향이다. 그를 평론의 정석이자 대표격으로 받아들이면서 영화 내 상징위주의 해석 방식, 즉 영화를 가지고 퀴즈를 풀듯이 머리싸움을 하는 방식이 팽배해졌다. 그런 영화들이 반드시 좋은 영화라고는 할 수 없는데 작품성 있는 영화의 기준이 그렇게 되버린 것이다. 이에 역기능으로 '좋은 영화'의 기준에 작품 내 인물을 소비하는 방식, 어떤 가치를 담고 있느냐, 창작자로서 메세지에 책임감이 있느냐 따위는 논의의 쟁점에서 뒤로 밀려났다. 영화에서 약자들이 어떻게 착취되건, 메세지가 시대착오적이건 이동진 취향에 맞아서 별점을 많이 주면 사람들은 비판의식이 부족한채로 받아들이고 영화 내 상징이 뭐니 해석에만 열중하면서 중요한 인본의 가치 정당성을 논하는 것에 배타적으로 반응한다. 이게 제일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동진 평론가가 주최하는 GV는 영화와 대중의 거리를 좁히고 영화로 커뮤니케이션 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단비와 같은 이벤트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평론가 개인의 인기가 높아지고 영향력이 커지면서 반작용이 생겼다. 이동진이 가장 대중적인 평론가라는 평가에도 의문이 들었다. 영화를 보는 시각이 의외로 편협하다는 것을 자주 느끼기 때문이다. 명료한 메세지보단 종교적 상징성과 시나리오의 장치로 비극을 선정적으로 전시해, 영화 안팎 가성비 좋은 문화오락을 제공했던 <곡성>. 어디가서 지적 충만감을 채우고자 하는이들에게 딱 이었던 영화였고. 이에 쏟아졌던 낯뜨거운 호들갑. 그 중심에 이동진이 있었고 그때처럼 버닝에서도 그 선봉장 역할을 재현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비밀은 없다>에 혹평을 가한 것은 기막힐 노릇이었으며, 영향력 있는 평론가가 폭넓은 시각이 아닌 전적으로 자신의 취향에 의지해 평을 할때 어떤 폭력이 벌어지는지 목격하는 기분이었다. 실제로 비밀은 없다는 흥행에 실패했다. 여성영화에 대한 요구가 한참이었을 시기였고 이경미 감독 7년만의 신작이었다. 개봉하자마자 달린 이동진의 혹평이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그가 별점을 달자 왓챠의 별점이 평균에 맞추는 것처럼 조정되는 것을 실시간으로 보았다. 남자배우들이 떼로 나오는 영화는 어떻게 만들어도 스크린을 웬만큼 점유하면 흥행할 수 있다. 그러나 여성배우 주연의 여성영화는 상대적으로 남성영화만큼 흥행하기가 쉽지 않다. 더구나 비밀은 없다는 꽤 특이한 작품이다. 이동진의 혹평은 작품의 흥행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는 수준이었다. 정말 궁금했다. 아무리 취향이 있다지만 비밀은 없다가 그 정도의 혹평을 받을만한 작품이었는지를. 곡성 따위에 별 다섯개 줄 정도의 관대함이 왜 비밀은 없다에는 그럴 수 없었는지. 전개가 다소 산만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판을 정리하는 시나리오의 떡밥 회수는 치밀했고 장르물로서 쾌감도 좋았다. 기존의 여성캐릭터들을 탈피한 현실적인 새로움의 연속이었는데, 그가 생각하는 여성상의 기준에선 과잉이고 자연스럽지 않았나? 평론가는 자신의 취향을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다. 자신의 영향력을 생각해서라도 평론가로써의 자질을 심히 고려해보라고 하고싶었고, 그때쯤 그의 말과 글에서 자리를 떴다. 한국의 거장이라는 자들이 시대의 야만에 반성과 해답을 제시하기는 커녕 그대로 긍정하거나 권위를 부여하는 듯한 영화를 만들때, 가장 대중적인 평론가가 영향력을 의식하지 않고 비판없이 찬사를 보낼 때, 그동안 가치있다고 믿었던 것을 다시 점검하게 된다. 이번에도 그랬다. p.s: 버닝이 칸에서 무관이란 소식에 이창동이 진심으로 안타까워한다는 뉴스를 봤다. 정말 어이가 없다. 칸 경쟁부문까지 진출한 것 자체가 운이 좋았다. 자축하지는 못할 망정 그 이상을 기대했었다니. 수상한 다른 작품들의 시놉시스와 이창동 당신이 만든 영화의 시놉시스를 비교해보라고 하고 싶다. 시놉만 봐도 궁금하고 흥미진진한 영화가 수두룩한데 버닝은 시놉만 봐도 무슨 내용인지 다 알겠더라. 어디서 발싸개같은걸 만들어놓고 분에 넘치는 성과를 바라는가. 모처럼 칸까지 가서 예술가 선생님 놀이 잘했을텐데 그걸로 만족해라. 대부분 남성평론가들로 구성된 매체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고 곧바로 황금종려상 가능성!! 들뜬 국내언론들. 수상 가능성 제로인 고은 가지고 매년 노벨문학상 가능성 운운하는 것처럼 재미로 그런건줄 알았는데, 진심이었구나. 영화제는 심사위원단의 성향과 시류가 중요한데 국내 언론은 그런 요소들을 분석하지 않나? 여자가 심사위원이라서 상못탔다고 쌉소리하는데, 수십년간 남성 위주 심사위원단이 치하한 수많은 남성영화들은 모두 과대평가의 산물들이겠구나. 그건 또 아니라고 하겠지. 먼저 영화의 한계를 따져봐야한다. 어쩜 그렇게 영화 자체엔 문제가 없을거라고 장담하는가? 주제파악이 안되면 헛발질만 계속할뿐이다. 수상할만한 작품이라면 다양한 심사위원들의 호감도가 전반적으로 내제되어 있을 것이다. 심사위원단에 '여성이 많아서, 비평가 출신이 없고 배우들이 많아서' 상을 못탔다고 하는 것은 역으로 영화가 별로라는 것을 인증하는 꼴이다. 버닝은 심사위원 성별, 성향, 직업까지 갈거 없이 영화가 뛰어나지 않아서 못탄것이다. 매번 상을 맡겨놓은 것처럼 설레발 치는 것도 병적인 수준이다. 왜 오션스8 홍보행사에서 버닝에 대한 소감을 묻는건가? 버닝의 무관이 너무나 안타까워 미칠 지경이라 자리를 보면서 질문하는 염치가 없었나보다. 면전에서 '그 영화 좆같던데'라고 할 수 없었던 현대 시민 케이트 블란쳇이 배려하는 뜻으로 완곡하게 답변했으나 결국 속뜻은 '영화에 장점은 있으나 버닝보다 뛰어난 작품들이 있어서 무관이다'였다. 더욱이 인터뷰 원문을 보면 극찬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말귀를 못알아듣거나 알아들을 생각이 없는 국내 언론은 케이트 블란쳇이 버닝을 극찬했다며 실컷 정신승리했다. 정말이지 미개함에 창피스럽다.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인정을 받으려 하는가. 버닝이 도대체 뭐길래? 역대 무관인 칸출품작을 가지고 이렇게까지 유난을 떨었던 적이 있을까? 이쯤되면 단순히 영화가 아니고 이 이상의 무언가를 이입하는 것이다. 조국이여 남자들이여 너무 찌질하고 뒤끝 참 더럽다. 이렇게까지 떼쓰는 것처럼 형편없이 굴 필요는 없지 않나. '수상불발'이란 말도 웃긴다. 노려진 적도 없는데 뭐가 불발됬다는건지. 그동안 실력들에 비해 잘 먹고 잘 살았으면서 도대체 뭐가 그렇게 억울할까. 버닝의 수상여부에 유독 남자들이 거절당한 것처럼 난리치는 꼴은, 영화의 한계가 뭐였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낼뿐이다. '남자가 힘들면 여자도 죽이고 그럴 수 있는거지, 그게 남자가 성장하는것'이 맘에 들었던 백인남들의 자위 속에 초청까진 했지만 심사위원단의 절반이 여성이다. 시대와 시류안에서 그들이 버닝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보고있으면 불쾌하기 짝이 없는데 좋은 점수를 받겠나? 단점을 감수할만큼 메세지가 좋은 것도, 연출이 혁명적인 수준도 아니다. 버닝만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수작들도 많은데, 굳이 챙겨줘야 할 의의가 있을까? 뭐 이딴 게 경쟁에 올라왔나 싶을텐데. 작품 내 여성의 묘사 수준이 시대착오적이라 지적했더니 '공정한 심사'가 아니라고 꿍얼거리는 것 자체가 여성혐오적이라는걸 언제쯤 깨달을 것인가. 오동진 평론가는 '여성들은 관념적이고 철학적인 예술보다 일상적인걸 더 좋아해서' 라고 참 쉽게 말하던데, 영화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을 제대로 연기하고 연출하는 것이다. 철학적이고 관념적인 것은 의외로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하는 것이 크게 어렵지 않다. 도식적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도식화 한 서사를 위해 인물들이 장치로 기능하게 되는 점이다. 이런 류의 남성서사 중심의 예술영화에서 여성의 모습은 수동적인 객체, 남성서사의 매개체 촉발제, 성애의 대상쯤으로 쓰이다 마는 것이다. 철학적 관념적 예술을 한다는 수많은 남성거장들의 영화에서 여성 캐릭터의 활용에 대해 깊이 생각해봤다면 '여성들은 일상적인 것을 좋아해서 버닝이 무관이다' 라는 말은 함부로 할 수 없을것이다. 버닝에 찬사를 했던 백인남들 중에 어떤 놈은, 버닝이 스넙되고 가버나움(레바논 여성 감독 나딘 라바키 작품, 심사위원상 수상)에 종려상을 주면 심사위원장인 케이트 블란쳇의 작품 캐롤 블루레이를 태우겠다며 징징대던 놈이다. 고작 그 정도밖에 안되는 인간들이 이씨 영화가 좋다고 침 튀긴 것. 흥미로운 지점은, 백인남들은 주연배우인 유아인의 악질적인 여성혐오나 스티븐연의 전범기 긍정 및 한국인 멸시 등 영화의 외적인 것은 모를텐데, 자연스럽게도 버닝의 수상 여부와 케이트 블란쳇의 행보를 동일 선상에 두었다는 것이다. 남성 영화인들은 인종을 넘어, '더 이상 이렇게 영화 만들면 좋은 소리 못 듣겠구나, 예전엔 우리끼리 해먹을 수 있었는데 이젠 안되는구나'를 점점 의식하는 것이다. 그래서 눈치를 보거나 조금이라도 깨닫고 변화하는데, 이럴 수 조차 없는 부류들은 영화 안팎으로 대놓고 인종차별, 여성혐오, 사회적 약자 혐오하면서 민낯을 드러내거나 위악을 떤다. 그 와중에 버닝은 그들의 입이자 항문이었을것. 형편없는 백인남들의 지지는 역설적으로 업신여김이었다. 한국영화가 서양인들이 동아시아를 철저히 대상화 하고 배설하지 못한 욕망을 채우는 것에 기능해 온 것이다. 한국영화계는 바뀌어야 한다. 이번 수상결과를 오히려 깨달음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칸영화제는 앞으로도 시대에 뒤쳐지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다양성을 고려하며 심사위원단을 꾸릴 것이다. 영화를 보는 기준을 주류 담론에서 벗어나 성별, 인종, 지정학적 특성, 성정체성 등 폭넓은 시각으로 영화를 바라보는 태도를 취해야 한다. 남성서사를 위해 여성을 도구화하고 착취하는 것은 좋은 영화의 자격에 위배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세상은 이미 그렇게 변화하고 있다. 이창동은 신인이 아니다. 연출 경력이 몇십년이고 거장이란 호칭이 붙는 영화계 경력자다. 단순히 영화를 잘 만드는 단계 이상의 자신의 영화세계에 대한 반성과 성찰, 세상에 대한 깨달음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나. 종수를 자기 아바타로 삼아 또 자기연민과 자위를 할 것이 아니라, 해미를 중심으로 극의 구조를 바꿨어야 했다. 두 남자가 자신을 멋대로 대상화하는 것을 견디다 못한 해미가 행동하는 이야기를 썼다면 원작을 뛰어넘는 각색이었을 것이고 '여성 향한 한국남성의 고정관념을 그리려 했다'는 궁색한 변명이 필요한 것보다 훨씬 의미있는 작품이 됬을 것이다. 특유의 세계관도 좋지만 변화를 수용하지 않고 편협한 사고관을 고수하면 발전이 없을 것이고 과거의 영광만 되새김질하게 된다. 아무리 거장이라도 구태를 반복한다면 뒤안길로 물러나 추억팔이나 하는 내리막길을 마주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