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iru

문 라이더
평균 2.7
2013년 04월 25일에 봄
모든 결실의 뒤에는 아무도 모르는 노력이 있다. 누군가 내 노력을 이렇게 아름답게 그려준다면 고마울 것 같다. --- 프로 사이클 경기에서 우승하기 위해서는 달까지의 거리를 연습해야 한다고 합니다. 384,405km를 말이죠. 인생 영화를 장르 별로 말한다면 스포츠 영화 중에서 제 인생영화는 <문 라이더>입니다. 제가 결코 스포츠 영화를 많이 보진 않았지만 <우생순>이나 <국가대표>는 물론 <록키>나 <머니볼> 같은 영화보다도요! 사실 삶의 소중한 추억이 반드시 모두가 보기에 완벽한 순간이기 보다는 단지 사연 많은 한 때인 경우도 많죠. 그런 것처럼 소위 '인생 영화'도 꼭 명작일 필요 없이 그 때의 나의 사정이나 기분이나 나와 영화의 궁합 같은 여러가지에 따라 그냥 떠오르는 영화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제게는 <문 라이더>가 그렇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제는 인생 영화를 찾기 정말 좋은 곳입니다. 저는 영화제를 아주 좋아해요. 살다보니 하두 못 가본지 오래 돼서 좋아한다고 말하기도 뭣 하지만요. 영화제의 작품 특유의 대중성은 뭐나 줘버리라는 듯이 장르의 틀에 얽메이지 않고 때로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균형미를 잃고 폭주하거나 사적으로 한 없이 침전해가는 스타일이 취향에만 맞으면 미치도록 빠져들거나 잔잔하게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아무튼 심사위원들의 감정을 거쳐 영화제에 오른 만큼 기본적인 작품성도 보장된다고 할 수 있죠. <문 라이더>는 딱 그런 작품이고 무엇보다 제 첫 영화제 관람 작품입니다. 기억에 깊이 남을 수밖에 없죠. '와 이런 게 영화제 영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고 영화 자체가 뛰어나다기 보다 그 개성과 처음 만끽하는 영화제 분위기와 영화 종료 후 생소한 박수 소리 같은 것들이 정말 좋았습니다. 그리고 제 취미가 밤중에 노래 들으며 러닝하거나 특히 요즘같이 더운 여름에는 뛰는 대신 줄넘기를 하는 건데 밤중에 달을 보며 운동을 할 때는 꼭 <문 라이더>가 생각납니다. "나도 이렇게 기분 좋게 뛰다보면 달 까지도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뜬금없는 상상도 해보구요. 물론 몇 키로만 뛰어도 힘든 탓에 쏙 들어가는 몽상이지만요. --- <문 라이더>는 덴마크의 감독 다니엘 덴치크가 당시 자국의 프로 사이클계에서 떠오르던 신성이었던 라스무스 쿼드가 그랑프리 우승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찍은 영화... 라면 오히려 별로 기억에 남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어느 날 그가 경기 도중 실신하고만 순간 부터 마치 그가 보는 주마등을 담아낸 듯 그의 기억을, 연습하고 또 연습하는 지난한 과정과 거기서 드는 내면적 갈등과 성찰, 그리고 그저 일상을 담은 다큐멘터리입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덴치크 감독이 대학에서 실존주의를 전공했더군요. 실존주의에서는 고난 뿐인 삶에 의미란 스스로 찾아야 한다고 말하고는 하죠. 이 생각 그대로 감독은 사이클링을 타는 모습의 역동성과 긴장을 포착 하면서도, 러닝타임의 대부분을 스펙타클 보다 그 와중에 라스무스가 느끼는 압박감, 두려움, 그리고 자신을 향한 끊임없는 질문과 포기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고스란히 전달하는데 바칩니다. <문 라이더>라는 제목은 이 영화의 많은 것들을 함축합니다. 우선은 라스무스의 대사였는지 그저 자막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사이클에서 우승하려면 달 까지의 거리를 달려야 한다"는 메시지를 그대로 전달합니다. 국가적으로 촉망받는 프로 사이클 선수로서 많은 이들에게 주목받고 명예로운 우승을 향해 나아가는 것 같지만 그 길은 우주에 놓여진 것처럼 고독하고 지난하며 끝이 보이지 않는 거리가 절망감 마저 집어삼어삼킬 지경이죠. 그리고 덴치크 감독은 이런 내적인 흔들림과 사이클 자체의 박진감을 전달하기 위해 가정에서 많이 이용하는 슈퍼 8mm필름에 헬맷-액션 캠코더를 동원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보여주는 거친 질감은 때로 꿈 같은장면들을 만들어냈죠. 그 카메라가 라스무스의 일상과 함께 담아낸 덴마크의 아름다운 자연 경관과 평화로운 도시 풍경, 서정적인 음악은 이런 삶 속에서 왜 그렇게 죽어라 사이클을 해야 하나 하는 아이러니를 만들어내는 동시에 몽환적인 분위기를 배가시켰습니다. 사실 라스무스가 그렇게 편하고 조화로운 일상을 영위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에게 형벌을 내리듯이 고달픈 사이클에 매진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실존적인 깨달음을 전하는 듯 합니다. --- 이번 글을 쓰면서 알아보니 라스무스 쿼드는 저와 나이 차가 그리 나지 않더군요. 그는 스스로 만족할 만 했을지는 모르겠지만 몇몇 대회에서 입상을 이룬 뒤 21년 부로 프로 선수에서 은퇴했지만 여전히 사이클 팀에서 후진을 육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덴치크 감독도 데뷔작이었던 이 영화 이후에도 계속해서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의 길을 걷고 있고 책도 출판하며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영화의 주역이랄 수 있는 둘이 계속해서 자신들의 달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걸 보니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내일 줄넘기를 하면서 보는 달은 또 다르게 보일 것 같네요. 제 영화제 첫 영화. 그런 영화가 이 작품이라 너무 고마웠습니다. 2013(14:30-) 전주 시네마타운